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문득 다가오는 날이 있어. 너의 인생 배낭을 다시 꾸리라고 말하면서 말야. 누가 말 하냐고? 물론 내 안의 나 자신이지. 그 말에 따르는 것이 좋아.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어느 길목에선가 자신의 인생배낭을 다시 싸고 꾸려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자의냐 타의냐를 따질 필요도 없지. 상황이 불가피하니 안 하니 하며 이런저런 구구한 얘기를 덧붙일 이유도 없고. 그냥 그것이 인생이야. 털어야 할 대목에서 털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배낭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버려. 우리 몸 안에 쌓인 비계덩어리보다 우리 인생배낭에 가득한 잡동사니들이 더 많이 더 힘겹게 우리 삶을 내리 누르잖아. 인생배낭의 잡동사니들은 대개 미련이거나 회한이거나 쓸데없는 미움과 증오이거나 정말 쓰잘데기 없는 시기이거나 후회야.
그래서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기로 했어. 그 인생살이의 잡동사니들을 한 번 털고 정말이지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말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또 결행한 것은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 아닐까 싶어. 처음엔 40일 정도면 걸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오늘이 40일째야.^^ 아직 90km 남았지. 좀 느리면 어때. 내가 역전마라톤 경주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홀로 절대고독 속에서 또박또박 정직하게 걷고 있어. 아마도 너가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산티아고에 닿았을지 몰라. 그리고 또 다시 90km 더 걸어야 닿게 되는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로 가고 있을 거야. 피니스테레! 말 그대로 종점이지. 하지만 그 종점이 내겐 또 하나의 인생출발점이 될 것 같아. 그걸 향해 나는 걷는 거야.
지난 4월 13일 생장피에드포르라는 프랑스의 작은 국경도시에서 출발해 스페인 쪽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이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시작이었어. (피니스테레까지는 890km) 하지만 그 시작부터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 출발할 때부터 내린 비는 해발고도 700m를 지나자 진눈깨비로 변했고 1000m를 넘어서자 눈으로 변했어. 바람까지 거세져 거친 눈보라 때문에 길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지. 인적마저 끊긴 피레네 산중에서 나는 절대고독이 뭔 줄을 체험했어. 그런데 이게 왠 일이야. 피레네를 죽기살기로 오르던 내가 울기 시작했어. 단지 힘들어서 흘리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어. 오장육부의 속을 비집고 올라오듯 오래 묶은 눈물들이 솟구쳐 올랐어. 도대체 그칠 줄을 몰랐지. 정말이지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토해냈어. 내 안에 왜 이다지도 까닭 모를 눈물이 많은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 천지사방이 광활하기 그지없는 피레네의 산중에서 주저앉아 생각해보니 그것은 살아왔기 때문이었어. 저마다 살아온다는 것이 보통 일이야? 알고 보면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잖아. 그러니 이 피레네 산중에서 나 스스로 절대 고독 속에 무장해제되었을 때 분출할 수밖에. 그래서인지 울고 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어. 정말이지 살 것 같더라고. 아니 너무 살고 싶어졌어. 정말 제대로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어. 그래서 이 길을 걷게 한 신께 감사했지.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첫 밤을 피레네 산중에서 홀로 지냈어. 남이 보면 조난당한 거였지. 사실 피레네 산중의 쉴 곳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8km 나아간 위치에 있는 오리손 산장뿐이야. 하지만 나는 첫날 눈보라 속에서 18km 정도를 나아갔지. 그러나 더는 나아갈 수가 없었어. 그때 내 눈에 집 그림이 그려진 표식이 보였어. 200m 전방에 있다는 거야. 아니 오리손과 론세스바예스 사이에는 그 어떤 숙소도 없다 했는데 집이라니? 혹시 화장실을 뜻한 건가 싶었는데 정말로 200m를 가자 집이 나타났어. 지도 상으론 1410 미터 고지인 콜 데 레푀더(Col de Lepoeder)에 채 못 미친 지점 어디인 것 같았는데 다가가 보니 그 집은 조난자를 위한 긴급 피난처였어. 들어서니 문을 닫으면 바람이 막혀 그런대로 견딜만했지. 그래서 나는 거기서 밤을 지냈어. 일단 안을 깨끗하게 치웠어. 그리고 신발 끈으로 줄을 만들어 걸어서 젖은 우의와 옷가지들을 널었지.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비닐봉지를 구겨서 막았어. 페치카에 불을 필 수 있도록 돼 있었지만 성냥이 없었어. 성냥 한 개비가 그토록 간절해 본 적도 없었지. 마침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때 배낭을 싸매려고 넣어둔 큰 비닐이 있어 이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펼쳤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지. 결국 가져간 옷들을 몽땅 겹쳐 입고 배낭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펼쳐 잠을 청했지만 그래도 추워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좋았어. 무섭고 두렵기는커녕 즐겁고 행복했지. 피레네 산중에 오로지 홀로 그렇게 있으면서 새날을 맞는다는 것이 오히려 내겐 설레기까지 했어. 사실 냉정하게 보면 삶과 죽음의 기로였는데 말야. 아마 그때 그 대피소에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갔으면 나는 스페인 신문에 이름이 올랐을 거야. "한국서 온 산티아고 순례자 피레네에서 조난당하다"하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어. 그걸 말로 다 하자면 책을 써도 모자랄 거야.
