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태 디자이너의 업무 지역은 국경을 넘나든다. 월초에는 영국 탠저린 본사에서 업무를 보고,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대학교 강의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세계적인 회사들의 디자인 컨설팅을 담당해 온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영국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디자인이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항공은 탠저린의 혁신적인 디자인인 S자형의 비즈니스석을 도입한 후 지금까지 10조원이 넘는 영업 이익을 거둬드리고 있다. 이후 2006년 영국항공은 음양의 원리를 응용한 이돈태 디자이너의 S자형 좌석을 도입함으로써 혁신을 거듭했다.
이렇듯 놀라운 성과를 거둔 그이지만 시작은 보통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느 사람들보다 더한 시련과 좌절을 경험한 쪽에 가깝다. 196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슬하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큰 슬픔을 겪었다. 그 후에도 꿈을 향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지만, 좌절은 계속됐다. 대학 입시에서 세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던 것.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도 ‘남들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열등감을 긍정적인 자기계발로 이어갔고, 결국 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러나 영국에서 역시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커리큘럼 진행 방식도 완전히 달랐고, 수년간 준비했던 영어도 막상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긍정의 에너지를 활용했고, 인턴으로 탠저린에 입사해 7년 만에 공동 대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놀라운 성취를 보여줬다. 이제까지 그는 2008년 대한민국 굿 디자인대상 대통령상을 비롯해 독일의 레드닷, IF디자인 어워드, 영국의 IDEA 그랑프리상, 미국 굿 디자인 어워드 수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특별한 시간관리법은 없어요(웃음).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죠. 일하는 지역이 넓고 시차도 있어서 업무환경이 좀 특수하거든요. 본사가 영국에 있고 중국에서는 세미나를 종종 개최하고 있어요. 프로젝트에 따라 다르지만 기간을 나눠 영국과 한국, 그밖에 나라를 돌아다니죠. 보통은 온라인 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에는 주로 한국에 많이 머물고 있어요. 모교 강의도 맡고 있고 각 대학에서 진행하는 세미나가 있기 때문이죠. 요즘 많이 다루는 주제는 창의성과 디자인에 관련된 내용인데, 이를테면 ‘창조산업’에 대한 것이에요. 창조산업은 영국에서 발전한 산업 분야거든요. 제가 영국 법인의 회사를 다니다 보니, 그런 사례를 많이 제시하는 편이죠.
학생들의 실력은 예전 보다 훨씬 좋아요. 제 경우는 수업도 종종 빼먹고 꾀도 많이 부렸는데(웃음), 이제는 다들 열심히 해요. 하지만 디자인 업계의 일자리가 포화상태다 보니 열심히 하지만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그래도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은 제게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곤 하죠. 요즘 학생들은 자기가 갈 길을 미리 계획하는 것 같아요.
저의 주력은 아무래도 에이비에이션(aviation, 항공) 비즈니스인데, 항공기를 비롯해 자동차 등의 인테리어를 개발하는 분야죠. 탠저린이 주력하는 것이 그런 대형 장비들이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작은 프라이팬 같이 소비재를 디자인하는 거예요. 또 시스템 디자인도 꼽을 수 있죠. 예를 들어 교통 순환프로그램을 디자인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시스템 디자인에 들어가요. 보통 대중들이 떠올리는 디자인의 영역에서 좀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는 편이죠. 요즘은 기존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분야도 디자인의 영역에 포함되는 추세에요.
그때는 고입학력고사가 있던 시기라 공부만 했었죠. 잘 하는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교를 많이 당하며 좌절감을 느끼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중학교 때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분야를 하고 살았어요. 원래 관심이 있던 분야는 유리공예와 순수예술 쪽이었는데, 재수, 삼수를 하면서 디자인으로 방향을 돌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큰 반대는 없으셨어요. 그러니 삼수까지 할 수 있었죠(웃음).
특별하게 어느 학교를 가겠다는 목표는 없었어요. 학교에 대한 애착이 없었던 편이죠. 다만 디자인은 하면 할수록 열정이 생겨났어요.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총원 60명 중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해서 온 학생은 고작 6명뿐이더군요. 그래서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웃음). 대학 시절에는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과대표도 하고 학생회장도 맡으며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죄다 쫓아다녔죠. 내일 당장 과제 발표를 앞두고 있어도 MT에 갈 정도였어요.
