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김소향 씨가 처음 데뷔를 한 것은 2001년 뮤지컬 ‘가스펠’을 통해서다. 대학교 3학년 무렵, 꽤 이른 나이에 찾아온 기회였기에 최선을 다했고 그 이후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무대 위에서 보냈다. 벌써 14년 차 뮤지컬 배우로 ‘페임’, ‘명성황후’, ‘사랑은 비를 타고’, ‘맘마미아’, ‘아이다’,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 ‘에비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작에서 자신만의 연기를 선보여 온 그녀. 그녀의 성공 비결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무대 위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고민, 사람과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지난 2010년, 그녀의 남다른 도전 의지는 10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막연한 미국 행을 택하게 했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시카고에서 공연되는 ‘브로드웨이 시리즈’ 중 ‘미스 사이공’ ‘지지’ 역을 따내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이는 미국에서의 활동 이력이 전무한, 한국 기성 뮤지컬 배우로서 본토의 메이저 무대로 직행한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그녀를 전격 캐스팅한 세계적 연출가 짐 코르티는 “놀라운 실력과 열정, 감정적인 표현이 풍부한 김소향이야 말로 ‘지지’ 역에 최적의 배우”라고 극찬했다.
지난 4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그녀의 무대 위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귀국하자마자 뮤지컬 ‘모짜르트’의 ‘콘스탄체’ 역할을 연기했고, 최근 뮤지컬로 각색된 부조리극의 대명사 ‘보이첵’의 ‘마리’ 역할을 맹 연습 중에 있다. 반짝이는 열정이 아름다운 배우, 김소향과의 특별한 데이트를 공개한다.
Q 요즘 뮤지컬 ‘모짜르트’ 지방 공연과 함께 10월에 공연 될 뮤지컬 ‘보이첵’ 공연을 위한 연습을 병행하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힘들진 않으신가요?
20대 무렵에는 지금보다 훨씬 빡빡한 일정으로 공연을 했어요(웃음). 하루에 2개 공연을 할 때도 있었죠. 하루는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 다음날은 ‘위대한 개츠비’ 무대에 서면서 주말에는 지방공연 다니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원 캐스팅(한 명의 배우가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캐스팅)이 많았는데 지금은 더블, 트리플 캐스팅(두, 세 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일정을 소화하는 캐스팅)이 많아졌죠. 더블 캐스팅 공연의 경우는 그리 힘들지 않아요. ‘모짜르트’ 같은 경우도 트리플 캐스팅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고요. 대신 이번 뮤지컬 ‘보이첵’ 공연은 저 혼자 해야 하는 원 캐스팅이에요. 그래서 특히 체력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Q 뮤지컬 ‘보이첵’의 ‘마리’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의 부담, 책임감도 클 듯 합니다.
맞아요. 다른 공연은 앞서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보며 참고할 수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가 있는데 ‘보이첵’의 경우는 무조건 저 혼자 이끌어 가야 하니까요. 작품의 특성상 다른 여자 배역이 많은 것도 아니라, 그야말로 원톱으로 무대에 서야 해요. ‘모짜르트’는 사실 저 외에도 주•조연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보이첵’의 경우는 보이첵과 마리가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게다가 ‘보이첵’은 연극적으로 이미 자타가공인하는 훌륭한 작품이잖아요. 그래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보이첵’을 처음 맡게 됐을 때는 좋았는데 다시 작품을 읽어보니, 30대가 되어 읽었을 때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요즘은 ‘부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있는 중이에요. 무려 7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공연되는 작품이라 무대를 맡은 배우로서 각오를 되새기고 있죠. 처음 제의를 받았던 게 미국에 있을 때라 ‘모짜르트’ 공연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늘 ‘보이첵’이 있었어요.
Q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보이첵’은 부조리극의 시초와 같은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한편으로 조금은 난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래요(웃음). 부조리에 대해서 파헤치기 시작하니까 사실 그 정의 자체가 모호하더군요. ‘부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작품도 읽어봤어요. 부조리를 다루는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것이 부조리라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진 않더군요. 어찌 됐든 그렇게 여러 작품을 살펴보고 고민을 하면서 제 연기가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방법을 모색했어요.