그건 한마디로 새로움이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니 내 가장 깊은 곳까지 뒤집어놓았지. 봄에 씨앗을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어야 하잖아? 바로 그거야. 내 인생의 밭고랑을 몽땅 갈아엎는 길이 바로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야.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게 되어 있어. 그것만 따라가면 마을이 나오고 먹고 잘 곳이 나와. 마치 노란 화살표의 마법 같아. 하지만 인생길에는 그런 화살표가 그려져 있지 않아. 또 설사 있다 하더라도 진짜 인생에서 너무 화살표만 따라가지 마. 때로 화살표가 없는 길도 걸어봐야 해. 걸어가기만 하면 밥이 있고 집이 있는 것은 재미없잖아. 너무 사육당하는 것 같지 않겠어? 그러니 진짜 삶에선 너무 화살표만 찾지 마.
그것을 갖고 있어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어. 한번은 밤을 새우며 걸은 적이 있어.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일 거야. 걷다, 먹다, 자다 다시 걷는 반복된 생활이 자칫 또 하나의 매너리즘을 만드는 것 같아 그걸 한 번 흔들기로 한 거지. 인생이란 때로 흔들어줘야 제맛을 내거든. 가만히 놔두면 침전물이 생기는 생과일주스나 마찬가지지. 솔직히 나도 두렵고 무서웠지만 서둘지 않고 걸었어. 밤이긴 했지만 내가 지나는 길이 광활한 밀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고 있음을 알았지. 멀리 팜플로나의 주황빛 야경이 눈부셨지만 나는 그것을 뒤로 한 채 어두운 산길을 두려움 없이 올랐어. 드디어 새벽 미명에 790m 높이의 페르돈고개에 닿았지, 순례자들의 철 동상이 늘어서 있는 바로 그곳이었어. 나는 페르돈고개에서 침낭으로 몸을 감싼 채 한 시간 이상 동트기를 기다렸지. 그리고 동틀 무렵 사진을 찍었어. 그 순례자들의 철동상이 곧 내가 된 순간이었지. 그런데 이때 또 한가지 든 생각은 다름 아니라 페르돈 언덕을 포함해 그 일대의 산등성이엔 풍력발전을 위해 설치된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는데 그때 그 순간 나는 바람개비 도는 풍차를 향해 돌진했던 <라만차>의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지. 맞아. 적어도 당시 나는 돈키호테였지. 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어. "그래 미쳤다고 낯선 이국에서 밤을 새워 산을 올라?" 그리곤 또 이렇게 대꾸하듯 말했다. "그래, 미쳤지. 하지만 인생은 때로 미쳐야 해. 우린 너무 안 미치는 게 탈이야.