당시 삼성그룹에서 주관하는 디자인 멤버십 프로그램에 지망해 1기 멤버가 된 것이 떠오르네요. 지금 삼성 디자인 멤버십은 20기를 배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 면접에서 점수가 상당히 안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참여할 수 있었어요. 심사에 참여한 교수님께서 ‘저 친구는 걱정 안하고 뽑아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또 2학년 때는 원하는 꿈을 꿀 수 있게 음파를 이용한 시스템을 디자인했어요. 당시에는 좀 엉뚱했는데, 실력은 보잘것없었지만, 발상이 좀 특이했던 것 같아요.
사실 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다신 대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생활비와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해야 했거든요. 아르바이트로 강남에서 유명한 입시학원 강사도 했었죠. 등록금 마련도 해야 했지만, 나름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로망도 있었어요.
제 생각에 지금 대학교 2학년은 제가 공부하던 시절 4학년과 비슷한 거 같아요. 위 세대에서부터 워낙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있고, 또 학생들 스스로도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빠르거든요. 제가 공부하던 시절은 그런 것이 많이 부족했어요. 대신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죠. 공부도 디자인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전공에 관심을 가졌어요. 시 쓰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내기도 했어요. 지금 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외도를 한 셈이죠.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을 시절의 대학생활이죠. 제 나름 대로는 그런 경험을 디자인에 녹여보려 노력했어요. 디자인에 있어 인문학은 상당히 중요한 근간이거든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책 읽을 시간도 없어 보이니 그게 좀 아쉬워요. 직, 간접적인 경험이 적은 것도 걱정 되고요
유학은 1학년 때부터 막연히 계획했어요. 그때는 대부분 디자인과 학생들이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곤 했는데, 전 생각이 달랐죠. 당시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유학 준비를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요즘 학생들 기준으로는 대부분 영어를 잘하니, 준비랄 것도 없었던 거죠. 굳이 어떤 이유를 말하자면, ‘차별화를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너무 평범했어요. 그저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한 것뿐이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제가 주변 친구들 보다 잘하는 것을 떠올릴 수 없더군요. 영국 유학은 그런 제가 차별화 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시도였어요. 대학원 기간 2년 동안 돈을 모아 졸업 후에 바로 떠났죠.
아내의 걱정이 좀 컸어요. 제가 결혼을 좀 일찍 했어요. 대학교 4학년 졸업하는 날 약혼을 하고 결혼했으니까요. 결혼을 하고 나서 유학은 사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죠. 하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아내를 만나 그때부터 유학 계획을 강조했고 같이 공부를 했던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유학을 가서도 제가 먼저 공부하고 취업한 뒤 아내 역시 공부를 했죠. 아내도 지금 서울 탠저린 지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시 영국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많지 않았어요. 제가 도착하고 한 2년 지난 후부터 조금씩 들어오더군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공부는 산업디자인이었는데, 얼마 후 제품디자인으로 방향을 바꿨죠. 물론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1989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던 것이 적잖게 도움이 됐어요. 제가 나름 배낭여행 1세대거든요. 당시에는 여행 정보가 없어 일본에서 출간된 여행책의 번역본 같은 것을 정보 삼아 여행을 갔죠. 그때 둘러본 유럽은 제게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래서 그때 더욱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문제가 있었죠. 제가 잘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해갔던 컴퓨터 스킬 이라든지 스케치 기법이 현지 학생들에게는 우스워 보이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때는 한국 사람들이 발상은 뒤떨어지지만 기술은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런 스킬이 필요 없던 커리큘럼이었어요. 디자인이라고 해서 우리처럼 열심히 그리는 것보다는 인문학적 교육을 강조하는 방식이었어요. 토론하고 발표하고 말하는 과정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내는 결과물은 한국의 학생보다 훨씬 좋은 것을 내놓았어요.
당시 영국 친구들은 한국 교육이 영국보다 10년 이상 후진적이라는 말을 했죠. 물론 요즘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벽에 부딪혔을 때 같이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들과 대처한 방법은 끈기였어요. 과정은 어떨지 몰라도 끝에는 좋은 결과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영국 학생들 보다 더 오래 고민하고 더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극복했죠.
유학 초기에 모든 자신감을 다 내려놓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발상을 하게 해줬어요. 저는 동양문화에서 태어나 영국을 경험하는 중이고, 영국 학생들은 태어나 계속 그곳에서만 살아왔으니까 제게는 그런 차이가 경쟁력이 됐죠.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아우르는 발상을 할 수 있었거든요. 한마디로 유학시절은 동양문화의 익숙함을 가지고 서양문화를 새롭게 경험하며 지냈던 시간들이었죠. 그러면서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보통 유럽 사람들은 2~3년 사이에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기 몸값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일단은 제가 잘 적응을 할 수 있었고, 다른 곳과 달리 아시아에 대한 존중이 있었어요. 보통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를 무시하거든요. 그에 반해 제 파트너는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 다른 곳에서 이런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최소한 유럽에서 회사를 다니면 이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시작부터 목표가 달랐던 거죠. 대학교 1학년 때 유학을 목표로 한 것처럼, 탠저린에서도 처음부터 최고경영자 자리를 목표로 한 셈이에요.