제 생각에 부조리란 인간이 부딪힐 수 있는 한계, 처절함을 밑바닥까지 보여주면서 발버둥쳐도 벗어나기 힘든 현실의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희곡은 누가 읽느냐에 따라서 달리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맡은 역할인 ‘마리’는 순수하면서도 욕망에 끌리기도 하는 여성이에요. 어떻게 보면 일관성이 없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그게 또 인간이 아닌가 싶어요. 인간이 어떤 한 면만 가진 것은 아니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착한 사람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까다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면적인 인간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것이 제 숙제인 것 같아요.
뮤지컬로 공연되는 ‘보이첵’은 원작에 비해 좀더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부분이 많이 더해졌어요. 인물에 대한 표현도 원작처럼 강하고 직설적이지 않고, 완곡하게 변화를 주기도 했고요. 다만 마리에 대한 보이첵의 사랑은 원작보다 더 순수하게 표현되고 있고요. 그래서 나중에 더욱 처절한 느낌을 주게 되죠. 뮤지컬 ‘보이첵’은 한 마디로 관객들에게 더 쉽고 불편하지 않게 다가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Q 지난해 한국 뮤지컬 배우 최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는데요.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신다면?
조금 수정 되야 할 듯한데, 정식 브로드웨이 무대는 아니에요. 시카고에서 공연되는 ‘브로드웨이 시리즈’ 중 ‘미스 사이공’ 무대에 선 거죠. 다만 제가 최초로 이뤄낸 것이 있다면, 한국 출신 배우 최초로 미국 배우조합인 ‘액터스 에쿼티(Actors’ Equity)‘에 가입됐다는 정도죠. 브로드웨이 무대는 액터스 에쿼티에 가입된 배우만 올라갈 수 있어요. 하지만 액터스 에쿼티에 가입조건은 굉장히 까다롭죠. 조합에 속하지 않은 배우는 액터스 에쿼티 오디션을 봐서 합격을 한 다음 그 공연을 50주 이상 이어가야 조합원 자격증이 나와요.
제 경우는 ‘미스 사이공’ ‘지지’ 역할을 제의를 받고 일종의 도박을 했어요. 비행기, 호텔 제공도 필요 없으니 액터스 에쿼티에 가입하게 해달라고 했죠. 그쪽 입장에서는 절 쓰지 않아도 그만인 상황에서 모험을 한 셈이에요(웃음). 다행히 절 좋게 봐서 그 조건이 수락됐죠. 나중에 들은 바로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중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조합에 가입이 되면 어드밴티지가 있어요. 미국에서 비조합원(Non- Equity)일 때는 일단은 브로드웨이 공연 오디션 자체를 볼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조합원 배우 중심으로 오디션 스케줄을 짜거든요. 비조합원은 조합원 배우들이 오디션을 다 보고 나서 남는 시간에 오디션 기회를 주곤 해요. 하지만 그것도 매번 그런 것은 아니죠.
제 경우 비조합원일 때는 매일 새벽 오디션 장에 가서 오후 6시까지 기다렸다가 ‘오늘 비조합원 오디션은 없다’고 하면 그냥 울면서 집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조합원이 되니 이젠 오디션 날짜가 정해지면 몇 시에 오디션을 보겠다고 통보하면 되요. 물론 제 경우는 조합 소속이 아니었을 때 브로드웨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뮤지컬 ‘왕과 나’, ‘올리버’ 공연에서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3달 공연을 해도 출연료가 우리 돈으로 40만원 정도 였어요. 그런데 조합원이 되면 최소 출연료라도 그 10배 가까이는 되죠.
Q ‘액터스 에쿼티(Actors’ Equity)‘에 가입됐다는 건 조만간 브로드웨이에 본격적인 진출을 예고하는 것인가요?
물론 제 꿈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서 3년을 생활하고 돌아와 보니 ‘내 나라말처럼 좋은 게 없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내 입에 맞게 개사를 할 수 있고, 대사를 고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됐죠. 사실 미국에서는 아무리 해도 원어민의 영어실력을 따라갈 수 없어요. 또 동양인이라는 한계가 있죠. 아시아계는 동양인 역할만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아이다’도 할 수 있고, ‘페임’도 할 수 있고, ‘드림걸즈’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미국에 가면 저는 그저 아시아인일 뿐이에요.
미국 생활을 하면서 그런 목마름이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양한 배역을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생각이 많아졌어요. 국내 무대에서 한국배우로서 어드밴티지가 크고, 작업하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물론 브로드웨이 무대로 가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포기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도 무시하긴 힘들어요.
Q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인2001년 뮤지컬 ‘가스펠’로 데뷔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연이 아닌 단역배우 시절도 있으셨을 텐데요?
