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작가를 만난 것은 어느 평일 저녁, 훤칠한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겸손한 이 남자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반갑다는 인사를 하며 의자에 앉았다. 책에 사인을 해 달라는 말에 자신의 필체가 악필이니 놀라지 말라고 말하며 책 표지 바로 뒷장에 섬세하게 편지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행 동안 어머니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꼭 한 번 여행을 떠나보세요라는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어머니와 세계일주를 하기 전에는 영화제작사에서 스텝으로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한 인터넷 여행 매거진에 몸을 담고 있어요.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라, 현재 전국을 돌며 숨겨진 여행지와 문화재를 기록하고 취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은 아니었어요.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위해 누나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환갑잔치가 아닌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해 드리자는 결론을 내게 됐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여행이었죠. 밋밋한 패키지여행 보다는 자유여행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60세를 맞이한 어머니에게 정말 의미 있는 선물을 드리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아무리 자유여행이라지만 누군가는 어머니 여행가이드가 되어드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행가이드가 되어드리기로 했고,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고 떠날 계획을 세웠어요.
제 결심은 확고했어요. 어떻게든 어머니를 설득시켜서 또 다른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하리라 마음먹었죠. 어머니는 그때까지 국내여행도 제대로 해 본적 없었던 분이었어요. 한 평생 일만 하셨거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작은 식당에서 일을 했어요. 하루 종일 어머니 곁에 붙어 있으면서 세계여행에 대해 이야기했죠. 처음에는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의 긴 설득에 결국 못이기는 척 받아주셨어요. 누구나 떠나고 싶은 욕망은 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고 싶었던 일들을 포기하고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게 되거든요. 그런 마음을 알기에 끝까지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어머니와 저는 친구 같은 사이였어요.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를 찾았어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도 어머니와 대화하며 조금씩 해결책을 찾아나갔어요. 지나침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항상 자유로움을 허락해주셨고, 모든 일에서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죠. 학창시절에는 공부보다는 인성을 키워주려고 하셨어요. 저를 복지단체에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즐거움을 가르쳐주셨어요. 함께 많은 시간을 공유했기에 어머니와 소통하는 것이 다른 아들보다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대학생 때 서울에서 자취를 했는데, 어머니가 아들 집에 올라오셨다가 내려가시면서 지하철을 타는데 어느 방향인지 헷갈려 하시더라고요. 그때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챙겨 드려야 할 때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번 여행에서도 초반에는 제가 어머니의 여행 가이드를 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 여행이 지속되면서 전세역전이 되더라고요. 어머니가 어느새 낯선 사람, 낯선 거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고 계셨어요. 그 이후로는 어머니가 도리어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여행 중에 정말 한국요리가 그립잖아요. 채소를 구해서 볶음밥 같은 한국 음식을 해 주셨는데, 정말 좋았어요. 어머니랑 여행하니 이런 장점이 있구나.싶었죠. 결국 아들은 어머니를 따라가야 되나 싶었어요(웃음).
이번 여행은 럭셔리한 여행이 아니라 리얼한 배낭여행이다. 저렴한 숙소에 머물고 현지음식을 먹고 낮은 등급의 교통편을 이용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여행 계획을 짤 때부터 어머니께 설명을 드렸거든요. 정말 아낄 수 있을 만큼 아꼈어요. 하지만 어머니 걱정도 있었죠. 그런데 어느 정도 어머니께서 적응하신 뒤로는 오히려 저보다 더 독하게 아끼시더라고요. 한 푼이라도 아끼면 하루라도 더 여행할 수 있다며 허리띠를 졸라매셨어요. 돈이 다 떨어졌을 땐, 누나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을 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어요. 늘 여행 준비에 바빴고, 다음 날 일정을 짜는 것도 버거웠거든요.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블로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처럼 그날의 여정을 기록했어요. 네티즌들 사이에 엄마와 아들의 여행이라는 콘셉트가 워낙 독특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여행 중에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이 늘어나서였을까요? 나도 모르는 새 블로그 방문자들이 급속도로 늘었어요. 그러다가 여행 중반쯤 첫 출판 제의가 왔어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정말 기뻤지만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힘들 때라 정중히 거절했죠. 그러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서너 군데의 출판사에서 다시 출판 제의를 받았어요. 블로그 이웃 분들도 언제 책이 나오는 거냐며 농을 하셨죠. 이쯤 되자 정말 책을 낼 수도 있겠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저도 모르게 원고를 쓰고 있었죠.
야간열차를 타고 쿤밍에 도착했을 때, 정말 심신이 지쳐있었어요. 중국인들은 아침체조처럼 태극권을 즐겨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시민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갑자기 배낭을 벗어던지시더니 쿤밍 시민들과 합류해 태극권을 하시는 거예요. 게다가 어머니는 어떤 여행지에서든 외국인들과 어울려 그 나라의 민속춤을 추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어요. 한국에서는 정말 내성적인 분이셨거든요. 아마 그때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분 같았어요. 내가 아들하고 배낭여행을 왔는데, 무섭고 두려울 것이 무엇이고 눈치 볼 일은 또 뭔가.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그 동안 어머니는 분출할 곳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기대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비록 어머니 인생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이렇게라도 해 드린 것이 너무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터키가 가장 좋았어요. 터키는 여행자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곳이에요. 정말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죠. 숨 막히게 멋진 대자연, 아찔할 정도로 화려한 도시, 모든 아픔을 씻어 줄 것만 같은 소박한 시골마을, 로마의 고대유적은 물론, 기암괴석과 석회층이 춤을 추는 자연의 신비로움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게 없는 나라입니다. 그 중 한 도시를 꼽으라면 카파도키아 지역을 꼽고 싶습니다. 수백 차례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역 전체에 믿기 힘든 풍경이 펼쳐지는 곳인데 기암괴석이 지천에 널려 있고 거대한 협곡과 동굴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납니다. 새벽녘에 동시에 떠오르는 수백 개의 열기구 또한 장관이죠.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라고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무료 숙박이나 현지 가이드의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어요. 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해 봐야 될 만한 정말 즐거운 경험이죠. 어머니와의 여행에서도 카우치서핑을 이용했는데, 그때 어머니가 자신 있게 해 주신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약 40곳의 집에서 비빔밥을 만드셨어요. 맛도 맛이지만 외국 친구들과 함께 비빔밥을 먹으면서 조금이나마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다들 비빔밥을 너무 좋아해서 레시피까지 적어가더라고요.
