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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박사 신창연 대표 자유로운 발상으로 시도하는 다양한 경험은 성공의 밀알이 된다 여행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여행박사 신창연 대표에게는 돈키호테, 괴짜와 같은 별명이 붙어 다닌다. 200명의 직원을 거느린 성공한 중견 여행사 대표에게 붙는 별명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실제 그를 만나 본 직후 바로 해소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별명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라고 할까. 컬러풀 한 패션에 보석 박힌 샌들 차림으로 나타난 그의 표정은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경쟁이 치열한 여행업계에서 여행박사의 성장사는 놀랍다. 신창연 대표는 지난 2000년 단돈 250만원으로 창업해 오늘날 총 매출 1600억원의 중견 여행사로 키워냈다. 그런데 최근 여행박사가 주목 받는 이유는 좀 다르다. 바로 신창연 대표가 추구하고 있는 기업문화 덕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행박사의 직원들에게는 일반적인 기업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혜택이 주어진다. 복장이 자유로운 것은 기본이며, 출퇴근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다. 단지 하루 9시간만 근무하면 된다는 룰이 있을 뿐이다. 여행사에서 당연한 실적 경쟁도 없고, 직원 선발은 팀장의 소관이다. 게다가 학력도 보지 않는다. 직원들은 최대 1년까지 무급 휴가를 누릴 수 있고, 골프에 입문해 1년 이내에 남자는 100타, 여자는 120타를 기록하면 10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성형수술, 미용수술을 비롯해 치아교정, 시력교정 시 절반을 회사에서 대신 내준다. 사내 편의시설로 사택을 제공하고, 회사 건물 내 콘도를 운영하며 직원들이 생활할 수 있게 기본 생활용품을 지급해 준다. 그 외 어학학원비, 도서구입비, 출산과 양육비 지원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복리후생제도가 넘쳐난다. 하지만 무한한 자유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있으면 그에 따른 책임도 비슷하게 주어지게 마련이다. 실적 경쟁은 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뤄낸 성과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팀장부터 본부장, 이사, 사장까지 직원이 선거로 선출하는 만큼 성과에 대한 대가는 정확하게 지급되기 때문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는 이가 없다. 직원 복지를 위해 비용을 쓰는 것 조차도 투표를 통해 반대자가 많으면 시행하지 않을 정도라니, 알면 알수록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러한 기업 문화를 만든 신창연 대표에게 치열했던 지난 삶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성공의 과정을 물었다.

여행박사 신창연씨 이미지

Q. 최근 대표님의 경영 방식이 펀경영으로 알려지면서 스케줄이 빡빡해지셨을 듯 합니다. 그러한 관심의 이유가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사실 ‘펀경영’은 언론사에서 붙인 말이에요. 제 경영 방식에 특별한 이름은 없어요. 그럼에도 관심을 받는 이유라면, 우리는 정상인데 남들은 다르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 회사의 직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미있게 일하고자 하고 저는 그저 관여를 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고 하지만, 요즘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요. 반드시 수익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죠. 지금은 자신들만의 가치와 색깔, 직원들의 자율이 강조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Q. 업계에서도 놀라운 성공을 거둔 회사로 주목 받고 있는데요. 비결이 있나요?

시작부터 다른 여행사와 다르게 개별 맞춤 여행을 제공했어요. 기존 여행업계가 패키지로 묶어 쇼핑과 팁 등을 포함했다면 저희는 그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가격을 낮춰 가족여행과 기업체 여행, 학교를 비롯해 여행경비가 빠듯한 사람들을 위한 개별 여행 상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한 거죠.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하니까 굳이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 소문으로 고객들이 다시 찾아오게 된 거고요.