저는 안양예고를 나왔어요. 예고 1학년 때부터 연극은 계속 했어요. 그리고 진짜 뮤지컬 배우로서 데뷔한 것은 ‘가스펠’이 처음이에요. 고교시절과 국민대 재학시절 초반에 한 것은 프로로서의 시작은 아니고 워크숍 개념의 무대였죠. 그래도 그런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가스펠’로 데뷔 한 후 ‘페임’을 하면서도 좋은 역을 맡았죠. 하지만 저는 계속 다시 돌아가서 앙상블(뮤지컬 무대에서 주요 배역을 맡지는 않지만 합창과 군무를 담당하는 배우)을 했어요. 요즘 배우들은 앙상블을 하다가 주연되는 기회가 드물기는 한데, 저 같은 경우는 주연을 하면서도 커버(주연 대신 투입되는 배우), 얼터(어느 정도 출연횟수를 보장받고 무대에 서는 대체 배우) 하기도 했고 앙상블을 계속 했었어요.
Q 2001년 이면 대학교 3학년 때쯤일 텐데, 꽤 빨리 데뷔하신 것 아닌가요?
네 당시로서는 빨리 데뷔한 편이죠. 하지만 요즘에는 저보다 빠른 배우들도 종종 있더라고요. 저는 국민대학교 시절 교수님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무대 생활과 학교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죠.
Q ‘가스펠’ 이후 14년 차 뮤지컬 배우로 완숙한 연기를 보여주고 계신데요. 오랜 시간 뮤지컬 배우로 살아오시면서 느낀 뮤지컬의 매력은 무엇인지? 또 뮤지컬에 집중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느 쪽도 버리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에요. 저는 춤을 너무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현대무용을 부전공 했어요. 노래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아했고, 연기는 제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이었죠. 가끔은 심오할 필요도 없고, 현실에서 벗어나게 끔 해주고 또 웃고 울게 해주는 예술장르는 뮤지컬뿐이라 생각해요. 관객은 배우들이 눈 앞에서 자신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죠. 배우로서 저는 그런 관객들과 동화되는 기분을 즐겨요. 그런 기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뮤지컬이죠.
Q 이제까지 다양한 작품을 해 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무대, 기억에 남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앙상블로 무대에 서도 커버를 함께 맡기도 하는 경우가 많아 늘 한번 이상은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곤 했죠. 그 중에서 정말 제가 주인공으로서 무대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2005년 ‘아이다’를 했을 때였어요. ‘내가 정말 극의 중심이구나’라는 사실을 온전히 느꼈죠. ‘아이다’ 역시도 앙상블의 커버로 뽑혔거든요. 그 와중에 연출가께서 제가 하는 아이다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이례적으로 커버에게 공연 스케줄이 부여됐어요. 1주일에 한 두 번 정도, 그렇게 11회를 무대에 섰는데, 그 공연이 제게는 엄청난 감동이었어요. 지금도 친한 지인들과 선배들 중에 그때 제 아이다가 최고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해 주세요. 제게는 참 소중한 작품이죠.
Q 무대 위에서 가장 아찔했던 실수의 순간도 있었을 텐데, 돌이켜 봤을 때 미소가 지어지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엄청나게 많죠. 너무 창피한 기억도 많아요(웃음). ‘토요일 밤의 열기’를 공연할 때는 앙상블인데다 어렸으니까 무대 위에서 장난치다가 혼날 때도 있었어요. 진짜 막막했을 때는 ‘페임’할 때였어요. 주인공을 맡았는데 안무를 완전히 잊어버린 거예요. 무대 한 가운데서 춤을 춰야 하는데 완전 백지상태가 된 거죠. 제일 아찔했던 건 웃음이 나올 때에요. 제가 웃음을 정말 못 참거든요. 한번 터지면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라 심하면1 주일을 가요. ‘드림걸즈’를 할 때가 그랬는데, 계속 웃음을 터트려서 감독님이 주연 배우들을 모아놓고 한번은 정말 크게 화내신 적이 있어요. 절대 웃지 말자고 다짐하고 무대에 올라갔는데, 그럼에도 또 웃음이 나는 거예요. 그게 가장 힘들었어요. 참 난감하죠.
Q 작품 마다 다른 역할, 캐릭터를 연구하셔야 할 텐데요. 자신만의 감정선, 스타일을 정하는 방식이 있으신가요?