기회가 닿는다면 또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아니면 누가 엄마를 커버할 수 있겠어요. 아마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절대 이번처럼 오래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웃음).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 씨를 보면 제 심정에 공감이 가실 거예요.
자신감 넘치는 즐거운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일에선 완전히 은퇴하셔서 결혼 후 처음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계시고요.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친구 분들도 많이 만나시고 집에선 주로 책을 읽으시거나 라디오를 들으시고 있어요. 매주 봉사활동을 다니시기도 하고요.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고 계시기도 합니다.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는 10월 발간예정이에요. 첫 번째 책이 아시아 여행이었다면 두 번째 책은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거든요. 유럽 편은 아시아 편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특히 유럽여행은 여행자 커뮤니티인 카우치서핑을 병행하며 여행하였기에 더 많은 사람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따라서 어머니와 저만의 에피소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여행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또한 마주하는 문화와 풍경이 아시아와는 또 다르기 때문에 첫 번째 책과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네요.
수준급이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라요. 사진은 어렸을 때부터 쭉 좋아했어요. 대학교에 입학해 사진동아리에 들었죠. 제가 01학번 인데, 그때만 해도 디지털카메라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거든요. 그 시절 수동카메라 흑백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선배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암실에서 인화작업을 하면서 사진이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에게 사진은 순간순간이 책의 한 페이지 같은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저는 기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요. 파인더 안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대로 담아요. 그래서 나중에 사진을 뽑아놓고 보면 여긴 어디고, 이때는 이런 감정 이었지. 정도의 기억을 남기는 거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때 다니던 영어 학원 선생님의 본래 집이 미국 시애틀이었는데, 이곳에 누나와 저를 아무 거리낌 없이 보내셨어요. 처음에는 그냥 비행기만 타면 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웬걸, 포틀랜드에서 환승을 해야 되더라고요. 누나와 저는 비행기에서 내려서 드디어 시애틀이구나.라고 소리쳤어요. 그런데 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정말 짧은 영어로 백(bag), 백(bag)했더니 표를 요구하더라고요. 표를 보여줬더니 직원이 환승해야 한다고 뛰라고 하더라고요. 50일 정도 거기서 생활했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다른 거예요. 그때 결심했어요. 내가 여행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무조건 떠나야 겠다고. 그때부터는 계속 여행갈 궁리만 했어요. 대학교에 입학해 방학 때마다 여행을 갔어요. 아르바이틀 해서 번 돈으로 무조건 여행을 떠났죠. 국내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우리나라도 거의 다 밟아봤어요. 여행이란 것을 한정지으면 안돼요. 집 앞에 한강공원을 걸어도 그 순간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를 쓰신 박민우 작가님 좋아해요.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를 읽고 나서 그분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좋아서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어느 날, 좋은 기회로 박민우 작가님의 작가와의 대화에 가게 됐어요. 저 빼고 다 여자분들 이더라고요. 솔직히 남자들은 잘 안가잖아요. 본의 아니게 청일점이 돼서 박민우 작가님께서 많이 챙겨주셨어요. 질문도 많이 하시고. 그때부터 서로 알게 됐고, 가끔 서울에서나 여행지에서 만나기도 해요.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김향미, 양학용 부부의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에요. 결국 여행이라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거든요. 정말 감명 깊게 읽었어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여행 책이랄까.
우리나라를 꼭 한번 한 바퀴 돌아보세요. 여행하면 많은 분들이 해외를 동경하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얼마나 숨 막히게 멋진 곳들이 있는지 일단 먼저 알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뜨거운 연애를 꼭 해보세요. 진부한 말 같지만 대학 때만큼 자유롭게, 또 자신의(혹은 상대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연애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미쳐보세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질릴 때까지 미쳐본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 장담해요. 세상에 무의미한 시간은 없고, 필요하지 않은 경험은 없거든요.
여행을 할 때는 짧은 순간조차도 무언가를 하고, 얻기 위해서 노력하잖아요. 일상에서 무의미하게 보냈던 시간들과는 달리 안정적인 것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쉴 틈 없이 움직이게 되죠. 이를테면 식사 메뉴나 숙소를 정해야하고, 다음날 갈 곳의 동선도 미리 생각해야 하는 일들요. 그렇게 매순간순간 열심히 무언가를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고, 나태해지지 않고 최선을 다 하게 되는 것이 여행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꼭 갖춰야 할 것은 돈, 시간, 용기예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용기라고 생각해요. 돈은 빌리면 되고, 시간은 내면 되요. 하지만 용기는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어요. 누구나 떠나고 싶고 마음속에 억눌린 것들을 풀어놓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현실에 억눌려 꿈만 꾸는 거죠. 용기를 내세요. 일단 다녀오면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자신을 속박하지 말고 더 자유로워지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단, 자유로워지시되 나태해지지는 않아야겠죠?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았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해요. 내안에 숨어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보면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태원준]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