그래, 한 걸음 한 걸음이 내 인생이야. 나는 내 삶을 걸고 이 길을 걷고 있어. 나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사람은 지난 천 년 넘게 수천, 수만이겠지만 내가 걸으면 그 길은 곧 나의 길인 거지.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는 내 인생에서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언제 한번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한 번 자기 속이 왜 우는지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었던가. 또 왜 웃는지,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돌봐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 속에서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
** 직역하면 ‘좋은 길’이란 의미이고, 순례자들 사이에서 ‘부디 좋은 길을 가세요.’라는 인사말로도 쓰인다.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문득 다가오는 날이 있어. 너의 인생 배낭을 다시 꾸리라고 말하면서 말야. 누가 말 하냐고? 물론 내 안의 나 자신이지. 그 말에 따르는 것이 좋아.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어느 길목에선가 자신의 인생배낭을 다시 싸고 꾸려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자의냐 타의냐를 따질 필요도 없지. 상황이 불가피하니 안 하니 하며 이런저런 구구한 얘기를 덧붙일 이유도 없고. 그냥 그것이 인생이야. 털어야 할 대목에서 털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배낭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버려. 우리 몸 안에 쌓인 비계덩어리보다 우리 인생배낭에 가득한 잡동사니들이 더 많이 더 힘겹게 우리 삶을 내리 누르잖아. 인생배낭의 잡동사니들은 대개 미련이거나 회한이거나 쓸데없는 미움과 증오이거나 정말 쓰잘데기 없는 시기이거나 후회야.
그래서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기로 했어. 그 인생살이의 잡동사니들을 한 번 털고 정말이지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말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또 결행한 것은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 아닐까 싶어. 처음엔 40일 정도면 걸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오늘이 40일째야.^^ 아직 90km 남았지. 좀 느리면 어때. 내가 역전마라톤 경주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홀로 절대고독 속에서 또박또박 정직하게 걷고 있어. 아마도 너가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산티아고에 닿았을지 몰라. 그리고 또 다시 90km 더 걸어야 닿게 되는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로 가고 있을 거야. 피니스테레! 말 그대로 종점이지. 하지만 그 종점이 내겐 또 하나의 인생출발점이 될 것 같아. 그걸 향해 나는 걷는 거야.
지난 4월 13일 생장피에드포르라는 프랑스의 작은 국경도시에서 출발해 스페인 쪽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이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시작이었어. (피니스테레까지는 890km) 하지만 그 시작부터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 출발할 때부터 내린 비는 해발고도 700m를 지나자 진눈깨비로 변했고 1000m를 넘어서자 눈으로 변했어. 바람까지 거세져 거친 눈보라 때문에 길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지. 인적마저 끊긴 피레네 산중에서 나는 절대고독이 뭔 줄을 체험했어. 그런데 이게 왠 일이야. 피레네를 죽기살기로 오르던 내가 울기 시작했어. 단지 힘들어서 흘리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어. 오장육부의 속을 비집고 올라오듯 오래 묶은 눈물들이 솟구쳐 올랐어. 도대체 그칠 줄을 몰랐지. 정말이지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토해냈어. 내 안에 왜 이다지도 까닭 모를 눈물이 많은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 천지사방이 광활하기 그지없는 피레네의 산중에서 주저앉아 생각해보니 그것은 살아왔기 때문이었어. 저마다 살아온다는 것이 보통 일이야? 알고 보면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잖아. 그러니 이 피레네 산중에서 나 스스로 절대 고독 속에 무장해제되었을 때 분출할 수밖에. 그래서인지 울고 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어. 정말이지 살 것 같더라고. 아니 너무 살고 싶어졌어. 정말 제대로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어. 그래서 이 길을 걷게 한 신께 감사했지.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첫 밤을 피레네 산중에서 홀로 지냈어. 남이 보면 조난당한 거였지. 사실 피레네 산중의 쉴 곳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8km 나아간 위치에 있는 오리손 산장뿐이야. 하지만 나는 첫날 눈보라 속에서 18km 정도를 나아갔지. 그러나 더는 나아갈 수가 없었어. 그때 내 눈에 집 그림이 그려진 표식이 보였어. 200m 전방에 있다는 거야. 아니 오리손과 론세스바예스 사이에는 그 어떤 숙소도 없다 했는데 집이라니? 혹시 화장실을 뜻한 건가 싶었는데 정말로 200m를 가자 집이 나타났어. 지도 상으론 1410 미터 고지인 콜 데 레푀더(Col de Lepoeder)에 채 못 미친 지점 어디인 것 같았는데 다가가 보니 그 집은 조난자를 위한 긴급 피난처였어. 들어서니 문을 닫으면 바람이 막혀 그런대로 견딜만했지. 그래서 나는 거기서 밤을 지냈어. 일단 안을 깨끗하게 치웠어. 그리고 신발 끈으로 줄을 만들어 걸어서 젖은 우의와 옷가지들을 널었지.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비닐봉지를 구겨서 막았어. 페치카에 불을 필 수 있도록 돼 있었지만 성냥이 없었어. 성냥 한 개비가 그토록 간절해 본 적도 없었지. 마침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때 배낭을 싸매려고 넣어둔 큰 비닐이 있어 이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펼쳤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지. 결국 가져간 옷들을 몽땅 겹쳐 입고 배낭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펼쳐 잠을 청했지만 그래도 추워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좋았어. 무섭고 두렵기는커녕 즐겁고 행복했지. 피레네 산중에 오로지 홀로 그렇게 있으면서 새날을 맞는다는 것이 오히려 내겐 설레기까지 했어. 사실 냉정하게 보면 삶과 죽음의 기로였는데 말야. 아마 그때 그 대피소에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갔으면 나는 스페인 신문에 이름이 올랐을 거야. "한국서 온 산티아고 순례자 피레네에서 조난당하다"하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어. 그걸 말로 다 하자면 책을 써도 모자랄 거야.
