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의 꽃과 나무가 가득한 세상에 동그란 얼굴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다. 바로 화가 권기수의 ‘동구리’ 시리즈다. 많은 사람들이 동구리의 웃는 모습에 위안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실 작가의 의도는 다르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동구리는 어쩔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이 시대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그 의도는 차치하고라도 작가의 첫인상은 작품 속 동구리와 다름이 없었다. 흰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 인터뷰를 하면서 동구리는 한편으로 작가의 지난 시간들이 투영된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한때 지독한 열등감에 빠져 살았던 시절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화풍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최근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근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3년짜리 장기 공공 프로젝트를 2개 정도 진행하고 있어요. 하나는 지난해부터 진행해서 2016년에 종결되는 프로젝트고, 나머지 하나는 이제 시작단계인데 2년 정도 소요될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조만간 제 작품의 이미지 북이 출간 될 예정이고요(웃음).
Q 공공 프로젝트라면 어떤 것인지요?
요즘 서울 시내에도 일반산업단지들이 들어서고 있거든요. 송파구 문정동 쪽에 단지가 형성되면서 구획이 나눠지게 되는데, 그 구획을 나누는데 있어 건축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디자인과 조형물을 만드는 일이에요. 단순 조형물이라기보다, 예를 들자면 예술작품이 포함 된 조각공원 같은 느낌으로 꾸미는 거죠. 각각의 단지를 특화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작품이 각각의 건축물에 입주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매치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에요. 상당히 거대한 프로젝트라 많은 동구리 작품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Q 말씀하신 프로젝트 외에도 다양한 기업 혹은 단체와 콜라보레이션을 종종 하시는데요. 협업을 하는데 있어 작가님만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맞아요. 최근에는 TV CF까지 들어오기도 하죠. 하지만 전 연예인이 아니니 작가로서 명분을 중시하는 편이에요. 제 작업스타일과 작업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미술을 하는 사람, 예술가로서의 명분에 걸맞은 제안이라면 가급적 수용을 하죠. 하지만 제 삶과 너무 동 떨어진 제품을 만드는 기업, 혹은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기업의 제안이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동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평소에 좋아하고 즐겨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의 경쟁 기업에서 제안이 들어오면 사양을 하는 편이에요. 일종의 ‘의리’를 지키는 거죠(웃음). 반면 저랑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평소 문화예술에 굉장히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기업의 제안이라면 이익을 떠나서 도움을 드리고 있고요.
Q 작가님의 예술적 가치를 단순히 소모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시너지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제안을 좋아하시는 거네요.
시너지도 중요하고 또 예술가라는 직업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비즈니스에요. 어떻게 보면 고도의 비즈니스죠. 하지만 예술은 표면적으로는 자본하고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제스처 취하기도 하죠(웃음). 그렇기 때문에 때론 실리보단 명분이,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과정과 명분이 분명하면 꼭 예술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동참할 수 있는 일이고요. 하지만 이 과정과 명분이 부실하게 되면 실리적으로 굉장히 큰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도 동참할 수 없게 되는 거죠.
Q ‘동구리’는 작가님의 성함보다 더 유명해 졌는데, 일종의 기호라고 해야 할까요? 언제 어떻게 동구리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이 궁금하네요.
많은 분들이 동구리가 제 첫 작업으로 알고 계신데, 작가 경력 20년 중에 동구리 작업을 시작한 것은 15년 정도 전이에요. 초기에는 다른 작업에 몰두하다가 변화를 시도했고 그런 가운데 동구리 작업이 시작된 거죠. 공식적인 발표는 2002년도인데 그 원형이 되는 시도는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했죠. 아, ‘동구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2002년 쯤 이었어요(웃음).
Q '동구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된 것인지도 궁금한데요.
사실 동구리의 모양도 그렇지만 이름도 제가 처음부터 기획을 해서 이런 명칭으로 나가야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에요. 어쩌면 둘 다 우발적으로 만들어졌죠(웃음). 동구리의 모양은 우연찮은 여러 만남을 통해서 의도하지 않은 드로잉을 하게 됐고 그 속에서 발견된 것이었어요. 이름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변사람들이 동글동글 하니까 ‘동구리’라고 붙이자고 그래서 즉흥적으로 붙인 거죠.
