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주 대표는 최근 몇 년 간 전국 전통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 유통매장에 있어야 할 비주얼 머천다이저가 왜 하필 전통시장일까. 의아함은 그녀의 설명을 통해 곧 해소됐다. 대기업 중심의 대형마트가 점차 유통구조를 장악하며 어려움이 더하고 있는 전통시장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라는 것. 자본과 시스템으로 무장한 대기업에 비해 전통시장의 경쟁력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더구나 비주얼 머천다이징과 같은 고차원의 마케팅 전략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난 2006년부터 전통시장에 비주얼 머천다이징 기법을 전파하고 있는 이랑주 대표를 통해 상황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녀의 손길을 거치며 하루 아침에 ‘대박가게’가 되는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높았던 고정관념의 벽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전통시장에 적용할 수 있는 전략을 찾기 위해 지난 1년 간 세계 40개국 150곳의 전통시장을 둘러보는 대장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미 독보적인 전문가로 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조사와 경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그녀 스스로 결정하고 기획한 일이다. 그녀는 이후 백화점이나 고급 명품점에 한정 됐던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넓히며 남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소상인들과 전통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컨설팅과 강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또 우리나라 전통시장만의 특색을 찾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죠. 전국 어디서든 전통시장은 볼 수 있지만 전라도의 전통시장이나 경상도, 서울의 전통시장이나 사실 다 똑 같은 분위기잖아요. 문화가 부재했던 거죠. 그래서 최근에는 부산의 동래시장에 문화를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동래시장에 가면 100년 된 뒤주를 볼 수 있어요. 120년 된 약재상자 같은 것도 있고요. 옛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소품들을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시장을 지난 6월부터 조선 후기 시장이라는 컨셉트로 100개 매장의 비주얼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에요.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가 음식점을 갈 때를 떠올려 보면 문 밖에서 그 집 음식이 맛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하잖아요. 그 순간 문 밖의 고객들이 점포 음식의 장점과 맛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비주얼 머천다이징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상품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고객들이 알기 쉽게 진열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조작이나 과장이 없으면서도 상품의 장점 그 자체를 강조하는 거죠. 단순히 예쁘게 보이거나 좀 과장된 연출이 가미된다면 제대로 된 비주얼 머천다이징이라고 할 수 없거든요.
저만의 노하우라면 절대 단골집 안 만든다는 거예요. 그 원칙은 제가 백화점에서 10년 정도 근무를 하면서 세우게 됐어요. 10년을 놓고 봤을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10번이고 크리스마스나 추석 같은 명절도 10번이잖아요. 늘 새로운 기획을 생각해야 하는데 매번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너무 힘들었죠. 그러다 단골집을 만들지 말자는 원칙을 세운 거에요. 그때부터 점심시간이나 지인들과 약속이 있을 때는 한 번 갔던 곳은 되도록이면 가지 않으려 했죠. 그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매번 새로웠어요. 어느 집은 잡채 맛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어떤 집은 예쁜 그릇과 조명이 떠오르기도 하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고 평가를 하다 보면 각각의 장점들을 취합하게 되거든요. 그러는 와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늘 다른 걸 보고 다른 환경에 노출시키면서 나 자신에게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심어주는 거죠.
제 고향이 포항에 있는 구룡포라는 바닷가 시골 마을이에요. 어린 시절 내내 시골에서 자라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를 보기 위해 방학 때 서울을 처음 오게 됐죠. 그때 백화점 쇼윈도를 보며 신기해 했는데, 다음 날 다시 가서 보니 여름 상품으로 진열 돼 있던 쇼윈도가 하룻밤 사이에 가을 상품으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누가 하루 사이에 이렇게 몰라볼 정도로 바꿔놨는지 궁금해 하다가 나중에 그것이 비주얼 머천다이징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그때부터 막연하게 꿈을 키우기 시작했고 결국 대학도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게 되면서 졸업 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거죠.
백화점의 비주얼 머천다이저는 모든 제품을 다해요. 잡화, 귀금속, 액세서리, 의류, 식품, 농수산 축산 등 가리지 않고 그 모든 걸 다한다고 보면 되요. 각각 전혀 다른 상품들이지만 그 백화점이 추구하는 비주얼 포인트에 맞춰 각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는 거죠. 비주얼 머천다이저는 기본적으로 그 포인트를 제안하는 일을 해요. 또 한 층에 50개에서 100개에 이르는 브랜드의 비주얼 관리를 하기도 하죠. 어떤 브랜드의 마네킹이 우리 백화점의 비주얼 포인트와 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교체를 요청하거나 집기의 높이 위치도 체크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1년 리뉴얼에 들어가는 예산을 기획하는 일도 해요. 제가 처음 시작할 당시만 해도 비주얼 머천다이저가 그 모든 일을 다했죠. 하지만 요즘에는 세분화 되는 추세에요. 기획팀이 따로 있고 연출 팀이 따로 생겨나고 있어요.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가보면 집안 형편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여상으로 갔죠. 부모님은 제가 은행원이 되길 바랐어요. 그때만 해도 은행원이 되려면 주산을 잘 해야 했었는데, 문제는 제가 주산 1급 자격증이 아니라 1급 장애증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못했다는 거죠(웃음). 그리고 실은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문계 반에 책상을 들고 들어가 몰래 공부를 하며 비주얼 머천다이저라는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대학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했죠. 졸업할 때도 전체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요. 하지만 졸업 후에 취업 사기도 당해보고,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대구에 회사에서 채용 연락이 와서 갔더니 미술전집만 사게 한 거죠(웃음). 그때 한 달 방세만 가지고 간 터라 한달 안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다시 구룡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수십 통의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죠. 그때 이력서를 보낸 기업 중에 연락이 온 곳이 바로 이랜드였어요. 3개월 계약직 자리였지만 가릴 상황이 아니었죠. 최선을 다해 일했고 3개월은 6개월이 되고 다시 1년, 2년이 됐어요. 그러다가 압구정 현대백화점 비주얼 머천다이저로 자리를 옮기고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죠.