수준급이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라요. 사진은 어렸을 때부터 쭉 좋아했어요. 대학교에 입학해 사진동아리에 들었죠. 제가 01학번 인데, 그때만 해도 디지털카메라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거든요. 그 시절 수동카메라 흑백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선배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암실에서 인화작업을 하면서 사진이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에게 사진은 순간순간이 책의 한 페이지 같은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저는 기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요. 파인더 안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대로 담아요. 그래서 나중에 사진을 뽑아놓고 보면 ‘여긴 어디고, 이때는 이런 감정 이었지.’ 정도의 기억을 남기는 거죠.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대부분 성공적이었어요.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웨지우드’라는 영국 도자기 회사 디자인 혁신 프로그램이었는데, 매우 잘 돼서 지금도 그곳의 제품을 디자인하고 있죠. 처음에는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받으면 무작정 그리기 시작하는데, 영국에서는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서 추구하는 방향을 언어로 결정하고 다시 키워드로 정리해요. 그런 식으로 좁혀 나가 결국은 거기에 맞는 스케치를 해서 논리가 상당히 탄탄하죠. 그런 것들을 배우고, 또 제가 갖고 있는 한국인 특유의 끈기에 영국의 인문학적 논리를 접목하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유럽 고객사들이 제 차별성을 채택한 부분도 있고요. 물론 차별화와 선택은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어요. 기업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본질에 얼마나 집중해 주느냐를 중시하니까요. 차별화와 본질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죠.
저는 ‘디자인 공리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를 비롯해 디자인 산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 마케터, 홍보, 제조, 투자자 등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배분되게끔 하는 것이 ‘디자인 공리주의’에요. 30대 시절에는 제 디자인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이걸 통해 나만의 스타일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달라졌죠.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디자인 공리주의’가 제 철학이에요. 아마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듯 해요(웃음).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 스스로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으로 냉철한 성찰을 하면 부족한 부분을 찾고 노력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거죠. 저의 경우 어려움을 극복한 힘의 근원은 열등감이었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왔으니 사투리 심했고, 남루한 차림에 여러 가지 모자람이 많았죠. 그 열등감은 일종의 자기 성찰로 이어졌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방향이 잡혔거든요. 그래서 다른 친구에 비해 목표를 높게 정하고 강수를 두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목표로 하는 수준에 올랐을 때는 다시 그 위를 보게 됐죠. 자신감 있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 경우 더더욱 냉정한 자기성찰이 필요하죠.
우리나라를 꼭 한번 한 바퀴 돌아보세요. 여행하면 많은 분들이 해외를 동경하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얼마나 숨 막히게 멋진 곳들이 있는지 일단 먼저 알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뜨거운 연애를 꼭 해보세요. 진부한 말 같지만 대학 때만큼 자유롭게, 또 자신의(혹은 상대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연애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미쳐보세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질릴 때까지 미쳐본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 장담해요. 세상에 무의미한 시간은 없고, 필요하지 않은 경험은 없거든요.
요즘 학생들은 영어는 대체로 준비돼 있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문화적인 이해도 빠르고요. 제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유학과 해외 취업에 있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거예요. 제가 영국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탠저린의 창립자인 파트너를 만났기 때문이죠. 나이가 저보다 9살이나 많지만 그 덕분에 영국을 이해할 수 있었고,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었어요. 유럽에서 많은 외국 디자이너들이 스튜디오를 냈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홀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경우에요. 좋은 파트너를 만나려면 항상 주변이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해요. 물론 어떤 분야인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 이 기사를 읽는 학생들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다고 해도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갖고 있는 상대적인 우월감은 변치 않을 거에요. 그런 것은 야단쳐서 될게 아니거든요. 문화의 수준은 우리도 유구하다고 하지만, 주도권은 그들이 쥐고 있으니까요. 파트너는 그 주도권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라 할 수 있죠.
[이돈태]
1998 영국 탠저린 입사 현 공동대표
현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전 삼성물산 고문
2009 한국최고경영자회의 창조경영부문 대상
2003 영국 D&AD 디자인상
저서
포어사이트 크리에이터, 하이트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