제가 어릴 때는 무조건 보이는 면에만 집착했어요. 그런데 미국에 갔을 때는 언어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크게 배웠던 것이 있어요. 연기를 배울 때 기초에 해당하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같은 분석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었죠. 그런 분석을 작품 통틀어 하는 게 아니라 노래 하나마다 장면 하나마다 하는 거예요. 노래의 목적, 연기의 목적을 찾으면 연기가 굉장히 달라지는 걸 느껴요. 누군가 배우가 그 역을 하려면 그 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역할과 비슷한 면을 찾아내고 그 역할에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다면적이잖아요. 제 안에도 여러 가지 면이 있죠. 저 역시 대본을 읽으면서 제 안에 주인공과 같은 면을 찾아내요. 거기서부터 연기를 시작하면 동떨어지지 않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뮤지컬 배우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꿈으로 삼는 이들도 있고요. 하지만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을 듯한데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타고나는 배우들은 굉장히 많아요. 때론 너무 질투 나고 부러운 배우들도 많아요. 그런데 정말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것은 좀 다른 의미인 듯해요. 우선은 시간이 필요하죠. 많은 경험과 시간이 좋은 인성과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공동작업이니까요. 내가 얼마나 다른 배우들과 소통하는지도 정말 중요해요. 배우가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지는 무대를 보면 알아요. 무대 위에서는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나오거든요. 지금도 다 알지 못하지만 어릴 때는 더 몰랐죠. 일찍 알았다면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었겠죠(웃음).
아직도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냉정한 분석력과 다른 배우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같이 녹아나야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요. 즉,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사람이 먼저 되야 한다는 거죠. 제 20대 때는 독기서린 시절도 있었어요. ‘성공할거야, 저 배우를 누르고, 더 잘해내야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 시절도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 보다는 ‘저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지’가 더 신경 쓰였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얼마나 바보 같고 스스로를 죽이는 행동이었는지는 미국을 다녀와서 알았어요.
한 때는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지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사람들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가 더 좋은 배우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물론 인간이니 저보다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질투가 나죠. 하지만 지금은 ‘나도 저걸 어떻게 해야 배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편해져요. 그런 여유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고요. 편한 배우 좋은 배우라는 느낌으로 전해지는 거죠. 더 일하기 편한 배우가 되기도 하고요. 그런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Q 한편으로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배우들만의 고충, 어려움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어떤 것들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막연히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는 거죠. 지망생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사람에게는 어쨌든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왔을 때 잡느냐 못 잡느냐는 준비한 것에 달려있어요. 절치부심하며 준비하는 것과 마냥 조바심만 내는 것은 차이가 크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또 배우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요. 심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닌 거죠. 배우는 자기 목과 컨디션을 생각해서 울어서도 안되고 아파서도 안돼요. 사실 저도 예전에는 연애할 때 남자친구와 울고불고 해서 목소리가 쉬어 공연을 못한 적도 있어요(웃음).
배우에게 자기관리는 참 중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깨닫고 있어요. 몸, 얼굴, 그 외 모든 것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5~10년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뮤지컬 배우가 명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많은 선배님들이 제가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만류했어요. ‘10년을 한 걸 왜 버리려 하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상관없었어요. 명성은 덧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TV연기자나 영화배우와 달리 무대에 서는 배우는 사람들이 잘 몰라요. 아무리 유명한 작품을 한다고 해도 뮤지컬 마니아들 정도만 알거든요. 명성을 쫓는다면 뮤지컬을 하지 말아야 해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열정을 투자해야 되는 것이 뮤지컬이라고 생각해요.
Q 명성, 유명세를 바라던 시절은 없으셨나요?
어릴 때는 많이 바랬어요(웃음). 가수를 하고 싶었죠. 솔직히 제 자신이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쁜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매력적인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했는데 그때는 노래를 더 못했었어요(웃음). 제 자신을 생각하고 뭘 더 하고 싶은 지를 깊이 고민했을 때는 그게 무대더라고요. 배우생활 5년 지난 후에 깨달은 사실이에요. 그 후로는 하고 싶은 것 하나도 못 하는 유명 배우들이 불쌍해지더군요. 행동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되니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 자유가 없는 거죠. 저는 집시의 경향이 강해서 유명한 것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택한 거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Q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 99학번 시절 김소향은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하네요.