국민대학교 학생들에게 너무 스펙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요즘 학생들은 학원에 다니며 자격증, 영어 공부를 하느라 정작 중요한 현장 경험을 쌓는데 소홀한 듯해요. 저는 학원을 다닐 시간에 차라리 자기가 원하는 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무보수로라도 경험을 쌓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요즘도 비주얼 머천다이징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가끔 연락이 오는데, 물어보는 말은 ‘어느 학원에 다니면 되냐’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학원을 다니지 말고 실무 경험을 쌓으라고 해요. 그래야지 자신이 그 일에 맞는지 안 맞는지도 알 수 있거든요. 사실 자격증은 요즘 면접관들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저도 직원을 채용할 때 자격증 보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보거든요.
사실 2005년 이전에는 우리나라 전통시장에서 비주얼 머천다이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전무했어요. 하지만 주부로서 전통시장을 자주 가게 되면서 ‘소쿠리 색깔만 바꿔도 매출이 30%는 오를 텐데’, ‘조명의 각도만 바꿔도 옷이 더 잘 팔릴 텐데’ 하면서 간섭 아닌 간섭을 하게 되더군요. 일종의 직업병이 도진 거죠(웃음). 그러다 문득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만 비주얼 머천다이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은 전통시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게다가 당시에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영역이라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는 상인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제게 컨설팅을 받고 나서 매출이 오르는 점포를 보며 자신감이 생기고 재미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중소기업청 산하 시장경영진흥원에서 국가적으로 전국 1,600시장에 비주얼 머천다이징을 적용하기로 했다면서 연락이 오더군요.
벽이 진짜 많았어요(웃음). 전통시장 상인들은 보통 20년 이상 그 일을 해오셨잖아요. 저도 경력이 20년인데 그게 참 무서운 거 같아요. 스스로 전문가라고 생각을 하니까 다른 사람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상인들 중에는 ‘아침부터 여자가 와서 재수없게 떠든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죠. 문득 백화점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때도 비주얼 머천다이징 개념이 우리나라 백화점에 막 적용되던 때라 상품 디스플레이를 바꾸러 가면 구두를 판매하는 매장 직원이 ‘아침부터 여자가 재수없게 구두를 만지냐’고 한 적이 있거든요. 이미 한 번 경험한 것이니 ‘더 실력을 보여줘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2006년 당시 컨설팅을 갔던 부산 전자상가는 고객이 찾지 않아 문을 닫기 직전의 상황이었어요. 점포마다 소통하려 하지 않고 다른 점포에 고객이 가지 못하도록 빈 박스로 벽을 쌓아 놓고 있었죠. 어렵게 10분의 상인을 설득해 박스를 치우고 진열을 정비했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기쁘고 남의 집에 손님이 가면 축복해주자’는 캐치 플레이즈를 걸었죠. 비주얼 마인드를 컨설팅한 사례였어요. 결국 부산 전자상가는 2년 만에 성공한 상가로 대통령표창을 받기에 이르렀죠.
막연한 꿈이었어요. 많은 여성들이 방송국 입사를 꿈꾸잖아요. 어린 시절 TV를 통해서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를 보면서 동경하게 됐어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은사님 중에 소리 내어 읽기 방법을 알려주신 분이 계세요. 어릴 때부터 소리 내어 읽기를 했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 와서 대학교 때 잠깐 인터넷 방송국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제가 꿈꾸던 그런 방송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보다도 훨씬 잘하는 사람도 많고, 한국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다고 느껴져서 꿈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아리랑TV가 생긴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는 내가 지원해 볼 만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도전했어요. 리딩 테스트를 하는데 학원 다니면서 배웠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칭찬을 받았어요. 소리 내어 읽기의 도움이 매우 컸어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다보면 내 목소리조차도 지겨워질 때가 있거든요. 너무 평범해서 재미있게 해보려고 다른 사람 목소리도 흉내 내어 보고, 어디서 쉬어야 전달력이 좋아질지도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해3월에 가서 올해 2월 말에 돌아왔어요. 여행을 간 계기는 파산한 뒤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소상공인을 위한 강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어요. 어느 상인 한 분이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냐고 간절하게 물으시더라고요. 문득 그 질문이 제게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대한민국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에요. 제게는 그게 마치 화두처럼 떠나지 않았어요. 한 가지는 확실했죠. 절대 혼자 잘 먹고 잘 살수는 없다는 거요. 다른 사람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게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었는데 앞으로도 지속하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떠나게 된 거에요. 이제까지 20년을 경험으로 일해왔다면, 이 답사여행은 내가 앞으로 20년을 뭘 하고 살지 결정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 믿었거든요. 또 상인들에게도 더 많은 도움을 주려면 다른 준비를 해야 된다는 조바심도 있었고요. 나가서 전통시장만 본 것은 아니에요. 세상이란 시장을 보고 온 거죠.
