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으로 제가 모두 나서서 챙겨야 하는 일들이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가장 많이 신경 쓰는 프로젝트는 역시 네팔 오지에 짓고 있는 휴먼스쿨이죠. 올해 4번째 학교가 안나푸르나 산자락 마을에 들어섰어요. 현재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학교의 착공식을 가지고 공사에 들어갔고 일곱 번째와 여덟번째 학교도 차근차근 진행 중에 있어요. 4군데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셈이죠. 또 평화대장정은 현재 닥친 가장 바쁜 일이에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되는 올해의 의미를 둔 프로젝트죠. 통일 전망대에서부터 임진각까지 155마일, 340km를 14박15일 동안 횡단하는 프로젝트인데 남녀 대학생들 155명을 선발해서 행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리울 때가 많아요. 그때는 산 하나만 가지고 몰입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제가 노력하고 집중만 하면 다른 생각을 할 게 없었는데. 속세에서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 많이 다르죠. 같은 형제지간이라도 생각이 틀린데 하물며 모르던 사람들을 대면하고 일하는 게 쉽진 않아요. 8000m 산에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더라고요.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산을 올랐지만 이 일 역시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하더군요. 물론 혼자 힘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죠. 재단 식구들과 십시일반 작은 정성과 마음을 보태주는 각계각층의 회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 협의를 해야 하고 일을 진척시켜 나가려면 스트레스가 꽤 커요. 그래도 어쨌든 히말라야가 제게 베풀어 준 은혜를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이 생각대로 안 되고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산을 오를 때 보다야 조금은 수월하죠.
제가 8,000m 16좌를 올라 간 것은 히말라야 신이 저를 받아줬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16좌를 모두 오른 후 그 보답으로 히말라야 오지에 16개 휴먼스쿨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이제 휴먼스쿨 프로젝트는 제 두 번째 삶의 목표가 됐어요. 여덟 번째 학교가 준비 중이니 이제 절반은 해 낸 셈이죠. 또 한편으로 휴먼재단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산과 자연을 체험하며 결여되어 있는 육체와 정신의 강인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자기성찰과 도전정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게 하는 거죠. 요즘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공동체 생활이 약하잖아요. 상대에 대한 배려, 동료의식은 앞으로의 사회에서도 꼭 필요하거든요. 그런 부분을 산을 통해, 자연을 통해 체험으로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죠.
제가 히말라야 등반을 처음 시작한 것이 1985년이었어요. 16좌 중 두 번째 도전한 곳이 에베레스트였는데 두 번의 실패 끝에 오를 수 있었죠. 당시 두 번째 등반 중에 사고가 나서 죽은 대원이 술딤이라는 세르파였어요. 산소 장비와 식량을 캠프로 가지고 올라오다가 실수로 로프를 놓쳐 추락했죠. 결국 시신도 못 찾았어요. 그 친구의 고향이 에베레스트 산자락의 팡보체라는 마을이었죠. 물론 다른 동료들도 늘 생각하면 괴롭지만 이후로도 계속 그 지역으로 등반을 가게 되면 항상 그 친구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유가족들을 만나고 위로하며 가족같이 지내게 됐어요. 결국 그 친구의 고향마을에 첫 번째 휴먼스쿨을 짓게 된 거죠.
첫 번째 학교를 지은 팡보체는 지구상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지역이었어요. 무려 해발 4,060m의 고도이니 쉽지 않았죠. 우리나라 학교처럼 시설이 복잡하지 않다고 하지만, 차 조차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라 벽돌과 나무 같은 자재들을 모두 경비행기와 헬리콥터로 수송해야 했어요. 다른 지역의 학교를 건립하는 것도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전혀 쉬운 게 없었죠. 20년이 넘는 세월을 히말라야 산자락을 맴돌며 아이들의 순수한 내면을 봐 왔어요. 그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죠. 살아남은 자로서 도리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렇죠. 교육시설을 지원해주고 나면 부족한 것이 항상 눈에 띄어요. 그 중에서도 의료지원 역시 가장 절실함을 느끼죠.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이나 시설도 없고 위생상태도 나빠요. 그래서 휴먼스쿨 준공식, 기공식을 할 때면 의료봉사팀을 함께 동행하곤 해요. 어떤 NGO 단체는 건물만 덜렁 지어주고 알아서 하라는 식인 경우도 있는데, 저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은 학교가 지어지고 난 다음이라고 생각해요. 네팔 현지인들은 아직 학교를 운영할 역량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체크를 하고 보수를 해주고 놀이터 시설을 확충시키는 등 세세한 부분의 지원을 이어가고 있어요. 학교 선생님들도 재단에서 고용을 해서 월급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이 학교가 설립된 이후에 더 필요한 지원 같아요.