대학시절 김소향은 지금보다는 훨씬 왈가닥이었어요(웃음). 머리는 분홍색 염색을 하고 힙합바지 입고 다녔죠. 이미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을 당시였지만, 남들 시선은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고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나름 후배들이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선배이기도 했죠. 제가 아는 것은 잘 가르쳐 주는 의리 있는 선배 정도였던 것 같아요. 다만 당시에도 활동을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동기, 후배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더욱 함께했던 몇몇 기억들이 소중해요. 특히 1학년 때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무대도 만들고, 함께 공연을 준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죠.
Q 뮤지컬 배우 외에 학창 시절 가장 최고의 도전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어요. 학생 때부터 공연 출연료가 통장에 쌓이기만 하면 여행을 갔어요. 동남아, 괌, 필리핀, 사이판, 미국, 캐나다, 유럽,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죠. 북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빼고는 거의 다 갔어요. 여행은 정말 사람을 변하게 만들어요. ‘난 여기 아니면 살 곳이 없을 거야’, ‘이거 아니면 아무것도 못해’, ‘난 아무짝에 쓸모 없는 사람이야’와 같은 생각이 정말 부질없다는 걸 깨닫게 해줘요. 어디서든 살 수 있고, 뭘 해서든 살 수 있고, 무엇을 하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죠.
저 역시 살아가며 모든 조바심을 떨치지 못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최선을 다했을 때 미련은 남기지 않아요. 이게 안되면 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거죠. 세상은 대한민국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굉장히 부유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기도 하죠. 긍정적인 마인드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Q 대학시절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인성적으로는 확실히 대학시절보다 성숙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웃음). 대학교 때가 더 좋았던 건 활발하고 밝고, 명랑했다는 것이죠. 지금은 타협하려는 경향이 생겼어요. 대학은 꿈꾸며 다니는 곳이잖아요. 대학 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거 같았던 기분, 그런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뭐든지 상상할 수 있고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은 마음상태였죠.
Q 요즘 후배들, 학생들의 대학생활은 어떤 것 같나요?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말씀해주신다면?
연극영화과 학생에게는 할말이 있어요. 요즘 학생들은 테크닉적인 부분만 신경을 많이 써요. 특히 노래연습에 치중하죠. 이론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이 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스 신화, 셰익스피어 비극, 현대 연극, 서사극 등 이런 것을 잘 모르고 그냥 그렇게 나와서 연기한다고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 겠지만 연기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외국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놀고 대학교 때 공부하잖아요. 그게 정말 맞는 것 같아요. 다른 과도 마찬가지에요. 대학교 시절에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학생들이 대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고 사회에 나와서 놀았으면 좋겠어요. 대학교 때 공부한 것이 평생 간다고 생각해요. 대학생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그거에요. 정말 공부 많이 해라. 특히 이론적인 부분을 튼튼히 하라는 거죠.
Q 20대 학생들 중에는 진로설정을 매우 어려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소향 씨의 경우는 어떻게 꿈, 진로에 대해 확신을 얻으셨는지, 어려워하는 20대들을 위해 조언을 해 주신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행을 많이 가라고 권하고 싶어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며 사는지를 느끼라는 거죠. 또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직업이 있어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정말 맞아요. 책도 많이 읽었으면 해요. 특히 연극영화과는 정말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저는 그나마 아버지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많이 읽었고 그게 도움이 됐거든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직업에만 연연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돈 많이 벌고 그럴 듯 해 보이는 직업만이 좋은 직업은 아니에요.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직업이라면 언젠가는 그 직업이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겪어보라는 거고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를 알려면 워킹홀리데이든 뭐든 외국에 가서 농장 일도 해보고 과일도 따보고 양털도 깎아보고, 책도 많이 읽어보고 해야 해요. 의사나 법조인, 회계사만 생각하면 평생 연봉만 따지다가 끝나요.
Q 삶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소향 씨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그런 게 있으면 저 좀 알려주세요(웃음). 저도 선택을 그다지 잘하지 못하고 산 편이에요.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시간을 많이 갖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시간이 없어 생각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린다고 해도, 기회는 다시 와요. 오래 두고 천천히 깊이 고민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 해야 할 것과 다름 기회를 노려도 될 것, 혼자 생각하기 버거우면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의견도 들어보세요.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소향]
2001년 뮤지컬 '가스펠'로 데뷔해 '사랑은 비를 타고', '페임', '위대한 개츠비', '에비타', '드림걸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미스 사이공', '모짜르트' 등 다양한 뮤지컬에서 활약하고 있는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