Q. 모든 일을 직원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신다면, 대표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실질적인 일은 실무자들에게 일임합니다. 제가 하는 것은 직원들과 밥 먹고, 함께 놀고, 여행가는 일 정도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요(웃음). 특별히 목적을 두고 살지는 않아요. 놀러 가고 싶으면 갑니다. 또 여행지에 가서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업무와 관련 된 일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신창연 대표가 수상한 수많은 트로피들

Q. 대표님께서는 본인의 경영 스타일이 정상이라고 하시지만, 다른 기업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복지 혜택인데요.

사실 저희 회사의 복지개념은 기본적으로 직원들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회사가 잘 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어요. 다른 회사와 차이가 있다면, 다른 회사는 돈을 벌면 회사 것이 되지만, 저희 회사는 연말에 자기가 번 만큼의 대가를 가져가게 한다는 거예요. 그게 최상의 복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보통의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대가를 제대로 안 돌려주니 복지로라도 해달라는 식 인거죠. 그런 복지는 아무리 인심을 쓰고 해줘도 생색내는 것 밖에 안 되요. 저희 회사는 복지 비용으로 성형수술비, 골프비용이 나갑니다. 또 직원이 윗사람을 하루 20만원 한도로 접대할 수도 있어요. ‘내가 팀장님과 밥 한 번 먹고 싶다, 뭔가를 배우고 싶다’면 회사 돈으로 접대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또 1년에 한 번씩 워크숍을 가서 몇 십억을 쓰기도 하고요. 물론 그 돈을 한 푼도 안 쓴다면 복지가 없는 것이되죠. 그렇다면 절약 된 돈은 연말에 직원들과 나눠가집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연말에 나눠가지기 보다 우리가 쓰고 싶을 때 쓰자는 거고, 그게 특별한 복지혜택으로 이슈가 된 거죠. 예를 들어 연봉을 1인당 5천만원씩 주는 것은 이슈가 안 되요. 하지만 4천만원으로 하고 나머지 1천만원을 복지로 쓴다면 직원들도 좋아하고, 이슈도 되는 거죠. 결국 복지비용이라는 것은 회사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번 돈에서 나간다고 보시면 되요. 물론 연말에 나눠가질지, 복지로 쓸지도 직원들에게 결정하도록 하죠. 때로 직원들이 반대하는 비용은 안 쓰기도 해요

Q. 대표님이 직원들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원하는 책임이 없지는 않을 듯 한데요.

예컨대 사람을 죽였다면 적어도 감옥은 가라는 거죠. 가기 싫다면 죽이지 말라는 거고요. 본인이 한 것에 대한 대가는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에요. 많이 일해서 성과를 올린 것만큼 가져가고 아니면 아닌 만큼 가져가라는 겁니다. 뭘 하라는 명령은 안 해요. 직원들을 뽑는 것도 팀장들의 몫이고요. 본인이 데리고 일할 사람이니 본인이 뽑으라는 거죠.

Q. 대표님의 고향이 문경 산골이라고 들었습니다. 육 남매 중 다섯째, 가정형편도 어려웠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시절 꿈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만 특별히 힘들게 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에는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랬으니까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사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어요. 어릴 때 특별한 꿈은 없었어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게 좋은 아이였죠.

Q.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홀로 상경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형편도 그렇지만 굳이 시골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막연히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동경으로 택한 선택이었어요. 당시 시골 어른들은 자식들을 자율방임형으로 키웠고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다 그렇게 컸어요. 지금 부모들은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도 자식을 감싸고 살지만, 1960~70년대는 자식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어요. 제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타지로 떠나서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어렵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일상이었어요. 중학교 졸업하면 다 컸다고 생각한 거죠. 저는 지금도 스무 살이 넘으면 다 컸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도 부모가 품 안에서 키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죠. 제가 커온 환경이 그래서 더 그렇게 생각이 되네요. 어쨌든 요즘도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가 다 큰 자식의 인생을 신경 쓰고 간섭하는 것이에요.

여행박사 신창연씨 이미지

Q. 그 시절에 일반적이었다고 말씀하시지만, 중학교를 갓 졸업한 10대의 어린 시절에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듯 한데요.

구두닦이도 해보고 포장마차에서도 일하고 뭐든 돈벌이가 되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했어요. 공단에 가서 공돌이 소리 들으며 공장생활도 했고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이 허락하는 것은 다 했죠.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보호를 받고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철없는 시절에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배운 거죠. 그러면서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군대를 가려면 고졸 학력이 필요했고, 나머지는 공부를 해야 공돌이 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Q. 군대를 가고 싶었다는 말씀이 재미있네요. 대표님의 자유로운 성격 상 군대라는 조직과는 좀 안 맞았을 듯 한데요?