의정부 원도봉산 중턱에 집이 있었어요. 산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니곤 했죠. 산은 집이자 놀이터였어요. 고교 졸업 후에는 설악산으로가 희운각 대피소에 머물며 2년간 2~3일에 한번씩 30kg이 넘는 물품을 지어 날라주는 일을 하기도 했죠. 그 때의 추억은 지금 떠올려도 생생해요. 그야 말로 산에 미쳐있었던 시절이라 할 정도로 설악산 골짜기, 능선이 모두 떠오르죠. 어찌 보면 당시 생활 덕분에 산악인으로서 16좌 완등을 이뤄 낸 체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도 생각해요.
네, 맞아요. 군 수중폭파대에 입대해 3년 동안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했죠. 돌이켜 보면 그 시간 모두가 제 도전의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산에 대한 꿈을 키웠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좀 더 높은 산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제가 생각해봐도 전 가만히 앉아서 편히 있는 것을 싫어해요. 몸을 내던지고 뚫고 헤쳐 나가는 것을 즐기고 좋아합니다. 아마도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기질이 DNA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렇죠. 처음에는 눈앞에 산봉우리를 오르는 게 목표였어요. 그렇게 하나 둘 오르게 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시간과 세월이 지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 8,000m 16개 봉우리, 내가 정복해 보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고생 끝에 결국 정상에 올랐던 매 순간이죠.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정상에 섰을 때 ‘산이 나를 받아주고 선택해줬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감사함과 고마움이 복받칩니다. 마치 산과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죠.
다섯 번 도전 끝에 정복한 안나푸르나에 네 번째 도전할 당시 7600m 지점에서 오른 발이 180도로 꺾이는 부상을 입었죠. 덜렁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2박3일 동안 4500m 지점의 캠프까지 기어 내려왔어요. 외줄 로프 하나를 잡고 잠 한 숨 못 잔 채 빙벽과 암벽, 설벽을 지나오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죠. 살아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생각됐어요. 그러나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저를 붙잡은 것은 목표에 대한 확신과 의지였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거죠. 그렇게 입은 부상으로 의사로부터 재기 불가능 판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때 부러진 발목과 무릎은 지금까지 장애가 남아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거든요. 그러나 저는 재활훈련에 돌입했고 1년여 만에 다시 안나푸르나에 도전해 정상에 오를 수 있었어요.
그렇죠. 가족들의 이해가 없었으면 힘들죠. 요즘에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안 하니까 조금은 안심하는 듯 해요. 그래도 계속적으로 외부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럼에도 바깥일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분이죠.
큰딸이 고등학교 1학년, 둘째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이에요. 지난해 초에도 네팔 히말라야 룸비니에 지은 세 번째 학교 준공식에 데려갔었어요. 아이들에게 오지 마을의 실상을 보게 했죠. 함께 트레킹도 하고요. 그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대자연을 느끼고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실패를 해서 사고가 났을 때 동료를 잃었을 때죠. 그 어떤 상황보다도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순간임에도 결국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목표에 대한 신념을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면 늘 ‘나는 할 수 있다. 해 내야 한다.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를 되뇄어요. 현재 처한 상황을 못 이겨 포기하거나 안주하려고 하면 꿈은 절대 이룰 수 없거든요. 국민대학교 학생들에게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절대 자신감을 잃지 말고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 좌우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승최강(自勝最强)과 심상사성(心想事成)이란 말이에요. 자승최강은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란 의미죠. 성공을 성취하는 것은 주변에서 누가 도와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 자기 자신을 이겨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심상사성은 한 가지 일을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면 분명 꿈은 이뤄진다는 말이죠. 그만큼 몰입하고 노력을 하라는 의미에요. 즉 ‘한 가지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또 그 꿈을 이루려면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국민대학교 학생 여러분들도 꼭 바라는 꿈을 이뤄내시기를 기원할게요.
[산악인 엄홍길]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상청엑스포, 대한적십자사 등 다양한 기관 홍보대상 역임
199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까지, 세계최초 8,000m 16좌 완등
2012년 내 가슴에 묻은 별, 2010년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 등 다수 서적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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