세르비아 야간열차에서 강도를 만났어요(웃음). 원래부터 악명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여행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긴장이 풀릴 즈음이었어요. 국경을 통과할 때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가방과 노트북을 가지고 가더군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하루 16시간씩 사진 찍고 열정적으로 기록하며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강도를 당해 그 중 2달치 분량의 사진과 글 쓴 것이 다 사라졌죠. 잠시 패닉상태에 빠질 정도였어요. 그러다 어차피 행복은 저장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후부터 사진 찍고 기록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순간의 느낌에 집중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 전까지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마구 생기더군요.
처음에는 5개 대륙, 그 중에 몇 개국, 어느 시장을 제일 먼저 가야겠다는 식으로 큰 틀의 루트 짰어요. 틀만 잡아놓고 그때그때 조금씩 상황에 따라 계획을 수정했죠. 하루이틀만에 볼 시장이 아니다 싶으면 일주일을 머물고, 어느 시장은 계획에 없었는데 현지에서 이야기를 듣고 찾아 간 적도 있고요. 우리나라에도 안 알려진 시장이 많잖아요. 외국도 아주 유명한 시장 외에는 그 지역 시장이 잘 소개돼 있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발 품을 팔아서 찾아갈 수 밖에 없었죠.
자신감이라고 하면 좀 부족하고, 뭔가 내 안에 가득 채워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예전에는 어떤 일을 맡을 때 ‘잘 해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이거 딱 내가 할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많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채워진 것이 많은 거죠. 내가 채워지니까 일 자체가 즐겁고 그 일을 잘해낼 수 있는 내면의 내공이 더 생긴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다닌 디자인과 학생들은 모두 입시미술학원에서 기본을 배우고 온 아이들이었고 저만 학원을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었거든요. 두 배로 노력하는 방법 밖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는데,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별이 빛나는 밤에’ 아시죠? 포항 MBC에서 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대학생활을 취재하는 리포터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한 건에 3만원이었으니 꽤나 괜찮은 아르바이트였죠(웃음).
제 경우는 절박함이었던 것 같아요.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바닥이 발에 닿지 않아서 더 무서워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집 앞이 바다라 아버지께서 물에 던져서 수영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면 푹 가라앉아 바닥을 짚고 올라오곤 했거든요. 그렇게 수영을 배웠어요. 그것처럼 어린 시절에 가난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더 두려움이 없이 도전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가난한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데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다시 시작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랄까요? 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지는 근육이 생긴 것 같아요. 모르면 두렵지만 알고 있으니까 두렵지 않은 셈이죠.
실패했을 때는 일단 아파야 돼요. 방법이 없어요. 그 아픔은 누구나 필요한 아픔이기도 하죠. 그런데 실패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줄이는 방법이 있어요. 첫 번째가 ‘인맥을 쌓지 말라’에요. 대학생들이 인맥을 쌓아봤자 얼마나 대단한 인맥을 쌓겠어요. 또 인맥을 쌓으려면 밥을 먹던지 술을 마시던지 함께 시간을 보내야 되요. 그 다음날은 너무 피곤해 지죠. 24시간이라는 시간이 다 도망가요. 인맥 만들 시간에 차라리 실력을 쌓아야 돼요. 김연아 선수가 인맥 만들어 성공한 것은 아니죠. 대신 빙판 위에서 실력을 쌓았어요. 실력이 차고 넘치게 되면 그 빛을 모든 사람이 알아봐요. 그러면 저절로 인맥을 만들러 오게 돼있어요. 두 번째는 앞서 이야기 했지만, 단골집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익숙함을 거부하라는 거죠. 낯선 환경에 자신을 자꾸 노출을 시켜야만 모험을 할 때 두려움이 생기지 않아요. 아기는 처음 태어나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껴요. 그래서 성장해요. 새로운 것에서 감탄을 하니까 놀라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때요. 더 이상 놀라지 않아요. 대학 시절에 익숙함에 길들여지면 생각의 성장이 멈추게 돼요. 그 다음에 세 번 째가 학원을 다니지 말라는 거예요. 학원을 다닐 바에는 경험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랑주]
이랑주 vmd 연구소 대표
시장경영진흥원 전통시장 VMD 전문 컨설턴트
현대백화점 비주얼머천다이저(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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