그건 한마디로 새로움이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니 내 가장 깊은 곳까지 뒤집어놓았지. 봄에 씨앗을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어야 하잖아? 바로 그거야. 내 인생의 밭고랑을 몽땅 갈아엎는 길이 바로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야.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게 되어 있어. 그것만 따라가면 마을이 나오고 먹고 잘 곳이 나와. 마치 노란 화살표의 마법 같아. 하지만 인생길에는 그런 화살표가 그려져 있지 않아. 또 설사 있다 하더라도 진짜 인생에서 너무 화살표만 따라가지 마. 때로 화살표가 없는 길도 걸어봐야 해. 걸어가기만 하면 밥이 있고 집이 있는 것은 재미없잖아. 너무 사육당하는 것 같지 않겠어? 그러니 진짜 삶에선 너무 화살표만 찾지 마.
그것을 갖고 있어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어. 한번은 밤을 새우며 걸은 적이 있어.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일 거야. 걷다, 먹다, 자다 다시 걷는 반복된 생활이 자칫 또 하나의 매너리즘을 만드는 것 같아 그걸 한 번 흔들기로 한 거지. 인생이란 때로 흔들어줘야 제맛을 내거든. 가만히 놔두면 침전물이 생기는 생과일주스나 마찬가지지. 솔직히 나도 두렵고 무서웠지만 서둘지 않고 걸었어. 밤이긴 했지만 내가 지나는 길이 광활한 밀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고 있음을 알았지. 멀리 팜플로나의 주황빛 야경이 눈부셨지만 나는 그것을 뒤로 한 채 어두운 산길을 두려움 없이 올랐어. 드디어 새벽 미명에 790m 높이의 페르돈고개에 닿았지, 순례자들의 철 동상이 늘어서 있는 바로 그곳이었어. 나는 페르돈고개에서 침낭으로 몸을 감싼 채 한 시간 이상 동트기를 기다렸지. 그리고 동틀 무렵 사진을 찍었어. 그 순례자들의 철동상이 곧 내가 된 순간이었지. 그런데 이때 또 한가지 든 생각은 다름 아니라 페르돈 언덕을 포함해 그 일대의 산등성이엔 풍력발전을 위해 설치된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는데 그때 그 순간 나는 바람개비 도는 풍차를 향해 돌진했던 <라만차>의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지. 맞아. 적어도 당시 나는 돈키호테였지. 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어. "그래 미쳤다고 낯선 이국에서 밤을 새워 산을 올라?" 그리곤 또 이렇게 대꾸하듯 말했다. "그래, 미쳤지. 하지만 인생은 때로 미쳐야 해. 우린 너무 안 미치는 게 탈이야.
그래, 한 걸음 한 걸음이 내 인생이야. 나는 내 삶을 걸고 이 길을 걷고 있어. 나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사람은 지난 천 년 넘게 수천, 수만이겠지만 내가 걸으면 그 길은 곧 나의 길인 거지.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는 내 인생에서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언제 한번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한 번 자기 속이 왜 우는지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었던가. 또 왜 웃는지,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돌봐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 속에서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
** 직역하면 ‘좋은 길’이란 의미이고, 순례자들 사이에서 ‘부디 좋은 길을 가세요.’라는 인사말로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