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과 기회도 오늘을 열심히 산 사람의 몫 ’
희망을 쏘아올린 코트의 승부사
2016년 봄, KEB 하나은행 여자농구팀 감독이 갑작스레 사임 하자, 코치였던 그는 ‘감독대행’으로 그 시즌을 마감해야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봄까지 약 6개월간 이어졌던 2016~2017 WKBL여자프로농구. 시즌 초반 KEB하나은행 여자농구팀은 팀 순위 2위에 오르는가하면, 막판에는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까지 펼치며 농구 전문가도 예상치 않던 반란을 제대로 일으켰다. 13승 22패로 최종 순위 꼴찌. 그러나 우승팀 우리은행을 제외하곤, 2위부터 6위까지 순위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여자프로농구계의 환경에서 결코 초라한 성적이 아니다. 커다란 희망을 쏘아 올렸기 때문일까. 결과보다는 과정을 눈여겨 본 구단에서도 그의 지도력과 리더십을 높이 인정, 최근에 감독대행에서 감독으로 전격 승격했다. 국민대학교 체육교육학과 91학번 출신, KEB하나은행 여자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환우 감독을 만나봤다.
예기치 못한 파란만장 코트 밖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음껏 뛰어 놀고 싶어 농구를 하게 됐다는 소년. 교통사고를 여러 번 당해 장기간 입원하는 일이 잦았던 소년의 부모는 몸 약한 아들이 늘 염려스럽고 걱정이었다. 한데 운동부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되레 반길 수밖에 없는 일. 그렇게 농구와 인연을 맺은 소년은 다부지고 탄탄한 몸으로, 야무지고 매서운 눈빛을 더해 코트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됐다.
“고인이 되신 국민대 최정길 감독님이 고교 때부터 저를 눈 여겨 보셨다 하더라고요. 그 인연으로 국민대에 1991년에 입학하게 되었고요. 당시 연세대에는 동갑인 이상민(현 남자농구 삼성 감독) 선수가 있었는데, 첫 대회였던 춘계대회에서 국민대가 준우승을 했고, 제가 신인상을 받게 됐어요. 쟁쟁한 스타플레이어들이 타 학교에 많았던 탓에 그 기쁨은 배가 됐던 것 같아요.”
한데 2학년에 접어들자, 학교 사정상 운동부를 단계적으로 해체하는 상황이 됐다. 그간의 기세와 열의도 이내 꺾이곤, 큰 혼란에 빠져 지내야 했다. 그러나 오래 가진 않았다. 청춘이 청춘답지 않을 때 가장 추하다는 생각. 미래가 불안하다고 지금의 상황만 탓하곤, 마냥 게으름을 피운다는 건 너무도 비겁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운동대로 하면서, 실업팀에 간택(?) 받지 못하면 장교로 군대 가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학점 관리를 해야 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공부와 담 쌓던 제가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니, 학교 덕을 제대로 본 셈이지요. 열심히 강의 듣고 치열하게 리포트 작성했던 몇 년의 시간은 후에 커다란 자양분이 됐죠.”
행운도 기회도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사람에게만 다가온다는 말처럼 그는 졸업 직전, 농구의 명가 현대전자에 러브콜을 받고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1997년엔 남자농구가 프로리그로 출범하면서 프로선수 생활도 경험하게 됐다. 한데 프로선수로 활약한 선수는 당시규정으로 상무(국군체육부대)농구단 입단에서 제외되자, 일반병으로 입대해야 했다. 대학원 진학으로 입대를 연기했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20대 중반에 입대하고 2년 후 제대한 후, 선수 복귀가 쉽지 않았어요. 농구공 대신 행정병 일을 봤으니까요. 가장 먼저 체력이 안 붙더라고요. 팀에서도 안타까운지, 얼마간 지켜보다가 매니저 일을 권유하더군요. 그렇게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은퇴해야 했고, 인생의 전환점도 빨리 맞게 된 것입니다.”