그 후에 한동안은 ‘좀 멋있는 이름을 붙일 걸 그랬나’ 생각했는데, 동구리 작품을 몇 년간 지속하다보니 굉장히 필연적인 결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이나 동아시아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연관이나 사회관 또 넓게 봐서는 우주관이 ‘순환’이잖아요. 둥글게 살아가는 모습들이죠. 제가 동구리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고 작업할 때도 동양적인 가치관, 인과응보, 순환의 개념이 암암리에 녹아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Q 작품 속 동구리는 늘 즐거워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잖아요? 왠지 작가님께서 의도하는 또 다른 바가 있으실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초기 제 의도는 삶의 힘겨움, 끔찍함, 불안감을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초기 드로잉에서는 웃는 동구리 뿐 아니라 화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피를 흘리기도 하는 동구리의 모습도 있었죠. 그걸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거친 것들이 제거되다 보니까 지금의 귀여운 모습이 나온 거예요. 정식 발표를 염두에 둘 무렵에도 동구리는 다양한 모습이었어요.
웃는 동구리뿐만 아니라 인상을 쓴 동구리, 할아버지 동구리, 할머니 동구리, 아기 동구리, 남자 동구리, 여자 동구리,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온 동구리, 뱀구리, 돼지구리 같은 동물까지 포함했죠(웃음). 그런데 문득 ‘내가 의도했던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구리는 우리가 흔히 하는 말, 노래 가사도 있지만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의 상황이에요. 광대, 피에로의 모습들 보면 항상 웃고 있지만 그 역할은 놀림 받고, 괴로워하고, 넘어지는 힘든 역할이잖아요. 즉 동구리는 웃어야 되는,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현대인, 조직화 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사람의 모습이에요. 현대인의 초상이자 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죠.
Q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현실과 밀접한 작품이네요.
그렇죠. 저는 그렇게 생각 해주길 바랐는데(웃음)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동구리를 보면 행복하고 즐겁다거나,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해요. 사실 제 작업은 저 자신의 스트레스를 그대로 담은 것이기도 해요. 그런 점이 현대인들이 상대방 앞에선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두고 보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작품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모두 그런 것들이에요.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스트레스가 과도한 상황에서 그걸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담겨 있는 거죠.
Q 작가님의 의도가 어떻든 사람들에게 동구리는 즐거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동구리의 아빠, 권기수라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 작가님의 관심사가 궁금하네요.
요즘 관심사는 돈이에요(웃음). 작가라는 사람이 돈 이야기를 하니 웃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앞에서 예술은 비즈니스라고 말씀드린 것과 같아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예술가들을 너무 신격화해 놓은 경향이 있다고 봐요. 사실 예술가들은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들이거든요. 몇몇 특이한 경우, 예컨대 고흐와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인정받는 대작가들의 80~90% 이상은 굉장히 세속적인 삶을 살았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 작업에 쓰이는 물감하나가 10만원이 넘거든요. 스프레이 작업 3~4번 하면 금세 없어져요. 그런 물감이 수십통 사용되는데, 돈 생각 안하고 그리고 싶은 작품만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닌 이상은 불가능하죠. 실제로 전시하나 기획하는데도 돈이 많이 필요해요. 예술의 역사를 보면 권력층, 부유층에 빌붙었던 경우가 적지 않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명작들 중에는 한 사회의 부패가 극심한 시절에 나온 작품들 많아요.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죠. 사람들의 삶이 아름다운 시절에는 명작들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삶이 즐거운데 굳이 예술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Q 아마도 작가로서 초기 작업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초기에는 저 역시 배고픈 예술가였죠(웃음). 사실 지금의 제 모습은 초기의 제가 반대했던 모습이에요. 그래서 가끔 제 스스로를 돌아볼 때면 놀라기도 하죠. 학교를 다닐 때나 졸업한 직후에는 상업적인 작업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유명세도 원치 않았죠. 그저 작가들과 교류하고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적어도 마흔 살까지는 실력을 쌓는데 만 매진하자는 마음을 먹기도 했죠. 명성이든 돈이든 그 이후부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계획과 달리 데뷔 초기에 너무 빨리 좋은 반응을 얻게 됐고 그 각오들은 몇 년 만에 무너졌죠(웃음).