사실 군대가 더 좋았어요. 오후 6시 이후에는 모든 일과가 끝나니까요. 또 군대는 자기 할 것만하면 편한 곳이에요. 물론 제 성격 덕분에 거기서도 처음에는 고문관(행동이 어리숙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것이 하사관 시험이죠. 그때는 지금과 달리 16개월 군생활을 하고 나면 하사관 시험을 볼지 병장 진급을 할지 선택권이 있었어요. 대부분 병장진급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가 하사관 시험은 3개월 동안 지옥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죠. 복무 기간이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 하사관 시험을 선택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다 제 맘대로였죠. 병사들도 편하게 대해주고 제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봤죠. 그때부터 대학교 관련 서적을 보기 시작했어요.

Q. 대학을 진학하면서 인생의 변화가 컸을 듯 한데요. 대학시절에도 무수한 경험과 도전을 하셨을 듯 하네요.

군대를 늦게 가서 제대를 하니 스물여섯 살이었어요. 그 전까지 미래에 대해 구상할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죠. 뭐든지 닥치는 대로 시도하고 경험했어요. 칵테일 기술도 배워봤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도 해 봤어요. 그러면서 큰 돈은 아니지만, 생활하고 학교를 다닐 만큼의 돈은 모았어요. 관광경영학과를 간 것은 사실 특별하게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남들처럼 법대나 컴퓨터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국민대학교 컴퓨터학과에 지원했다 떨어지기도 했어요(웃음). 점수에 맞춰서 간 것이 경원대 관광경영학과였죠. 대학을 간 것은 그래야 이 사회에서 대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또 그전까지 못해본 것이 대학생활이라 궁금하기도 했고요.

여행박사 신창연씨 이미지

Q. 군대를 가고 싶었다는 말씀이 재미있네요. 대표님의 자유로운 성격 상 군대라는 조직과는 좀 안 맞았을 듯 한데요?

사실 군대가 더 좋았어요. 오후 6시 이후에는 모든 일과가 끝나니까요. 또 군대는 자기 할 것만하면 편한 곳이에요. 물론 제 성격 덕분에 거기서도 처음에는 고문관(행동이 어리숙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것이 하사관 시험이죠. 그때는 지금과 달리 16개월 군생활을 하고 나면 하사관 시험을 볼지 병장 진급을 할지 선택권이 있었어요. 대부분 병장진급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가 하사관 시험은 3개월 동안 지옥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죠. 복무 기간이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 하사관 시험을 선택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다 제 맘대로였죠. 병사들도 편하게 대해주고 제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봤죠. 그때부터 대학교 관련 서적을 보기 시작했어요.

Q. 군대에서도 그랬지만, 당시 대학생활도 대표님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답답하게 느껴지셨을 듯 한데요?

맞아요. 현실에 항상 불만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전 불만이 있어도 닥치면 긍정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학교를 다니면서도 문득 대학 대신 취업을 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방학이 되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연애도 많이 해봤어요. 그러면서도 졸업을 하면 달라질게 있을까 고민을 하기도 했죠. 그러다 88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고 대학 3학년 때 일본 배낭여행을 가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 같아요.

Q. 일본에서도 남다른 여행을 즐기셨을 듯 한데요. 어쩌면 회사의 성공 비결에 그때 얻은 경험도 포함돼 있지 않나요?

수중에 단돈 3천엔을 가지고 떠났어요. 신문에서 일본 무전여행을 갔다 온 어느 감독님의 칼럼을 보고 자극을 받았거든요. 일본에 가서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정말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무작정 일본어를 배우기만 했지 직접 사용을 안 하다가 사용해보는 것도 신기했고요. 그렇게 총 3개월 정도를 여행하며 일본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어요. 환율은 지금보다 낮았지만, 당시 일본 임금 수준은 높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받았죠. 또 일제 전자제품이 인기였을 때라 워크맨 하나만 사서 한국에 와 팔아도 비행기 값은 충당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일본어가 트였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여행하는 법을 알게 되니 ‘여행상품을 싸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죠. 그래서 여행사에 취업하겠다는 결심을 한 거에요.

신창연 대표에게 회사란 즐겁고 재미있는 공간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만큼 직원들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1990년 아주관광여행사에 입사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대표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회사와 현실은 많이 달랐겠죠?

