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을 가리는 모습이 의외였다. 사회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90년대에 ‘나는 성인만화가 그리고 싶다’고 당당히 말했던 그가 첫 만남에서 서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쑥스러움을 잘 타는 그가 대중매체에 재기발랄한 필치에 자신의 철학을 담아낸 것은 만화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작가는 만화 <누들누드>, <천일야화>, <란의 공식>, 웹툰 <플루타크 영웅전>, <덴마>를 그리고 쓴 양영순이다. 양영순은 중학교 시절 해적판 일본 만화들을 보고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그는 만화아카데미에서 만난 선배들 덕에 <누들누드>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그런 그가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들어온 것은 필연이었나 보다. 미술을 배운 적 없던 그가 입시 2개월을 앞두고 지원할 수 있었던 곳은 국민대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학보사의 경험도 그가 만화가로 활동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 여수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만화작가 양영순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네이버에 <덴마>를 연재하면서 다른 외주작업들을 병행하고 있어요. 게임회사들의 홍보나 광고물에 사용하는 만화 작업물들이에요. 또 ‘주짓수(Jiu-Jitsu)’라는 브라질 유술도 열심히 배우고 있고요(웃음). 주짓수는 관절 꺾기, 조르기 같은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일종의 격투기인데 무척 재미있어요.
제가 17~18살 때였어요.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일본 해적판 만화들이 꽤 많이 들어왔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우주해적 코브라>라는 만화를 보고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만화가 문하생을 거쳐 만화작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크라잉 프리맨>을 보니까,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아야 하겠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대학진학을 결심하게 됐죠. 그 당시는 만화에서 ‘그림’이 우선시 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학교 근처 화실을 다니던 중이었는데, 강사가 홍익대학교 공업디자인과 학생이었어요. 제 얘길 듣더니 그 분이 시각디자인과를 추천해주시더라고요. 입시까지 딱 2개월 남은 상황이었죠. 그때 당시 실기시험을 ‘데생’ 하나만 보는 곳이 국민대학교뿐이었어요. 대부분은 구성이라고 해서 컬러링하고 화면 분할 시험도 같이 보거든요. 미술을 배운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준비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국민대는 저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죠.
원래는 <핫윈드>라는 성인 잡지로 시작을 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즐겨 보던 일본 해적판 만화들의 내용에는 폭력과 섹스가 난무했죠. 근데 그게 너무 통쾌하고 멋져서 ‘나도 이런 걸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의 만화를 실을 수 있는 지면을 찾다가 <핫윈드>를 알게 됐고요. <누들누드>라는 8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냈는데, 당시 편집장이 심술궂게 굴어서 원고료를 못 받았어요. 괴로워서 학보사 선배한테 이야길 했더니 한겨레 만화아카데미를 소개해주더라고요. 거기서 이두호, 이희재, 김형배, 오세영 선생님 같은 분들을 알게 됐고요. 선생님들이 제 사정을 듣고는 <미스터블루>라는 성인지가 곧 나오니 거길 가보라고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누들누드>를 다시 미스터 블루로 가져갔어요. 운이 좋았던 게 그 당시 일본 만화가 굉장히 많이 들어오던 때라 “후배를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어요. 운이 진짜 좋았죠. 생초짜인 신인한테 엄청난 기회를 주신 거잖아요.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누들누드>라는 제목은 아버지가 하시던 칼국수 가게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데, 칼국수를 먹는 느낌하고 성적인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착안에서 이름 지었어요.
너무 많은데, 일단은 <우주해적 코브라>가 저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도라에몽>이나, 아까 말했던 <크라잉 프리맨>도 좋아했고요. 일본에서 히트 친 만화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죠. 그 후로 좋아하는 만화가 더 다양해졌는데, 알고 보니 일본 만화의 폭이 굉장히 넓더라고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바닷가 근처에 살기는 했지만 회를 먹어 본 것도 20살 넘어서였고요. 친구들하고 놀던 기억은 있는데, 여수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지는 않아요. 고향이 여수라고 하면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게 있는데, 솔직히 그런 게 없어요(웃음). 물론 저도 모르게 작품 어디엔가 영향을 줬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시 여수에 왔으니까 여수에 살고 있는 만화가로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부담은 느껴요.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닌데, 작품의 배경이 됐든 정서가 됐든 여수를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한번쯤은 만들고 싶어요.
