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라에서 ‘사회공헌활동을 강화하고 어려운 미술가들을 돕자’라는 취지로 오픈 갤러리를 만들면서 저에게 ‘명예관장’ 자리를 제안했어요. 사실 저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기업의 갤러리를 맡아야 해서 좀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어요. 뭔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갤러리를 열어 사회공헌을 한다는 발상은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역으로 제안을 했죠. 이왕 갤러리를 할 거면 코트라만이 할 수 있게 차별화를 두자고. 호칭도 명예관장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말 그대로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늘 깨어있으면서 뻔하지 않은 발상으로 일을 기획하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하면서 코트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코트라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죠. 그리고 코트라의 각 부서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되도록이면 다양한 분야의 실무자를 만나고 싶었어요. 각 부서사람들을 만나서 ‘코트라에 갤러리가 생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활용했으면 좋겠느냐?’ 등의 질문을 던졌어요. 그러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의견도 제시했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연간기획까지 짰어요. 코트라의 각 부서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발상의 뼈대가 완성되어 갔어요. 대부분의 예술은 예술가 혼자서 생각하고 작품활동을 하면 끝인데, 코트라 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는 전시, 콘텐츠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이 일에 더욱 매력을 느꼈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관공서 사람들하고 말이 통하냐고 물어요. 그런데 괜한 걱정이에요. 코트라 직원들은 업무 특성상 굉장히 글로벌 하거든요. 의외로 생각이 트여있고, 센스가 넘쳐요.
소통은 ‘남과 함께 하겠다’는 거죠. 그 바탕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하고요. ‘자 지금부터 소통해야지.’이렇게 마음먹고 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요. 어떻게 보면 소통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죠. 소통은 행위자체예요. 물론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야겠지만 상황이 안 좋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거거든요. 소통은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소통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설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일차적으로 서로의 입장이나 생각을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해요. 그래야 결론적으로 좋지 않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거든요. 그 순간은 좋지 않은 결과였다고 해도 2차적으로 다시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요.
1995년에 제가 처음 못사람을 만들었고, 2001년도에 대웅제약 빌딩의 조형물을 만들었죠.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니에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기업들과 예술주거환경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손바닥 안에 들어가던 작은 크기의 못사람이 거대하게 성장을 한 거죠. 그리고 제 작품이 서울까지 진출을 하면서 수년간 했던 작업이 모두 모여 하나의 전시장처럼 콤팩트있게 완성 된 거죠. 못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위트 있고 편해 보인다고 해요. 만만해 보여야 관심이 가거든요. 누군가를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소통의 키워드에요. 못사람은 제게 표현방식이에요. 나만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소통의 일환이죠.
나이고 싶어요. 남처럼 보이고 싶지 않죠. 외국생활을 많이 했어요. 결혼 후에도 외국인들하고 같이 어울려야 하는 환경이 많았고요. 그런데 우리 몸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드레스를 입으면 어색해요. 한국사람끼리는 괜찮지만 외국인들하고 섞여버리면 게임이 안돼요. 제 성격에 묻히는 것은 싫거든요. 서양인과는 선천적으로 다른 부분인데 굳이 콤플렉스로 갈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름은 신비함이 될 수도 있거든요. 저는 정통한복을 입는다기 보다는 변형을 많이 해요. 당의를 민소매로 연출해서 입는다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하죠. 복주머니를 청바지에 언발란스하게 달아 코디를 하죠. 언제나 한국적인 것을 꼭 매치해요. 지금까지 우리 것에 대해 우리가 자긍심이 부족했었잖아요. 매우 안타까운 부분인데, 저는 예술가라 비틀기를 시도했고 한국적인 것에 스토리를 담아 들려줬어요. 외국인들은 대단한 것도 아닌데, 흥미로워해요. 제 이야기를 경청하죠. 한복은 저만의 표현도구가 돼요.
연구를 많이 했어요. 스스로 다양한 방식으로 옷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다르면서 하나인 것이 제 컨셉이예요. 성격자체도 그래요. 변화도 좋지만 한젬마라는 고유성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요. 참 모순적이라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다 지퍼를 생각하게 됐어요. 지퍼 하나로 옷이 많이 바뀌어요. 지금 이 옷도 다 지퍼로 연결돼 있잖아요. 지퍼를 떼고 다른 옷과 연결하면 새로운 옷이 탄생하는 거죠. 출장을 갔을 때도 이런 식으로 옷을 입어요. 차분하게 보여야 할 때는 같은 톤으로 맞출 수도 있고, 조금 돋보이고 싶으면 소매부분에 핑크나 노랑으로 바꿔 달면 또 분위기가 달라져요.
주거환경프로젝트를 하면서 주거와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모델하우스를 하나 만들게 되면 한젬마 단지가 생겨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테이블, 의자, 가로등, 놀이터 등 이런 작업물이 창고에 쌓여요. 인테리어라고 할 것은 없고, 창고에 있는 작업물을 집으로 가져 온 거죠. 그러면서 어떤 부분은 이것들과 어울리게 제작을 하기도 했어요. 집을 꾸밀 때, 제 작품을 모티브로 벽, 바닥, 가구, 인테리어 소품들로 활용하니까 사람들은 제가 토탈샵을 가지고 있는 줄 알더라고요. 누군가가 집에 놀러 오면 못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사람들은 이야기에 집중하며 흥미를 가져요. 외국에서 손님이 왔을 때도 호텔보다는 우리 집에 묵게 해요. 손님을 위한 방이 따로 있는데 그곳은 모든 것이 못사람으로 꾸며져 있어요. 더 좋은 호텔, 숙박시설도 많지만 아티스트의 아트룸이라는 자체가 손님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것 같아요.
