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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K VOL.11 2012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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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스펙트럼 | 정진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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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한 만남



uniK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부산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만화가의 꿈을 키우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나요?
박재동 물론이죠.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만화가게에서 읽은 만화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을 연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죠. 사실 부산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자그마한 시골에 살았었어요. 이사 후에 부모님께서 만화가게를 운영하셨고 저는 ‘보물섬’에 도착한 셈이었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열 살 즈음에 만화를 보며 연출에 대한 감각을 송두리째 익힌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여러 개 있지만 김산호 선생님의 SF만화 <라이파이>와 한국순수 창작물 <약동이와 영팔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때문인지 제가 <라이파이> 동호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죠.



uniK
만화가로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이지만, 1960년대에는 만화가 대중적인 장르로 인정받는 시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재동 제가 학교에 다닐 때 만화가게는 학교에서 출입을 금하는 장소였어요. 심지어 만화가게 아들인 저조차도 학교에서 만화가 유해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터까지 그렸었죠. 그래서 제가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아들인 것은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었어요. 심지어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제발 지진이 나서 우리 집에 못 오시길 바랐어요.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만화가게에 앉아 아버지와 아무렇지 않게 상담을 하고 돌아가시더군요. 그 때 제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했고 콤플렉스를 벗을 수 있었어요. 선생님께 정말 감사해요.

uniK 화백님에게 있어 만화를 그리기 위해 미대에 진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휴교령이나 데모가 빈번했던 시대적인 상황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화백님의 대학생활은 어떠하셨나요?
박재동 2년 정도 학교를 다닌 이후로 휴교가 빈번했어요. 그 때는 정치적으로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저는 ‘예술지상주의자’ 여서 정치에 관련된 활동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좋아하지 않았어요. 시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친구들과 다른 궤도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죠. 예를 들어,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정치의식이 부족했던 이유도 있는 것 같고요.

uniK 미술교사로 진로를 정하신 것도 순수하게 미술을 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박재동 사실 교사보다 그림으로 치열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영화를 감독한 배용균이라는 친구가 미술교사 자격증 취득을 권했고, 정말 미술 선생님이 되었어요. 이 즈음 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친구들과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예술지상주의적인 세계에서 살다가 오히려 민중 미술 쪽으로 전향을 하게 된 계기였고요. 동시에 교육의 즐거움과 교육의 의미를 알게 된 시기이기도 했어요.



uniK
화백님께서 교사 생활을 통해 알게 된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박재동 가르칠 때 두 가지 기준을 따집니다. 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있었을 때는 학생들이 미술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돕는 수업을 하고자 노력했어요. 교직 생활을 할 때 실제로 경험을 해보니, 아이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운동장에 집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더라고요. 둘째, 전공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그것을 업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을 가르치는 셈이니 엄하게 가르쳤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제자들과 보다 활발히 교류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학생들의 작품이 폭발적으로 발전돼 있는 모습을 보고 늘 새삼 감탄을 하곤 해요. 이제는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은 가르쳐주고, 나눌 수 있는 부분은 나누려고 노력해요.

uniK 혁신학교 자문위원장이시던데, 이와 같은 활동은 만화가님께서 가지신 교육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이라고 봐야 할까요?
박재동 미술교사를 6년 정도 하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과연 이들이 행복한지 궁금했어요.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 학교를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권이 존중되고 선생님도 학생도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혁신학교’라는 모델을 만든거죠. 1년이 넘었는데 학부모님들이 좋아해요. 대안학교와 기존 교육제도가 가진 각각의 장점을 끌어안은 제도라고 보시면 쉬울 것 같습니다.

uniK 꾸준히 젊은 세대와 교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쉽지만은 않은 일일 텐데 이와 관련한 노력을 꾸준히 하시는지요?
박재동 생각의 방향을 소년이나 어린아이 같은 재미있는 발상으로 이어가는 타입이에요. 그러다 보니 사회의 수직적인 관계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좋아하고 중시하지요. 젊은 세대에게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를 하려고 노력해요. 물론 가끔은 나를 어른으로서 공경해주는 것이 기분이 좋을 때도 있죠(웃음).



uniK 일례로 10여 년 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과 시사만화를 통해 소통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박재동
서태지와 아이들을 예술가로서 존중해요. 치열하게 노래하고 무대에서 표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던 날, 그림을 하나 그렸어요. 그 날 눈이 오기에 ‘오늘 내린 눈은 그대들에게 주마, 원한다면 더 큰 모습으로 다시 오라’고 적었죠. 그들도 예술가이기에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창조력을 감출 수 없을 테니 결국 무대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들이 음악인으로 돌아왔을 때, 은퇴 번복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팬의 시선으로 반겨주겠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았죠. 실제 어떤 여중생의 학부모에게 감사하다고 전화가 왔어요. 본인의 딸이 평범한 여중생인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고 나서 학교도 안가고 말도 안 하다가 제 만화를 보더니 밥도 먹고 학교도 간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본거죠.