입대 후 행정병으로 복무했던 경험은 이후 KCC 프로농구단의 매니저 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게다가 훈련 분석 등 매니저 업무 그 이상을 찾아 하는 것을 눈여겨 본, 유도훈 코치(현재 전자랜드 감독)가 그를 코치의 길로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차선의 선택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환우 감독은 여자농구에 첫 발을 들여놨다가, 순식간에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치러야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였다. 게다가 팀의 주축선수였던 김정은과 신지현, 김이슬 등이 부상을 입어 아예 베스트 멤버에서 제외시켜야 했을 때는 막막함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농구는 혼자만의 운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축 선수들의 부상은 팀 전력에 큰 차질을 주었지만, 대신 다른 선수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년간 준비해온 그 선수들을 믿고, 잘 이끌어간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지요.”
여자농구를 처음 이끄는 입장에서 조심스럽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막 입단한 유망 선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의 파격적인 선수기용은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매 경기마다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기우가 되어갔다. 우승팀 우리은행을 비롯하여, 모든 팀과의 경기에서 시소게임을 이어갔고, 상대들이 꺼려하는 팀이 되어갔다.
“이제는 감독으로 다시 기회를 준 구단과 부족한 저를 잘 따라주는 선수들, 그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 제대로 실력을 보여줘야죠. 다가오는 시즌을 어떻게 맞이할지 스태프들과 잘 준비해왔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했고, 그 결과들을 하나씩 실행중입니다.”
시즌 후 약 한 달 간 휴식을 취했던 KEB 하나은행은 지난 4월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신체 안정성과 가동성을 높이기 위한 적응 기간을 3~4주 가졌고, 지금은 개인 기술을 높이고 힘을 붙이는 스킬 트레이닝을 진행하고 있다. 부분 전술, 팀 전술을 진행한 뒤 6월 말 부터는 실전 연습 경기를 할 예정이다. 8월 21일부터는 박신자 컵 대회를 통해 중간 점검을 하게 된다. 바쁜 일정을 즐겁게 해 나가고 있는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운동만 한 선수들의 경우, 행정 업무를 맡기면 거의 어려워합니다만 저는 그간의 경험 때문인지 몸에 꼭 맞더라고요(웃음). 지금도 선수 지도 못지않게 잘하는 것이 경기 분석이니까요.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원치 않든 원하든, 지금의 경험은 훗날 그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구나 싶더라고요. 예기치 못한 다양한 상황에서, 포기할 수 없다면 집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요. 후배 여러분, 때로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 훗날 최고의 자리로 올라설 수 있는 또 다른 방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험을 절대로 허투루 보내지 마세요. 여러분이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건 상상하지 못한 가능성입니다. 때로는 힘들더라도 긍정의 마음으로 지금을 누리십시오. 행복의 힘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Epilogue, 언제나 뛰는 가슴
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몇 년간 코치직을 경험했던 그는 KEB 하나은행 여자농구단에 오기 전, 은퇴한 운동선수들의 제2의 인생인 진로 개척을 위한 비영리사단법인, KPE4LIFE(Korea Physical Education 4(For) LIFE·삶을 위한 체육교육)를 운영해왔다.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인 아내 권은정 씨는 KPE4LIFE의 회장이자 든든한 동반자. 엘리트 선수들도 은퇴 이후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나면 인생 자체가 막막할 수밖에 없는 일. 운동선수들의 은퇴 후 삶을 서포트하는 그의 프로젝트들은 지난 ‘2015년 수원시 사회적경제 창업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최근 몇몇 스포츠 스타들이 방송 등에서 두각을 보이긴 하지만, 이 또한 극히 일부. 그는 후배 선수들과 코트 밖 인생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는 넉넉한 사람이고 싶어 했다.
Special Photo Gallery
성장이 일찍 멈춘 탓에 184cm의 키로 학창시설엔 센터가 포지션. 이후 고교를 거쳐 대학에서는 포인트 가드였던 이환우 감독은 김완수, 정진경 코치와 여러 트레이너들의 도움으로 활기찬(?) 농구를 선보일 태세이다.
최근 팀 워크숍 때 한 고참 선수는 ‘식구(食口)’라는 표현을 했다. 진짜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 함께 땀을 흘리고 정을 나누는 이들의 다음 시즌이 정말 기대된다.
팀의 터줏대감 김정은 선수가 우리은행으로 이적했지만 KEB 하나은행 여자농구단에는 국가대표 강이슬, 든든한 고참 염윤아, 여고 농구 한 게임 최다 득점 61점의 주인공 신지현 등이 있다. 그리고 지난 시즌, 입단과 함께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른 김지영도 있다. 올해 깜짝 등장할 선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