시작할 때만 해도 그림에 대한 집착이 많았어요. 그때는 그림에 비중이 컸지만, 인터넷 시대가 열린 뒤로는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해졌고요. 표현이라는 게 사실 무슨 내용인지만 잘 전달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니까 이제는 스토리 싸움이라고 봐야죠. 물론 만화는 글과 그림이 결합된 장르니까 이 요소들을 잘 조합해야 하고요. 요즘은 영화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작품들이 많은데, 제 개인적으로는 그냥 ‘만화 같은 만화’를 하고 싶어요. 뭐 아이디어나 스토리텔링은 생계 문제니까 쥐어 짜는 거고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은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요. 어떤 하이라이트가 떠오르면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훨씬 수월하고요.
제가 콩트 만화로 데뷔를 하다 보니 긴 호흡을 가진 만화에 대한 부담이 컸어요. 실제로 연재를 중단하는 경우도 몇 번 있었고요. 그래서 아시아만화대회 때 황미나 선생님을 찾아뵙고, 사석에서 장편만화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너 마지막 장면은 생각하니?”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두면 어떻게든 간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는 그 말을 이해를 못했는데 <천일야화>나 <덴마>를 연재하면서 ‘아,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깨닫게 됐죠.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쥐어짜는 거 밖엔 없어요. 누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쥐어짜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뭔가 나오면 엄청 기분이 좋아져요. 사실 그것 때문에 계속 하는 거죠. 콘티를 짤 때 구성이 한번에 딱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희열을 느껴요. 감정선과 구성이 적절하게 들어맞을 때요. 그 맛에 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내가 만화작가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화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혹성탈출?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도 원숭이라는 거죠. 얼마 전에 친구 녀석이 이민을 갔는데, 페이스북에 이민생활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올렸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도 그렇고 21세기라는 상황 자체가 뭔가 사람을 끝까지 몰아치는 느낌이 있잖아요. 친구는 본인이 탈출했다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에는 ‘정말 탈출에 성공한 거 맞아?’ 하는 거죠(웃음). 누구나 “나는 이런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곳이 싫어!”라고 말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원숭이인 거예요. 말하자면 <덴마>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요. <덴마>가 아니라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해요. 자기 작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최근에야 알았어요. 개인적으로 자존감이 높은 편이 아닌데, 자존감이 강한 작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늘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하다가 잘 안 되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지금 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으로는 이현세 선생님, 머리로는 허영만 선생님을 따라가려고 해요. 허영만 선생님 작품 중에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라는 만화가 있는데, 당신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허영만 선생님께서는 교수 제안을 굉장히 많이 받으시는 데, 늘 “나는 선생이 아니라 만화가다”라고 말씀하세요. 굉장히 멋지죠? 이현세 선생님은 워낙 따뜻하신 분이고 남자가 봐도 섹시한 남자에요. 이현세 선생님의 외형과 포스를 지니면서, 허영만 선생님처럼 살 수 있다면 최고라고 생각해요(웃음).
요즘은 스토리텔링 능력만 있으면 대중들하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예전에는 문하생 개념이 있어서 실력이 있어도 기회를 기다려야 했는데, 지금은 본인 능력만 되면 언제든지 대중들을 만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만화는 어떤 매체보다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죠. 앞으로는 경력과는 상관없이 스토리텔러로서 능력만 있으면 기회는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당시 아침에 학보사를 가면 운동장을 함께 뛰었는데, 구보하면서 ‘동심일체’라고 구령을 외쳤어요. ‘일심동체’ 아닌가요?(웃음) 한번 여쭤보고 싶어요. 학보사 세미나나 MT도 독특했어요. 저희는 MT 가서도 책을 읽고 토론을 했거든요. 술을 마시면서요. 그 당시는 왜 MT에 와서 책을 읽나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좋았던 거 같아요. 만화아카데미를 알게 된 것도 학보사 덕분이고, 국민대 학보사는 저한테 굉장히 고마운 경험이죠.