부족하다고 하면 끝이 없어요. 저는 어떤 일이든 합리화를 잘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데 선수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가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고난이나 역경이 닥쳤을 때, ‘이 고난에서 빠져나가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많이 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 이 고통을 통해서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요.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만해 질 수도 있거든요. ‘한번 더 수그리고 도전하는 계기로 삼자.’라는 생각도 할 수 있고요.
그런 질문 정말 많이 받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워킹의 기준이 잘못된 것 같아요. 일을 하지 않는 여자는 없어요. 직장을 다니든 집안일을 하든 종류만 다를 뿐인 거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복 받은 거죠. 그런데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을 하고 싶지만 육아나 가사 등의 문제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신조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요. 제가 이런 팔자를 타고난 거지 지금 제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된다거나 최고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면 나 자신이 못하는 부분을 정말 잘하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소통의 여지가 있는 거고. 내 여건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정말 오만한 거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은데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쉽지 않죠. 예술가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의 책임.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많이 받아요. 감사한 일이죠.
백남준 선생님은 6개 국어를 하셨대요. 그래서 누가 ‘6개국어를 하신다면서요? 대단하시네요.’라고 말했더니 ‘그러니까 하나도 제대로 못 하지.’라고 대답하셨대요. 그 말 듣고 한번 웃고 말았는데, 세상은 참 공평한 것 같아요. 차별화된 교육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면 생각을 열어주려고 노력해요.
백남준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울었던 적이 정말 많았어요. 정말 시대를 앞서 가시는 분이죠. 후배들한테 할 몫을 안주셨을 정도로 정말 다 하셨어요. 한국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분의 삶, 걸어온 길을 완전히 탐독하고 열망하던 시절이 있었죠. 전 예중, 예고를 나왔고, 대학교 때까지 미술만 하던 정통 미술파에요. 미술밖에 몰랐었죠.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미디어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다방면으로 일을 하면서 미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시킬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존경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참고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달라요. 사람마다 자기만의 고유성이 있는 거죠. 수십억의 인구 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없잖아요. 우리가 ‘무엇처럼, 누구처럼 살고 싶다.’라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것도 불행한 것 같아요. 개개인의 가능성과 창의성은 무시할 수 없어요. 자신의 몫을 찾아서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주어진 몫은 ‘미술봉사’라고 생각해요. 그런 작업들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사람들과 소통하는 예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이제 저는 순수예술을 하는 작가들과는 가는 길이 달라진 것 같고요. 저는 사람을 끌어 모으고 같이 일을 해 나가면서 다양한 시도의 예술로 판을 벌리고 싶어요.
우길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거든요. 예술가는 시대와 소통해야 하지만 유행으로부터 절제의 힘이 있어야 해요. 쓸려 다니거나 따라 하기 시작하면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려요. 흔히 예술가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예술가가 저래?’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주목할만해요. 예술은 당대에 평가하기 어렵잖아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지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어요. 기죽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내공을 쌓는 일이에요. 밀고 갈 수 있는 끈기, 인내, 자신감, 고집이 필요해요. 즉발적인 현상을 비웃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죠.
예술마을 조성사업, 지방 마을을 살리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미술로 봉사하는 제 꿈과도 같은 길이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미술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움직여요. 잘할 수 있거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들도 있어요. 하지만 일을 결정하는 우선순위는 의미 있는 일, 새로운 시도에 비중을 두고 있어요. 바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쳐요.
신경을 많이 써요. 운동도 꾸준히 하려고 하고, 음식도 조절하고. 언젠가 트레이너 숀리가 하는 말을 듣고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그가 그러더라고요. ‘작심삼일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삼일 마다 계획을 잡으세요.’ 전문가가 그렇게 대중의 입장에 서서 사람들을 끌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멋진 것 같아요. 저는 참 게으른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반성을 거듭하죠. 시간을 단축시키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프로답게 게을러 보이지 않기 위해 연구하고 고민 많이 해요.
운동을 정말 좋아했어요.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신경이 타고나서 달리기, 핸드볼 선수로 활동했거든요. 아마 부모님만 허락하셨다면 운동선수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당시만해도 김연아 같은 선수도 없었고 여자가 운동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미대 들어가서 너무 운동이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격, 테니스, 요트 등 서클활동을 무조건 운동으로 했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다 보니 체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너무 급급하게 스펙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도 부지런히, 열심히 살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빠르게 쟁취한 것은 분명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다지면서 천천히 간 것이랑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될까?’라는 생각으로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빨리 쟁취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실패나 좌절로 쓰러지기도 하면서 자기 길을 찾은 사람은 나중에 후회가 없어요. 너무 빨리 오른 사람은 처음에는 빛이 나고 멋있어 보일 수는 있으나 마음은 늘 불안해요.
[한젬마]
KOTRA 코트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동 ‘이야기가 있는 예술 마을’ 회생 프로젝트 디렉터
마을 미술 프로젝트-`새마을운동-새미술운동, 봉좌(鳳座)농경문화학교` 예술감독
아트젬마 (주) 대표
방송
TV 홈스토리 ‘한젬마의 라이벌 맛짱’ MC
저서
그림 엄마(평범한 엄마가 세계 인재를 만드는 창의력 레시피),
그 산을 넘고 싶다, 화가의 집을 찾아서,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국내 최초 그림 DJ 한젬마의 러브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