uniK 교사생활이 너무 행복해서 그만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두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박재동 미술교사 시절에 정말 행복하게 지냈어요.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면 배로 돌아오는 것이 선생님의 삶이거든요. 하루는 아이들과 신나게 수업을 마친 후에 교무실로 돌아와서 창 밖의 노을을 바라보는데 행복의 절정을 느꼈어요. 그 순간 ‘아! 그림 안 그려도 되겠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림에 몰입할 때 희열을 느끼던 사람인데 그림 없이도 행복하다니,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 돌아가기 위해 교직에서 물러나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uniK 처음부터 시사만화를 그리고자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 두신 것인가요?
박재동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한겨레 신문에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하기에 응모를 했어요. 직장의 조건을 따져서 옮긴 것이 아니었어요. 죽도록 그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따라서 움직였고 그 열망을 이룬 분야가 시사만화였죠. 어떤 그림보다 치열한 것이 시사만화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이슈 중에서 사람들이 관심 갖는 주제를 골라내고 다시 취재한 후 본질을 꿰뚫는 시선까지 필요해요. 더군다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죠. 소원대로 그림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uniK 시사만화를 통해 현실에 기반하는 예술에 더욱 집중하신 것 같습니다. 화장실에 그림을 걸아 놓는 이른바 ‘화장실 갤러리’도 이런 생각의 일환으로 기획하신 건가요?
박재동 결정적인 계기는 10년 전 고속버스 휴게실에서 소변기 앞에 붙여진 그림을 보았을 때였어요. 잠시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더라고요. 대단한 철학이 아니더라도, 그 순간 행복을 느꼈다면 그만큼의 소중한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각자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예술에 저급과 고급이 따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 그림도 여기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에서 이렇게 독점적인 갤러리 공간은 찾기 힘들죠. 결국 화장실을 갤러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인사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화장실에 제 갤러리가 생겼어요. 누구의 작품이든 전국의 화장실 공간을 갤러리로 만드는 것이 제 꿈이에요.

uniK 시사만화는 만화가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던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재동 선배들에게는 미안하고 저에겐 기분 좋은 말이지요. 이렇게 치열하게 시사만화를 그린 것에는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신문을 보는데 제 시사만화에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가 곧 다른 기사로 관심을 옮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잠시 고민을 했죠. 그러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바쁜 현대인에게 단 1초의 시간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더욱 시사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 노력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 후로 끊임없이 고민하며 스케치를 했어요. 그 때 자신의 재능을 최대로 발휘하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체력이었죠.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독자들이 제 시사만화에 관심을 가져 주신 것 같습니다.

uniK 시사 만화가 아니더라도 평소 지하철에서나 길거리에서도 그림을 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그림을 그리시나요?
박재동 어디에서나, 무엇이든지 그려요.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책에 제가 평소에 그린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어요. 영수증도 좋고, 작은 종이도 좋고 평소 낙서 하듯이 그림을 그리죠. 정말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도 함께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냈어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짧지만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거든요. 바쁜 현대인들은 정신 없이, 또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 쉬운데 자신만의 방법으로 차분한 시간을 가지면 좋아요. 그런 면에서 낙서하듯 그림 그리기를 추천할 만 합니다. 핵심은 그림이든 글이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즐기는 것입니다.



uniK 직업을 고를 때 만화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요?
박재동 당장 느끼는,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 이야기를 예로 들면 제가 만화를 그리던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만화가 천시를 당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저는 만화가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만약 제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만화가의 길을 접었다면 지금 여러분을 이렇게 만날 수 없었겠죠. 원해서 선택했고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 온 길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세요. 타인의 시선이 본인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으니까요.

uniK 말씀을 들어보니 만화가로서의 길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극복을 하셨나요?
박재동 자긍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긍심이 있으면 과정을 이겨내고 행복할 수 있어요. 저의 경우에는 다른 안정된 밥벌이보다 제가 하는 일에 더욱 큰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만화를 정말 사랑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만화를 욕하는 사람을 보면 만화는 훌륭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주장을 펼쳐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는다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uniK 마지막으로 20대 시절에 놓치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박재동 지금 젊은 세대 학생들은 교육을 많이 받은 데 비해, 기회가 적어서 힘든 것 같아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요.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저한테 묻는다면 대학시절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삶은 자기 의지대로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데, 사회가 정해놓은 틀대로 따라가면서 살 수도 있거든요. 만약 ‘내가 이 길을 선택했다’는 뿌듯함과 책임감이 없다면, 과연 내가 옳게 사는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지요. 더군다나 내키지도 않은 일을 계속 하면 열정을 쏟을 수도 없을 테고요. ‘어려워도 괜찮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화가 박재동]
2011 국제만화가대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2009 한겨레신문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연재
2009 제10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가상
2001~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1999 21세기여성포럼 선정
1997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SICAF) 조직위원회 위원
1996 오돌또기 대표
우리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대표
1994~1998 한겨레신문 편집국 편집부 부장대우
1988 한겨레신문 편집국 편집부 기자
1986 금성아트프로덕션 실장
1981 중경고 교사
1979 휘문고 교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학 석사
서울대학교 회화과 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