학보사에서는 주로 기사에 삽입되는 커트와 만화를 그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20대 초반에 독서량도 부족했던 남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뭐 있겠나 싶은데, 당시엔 그냥 막연하게 그렸던 거 같아요. 지금 보면 되게 부끄러울 것 같긴 한데 어쨌거나 그때는 즐겁게 지냈어요. 학보사 만화를 마감하고 연재했던 경험이 실제로 많이 도움이 되거든요. 대학에서 만화연재를 연습해 보는 건 너무 귀한 기회라고 생각해요.
유영우 교수님의 사진강의였는데, 저한테 굉장히 지적 자극을 줬던 수업이었어요. 윤호섭 교수님은 디자이너들이 가져야 할 시각적인 센스를 가르쳐주셨고, 김인철 교수님 수업은 아이디어 발상에 도움을 줬고요. 좋으신 분들은 너무 많았죠.
제가 경험이 많지 않아서 뭘 추천해준다는 게 참 부담되네요. 저는 주로 학교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어요. 도서관에서 역사 전집이나 고전, 혹은 프로이트나 융, 아들러의 저서들도 보고 굉장히 자극적인 에로소설도 즐겨봤고요. 그런데 문학전집을 많이 못 읽은 게 참 후회돼요. 글 쓰시는 분들이 가진 통찰력이나 사고의 깊이는 다 그런 데서 나오는 거 같더라고요. 만화가가 되고 싶다면 전집, 역사, 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으면 해요. 요즘은 워낙 다방면으로 다양한 표현을 하는 만화작가들이 많아서, 어떤 게 옳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책을 많이 보면 도움이 돼요. 결국 제 조언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라?
만화가뿐 아니라 모든 창작자들은 ‘고독을 견디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혼자 해야 하니까요. 물론 창작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혼자 있는 시간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저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고독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도 가끔 굉장히 힘들 때가 있거든요.
연애요. 연애를 많이 못해 본 게 그렇게 후회돼요. 사람이 연애를 해야 성숙해진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도 철이 없는 이유가 젊을 때 연애를 많이 못해봐서 그런 것 같아요. 굉장히 유치한 중년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웃음) 그래서 후배들은 연애를 많이 해봤으면 해요.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내가 성숙해지거든요.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멋진 방법은 그런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행도 많이 해봤으면 해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갇혀 지내는 편이라 이렇게 말할 자격은 없지만, 제가 대학생활에서 가장 아쉽게 느꼈던 점을 들자면 연애와 여행 두 가지입니다.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좋은 결정일지는 아무도 몰라요. 당장 내가 몇 푼 더 벌 수 있다고 그게 잘한 결정이 될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결정했는데 잘 풀리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됐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결정일 수도 없어요. 모든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거고 그것이 스스로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 선택에서 내가 무얼 얻어낼 것이냐’이죠. 손해를 봤다면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을 얻어 가면 그만한 공부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나 더 드리고 싶은 말은, 요즘 학생들은 저희 때와는 다르게 너무들 겁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공무원시험을 보기 위해서 많은 친구들이 노력하는 걸 보면 어떤 면에서 되게 짠해요. 그건 저희 세대 잘못이기도 해서 미안하죠. 저는 40대니까 저희가 이렇게 된 것은 60대 잘못인가요?(웃음) 제가 인생을 안 다면 얼마나 더 안다고 후배들에게 훈수를 두겠어요. 저는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요. 여전히 20대에나 할 것 같은 실수도 저지르고요. 혹시라도 지금 창피한 일을 했다면, 45살에도 상황은 비슷하니까 너무 쪼그라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행착오는 평생하게 돼요. 그 나이대에 하게 되는 실수가 있잖아요. 어느 나이도 미리 살아볼 수는 없는 거니까. 제가 60대가 되면 그 나이에 안 어울리는 잘못을 또 저지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실수했다고 너무 주눅들지 마세요.
양영순은 1995년 성인 만화잡지 ‘미스터블루’도 데뷔해 작품 <누들누드>로 제1회 신인만화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정크북>, <싸이케치>, <기동이>, <쿵다리맨>과 같은 엽기발랄한 만화들을 선보이며 명쾌한 양영순표 상상력을 과시했다. <천일야화>는 작가 양영순을 성인만화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대표작으로, 그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진면목을 알려주었다. 최근에는 고향 여수에서 웹툰 <덴마>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