앞서 말했지만, 저는 어떤 경우든 적응을 잘해요. 내심 ‘내 상식으로는 이건 아닌데’하면서도 일단은 받아들이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대신 ‘나중에 내가 대표가 되면 이렇게 하진 않겠다’는 결심을 했죠. 그렇게 10년을 일했어요. 솔직히 회사생활도 순탄하진 않았어요(웃음). 2년 정도 일하고 회사에서 막 설립한 ‘한국고속해운’이라는 자회사로 좌천 비슷하게 발령이 났죠. 거기서 8년 동안 일하면서 부산과 후쿠오카 간 여행상품을 만들고 홍보, 마케팅, 기획을 다 배웠어요. 직원이 3명뿐이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회사에 돈도 많이 벌어줬죠. 그래서 ‘이상한 놈’ 취급을 받으면서도 대접을 받았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삶에 주어진 대로 따른 것이 모두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집안이 어려웠으니까 부모한테 돈을 안받고 자립해서 좋았고, 대학교를 어렵게 다니면서 더 많은 경험을 해서 좋았고,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한 덕분에 여행사에 들어온 게 좋았고, 군대에서도 고문관으로 찍혀서 벗어나기 위해 하사관에 지원한 것이 좋았고, 하사관을 하면서 리더십을 배운 것이 좋았죠. 또 여행사에 들어와서 좌천 됐던 게 더 기회가 됐고요.

Q. 창업하게 된 계기도 역시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들었어요.

IMF로 회사가 부도났거든요. 사실 그 전부터 그만두려고 했지만 돈을 잘 벌어주니 사직서가 몇 년 동안 반려됐었어요. 덕분에 자연스럽게 나와 창업을 할 수 있었죠. 당시 여행업계의 70%가 쓰러졌던 시절이었지만 제가 잘 할 수 있는 게 이 일이었기에 창업을 했어요. 그리고 오래 전부터 결심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죠. 회사생활에서 얻은 노하우를 적용하면서도 불합리했던 것은 모두 없앴어요. 복장도 자율화하고 출퇴근 시간도 없애고, 실적회의도 없앴죠. 학력도 안받고 결제도 없앴어요. 남녀차별까지 싹 없앴죠.

Q. 어려웠던 순간은 없으셨나요?

여행사는 항상 고비가 있어요. 그래도 제일 컸던 것은 다른 회사와 합병을 하고 코스닥에 우회상장을 한 적이 있는데, 모회사가 저희 회사를 담보로 빛만 만들어 놓고 부도를 내버린 것이었죠. 그래서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직원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위기를 넘겼어요.

여행박사 신창연씨 이미지

Q. 쉽게 이야기하시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을 듯 한데요?

사람도 그대로 있었고, 일 자체는 연장선 상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어요. 자유로운 업무환경을 만들었던 것이 그런 때 효과를 발휘하더군요. 잘나갈 때는 사실 직원들에게 실적을 강요하는 것이 돈은 잘 벌어요. 하지만 어려울 때는 모두 떠나가죠. 저희 회사의 경우는 직원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았어요. 어차피 회사에 돈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고, 생기면 다시 나눠가질 거란 것을 아니까 한마음으로 뭉친 거죠. 사실, 저희 회사에서 일했던 직원들은 다른 회사에서 일하기 어려워요(웃음).

Q.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대표님의 경험을 토대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신다면?

각 기업 마다 인재 선발방식이 다르니 조심스럽지만, 제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스펙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요즘 학생들을 보면 무엇이 과연 쓸모가 있는 스펙인지 모르겠어요. 저희 회사가 그런 것을 안보기도 하고요. 대신 대학4년 동안 직접 경험하며 배우는 방식을 택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기업을 원하는 학생들이 많고, 물론 대기업만의 장점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취업한다면 정말 용의 꼬리밖에 되지 못해요. 반면에 진짜 능력이 있는 친구라면 3~4명 있는 회사에 가도 남다른 성과를 낼 수 있죠. 저는 적어도 30대 초반까지는 돈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을 봐도 대기업 다녀서 안정은 되겠지만 크게 성공한 사람은 못 봤어요. 적어도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지난 삶에서 만난 경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박사 신창연]
여행박사 대표이사(현)
한국고속해운
아주관광여행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관광경영학 석사
경원대학교 관광경영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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