Q 작품의 영감을 찾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으신지요?
딱히 없어요. 작품의 아이디어는 일상에서 우연히 찾게 되는 편이에요. TV를 보다가, 얘기 하다가, 길을 가다가, 혹은 남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가도 떠오르죠. 아이디어가 가장 잘 떠오를 때는 역시 외부에서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에요(웃음). 제 작품 중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들은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극심한 즈음에 나오죠.
Q 여러 기업에서 동구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상업적으로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동구리가 상업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전 사실 상업화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한창 고민할 때 알고 지내던 큐레이터들이 조언을 해주더군요. 어찌 보면 큐레이터들의 부추김에 콜라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 거죠(웃음). 아무래도 상품을 위한 캐릭터들은 너무 성격이 특정화 돼 있는 반면, 동구리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듯해요. 제 아이들도 그렇고 아기들한테 보여주면 굉장히 반응이 빨라요. 아마도 뭔가 해석할 것 없이 가장 원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네요.
Q 예술계 그 중에서도 순수미술 쪽에서는 작품의 상업화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이 있을 듯합니다. 기존 미술계에서 작가님에 대한 평가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을 듯 한데요.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평가는 꽤 많아요(웃음). 제가 전통적인 재료를 안 쓰니까 동양화 작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듣고, 사실 데뷔 초기에는 팽 아닌 팽을 당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모토 중에 하나가 ‘예술은 항상 새로워야 된다’였어요. 좋든 나쁘든, 더럽든, 깨끗하든,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항상 새로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새로운 것들은 홀대 받거나 거부될 수도 있어요. 어찌 보면 제게로 향했던 편견과 비난은 자양분이었다고도 생각해요. 제가 그만큼 주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비판은 저도 버거워요(웃음).
Q 예술분야의 꿈을 키우고 있는 지망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작가님도 경험하신 것처럼 막연하고 불안한 시기도 겪게 될 텐데요.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일단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있지만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드물거든요. 또 일부 지망생들은 부모님에게 지원받아 몇 년 만 노력하면 금세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해요. 진정 원하는 꿈이라면 진짜 현실 미술세계가 무엇인지에 깊이 파고들어 알아보라고 하고 싶어요. 그래도 원한다면 최소 10년은 걸릴 각오를 하고 매달려볼 필요가 있어요. 특히 회화 같은 경우는 자기 스타일이 완성되는 시간이 최소 10~15년이 걸리거든요.
학교를 졸업하고 신인작가로 시작해 10~15년 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다는 점을 각오해야 해요. 그러려면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하죠. 특히 생계 유지가 관건이에요. 10~15년을 버틸 수 있는 장기적인 계획만 세울 수 있다면 작가라는 직업은 상당히 매력적이죠. 주변에 보면 생계가 어려운 작가들도 있고 지위를 못 얻은 작가도 있지만, 다른 어떤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하는 친구들에 비해서 삶의 질은 다들 좋아요. 삶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거든요.
Q 작가님의 유년기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 편린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면?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죠. 오히려 너무 얌전했었고 심지어는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어요. 그렇다고 교우관계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고요(웃음).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때 늦잠을 자서 2교시에 등교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 짝은 제가 학교에 안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정도였죠. 그 정도로 존재감 없이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림만 그리는 아이’였죠.
Q 커가면서 어떤 꿈들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어릴 때만해도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때는 누구나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아마 대통령 다음에 많은 꿈이 과학자였을 거예요. 그림을 그려도 과학자가 된 제 모습을 그려서 잘 그렸다고 뽑히는 상황이었죠. 대학교 때 꿈은 로커가 되는 것이었어요(웃음). 친한 친구가 매일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며 다녔는데, 그 친구는 실력을 키워 결국 가수가 됐죠. 저는 음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포기했는데, 사실 그 미련은 얼마 전까지 남아있었어요. 노래를 굳이 하지 않아도 음악 쪽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Q 부모님께서는 어떤 분들이셨나요?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부터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부모님은 그렇게 좋은 학력이나 환경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이 아니세요. 흔히 말하는 가난한 농부였죠. 배움도 짧으셨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강직한 성품, 고집 같은 것을 물려주셨죠. 그런 성격은 일상생활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작가의 삶을 사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 작업에 임하는 제게는 고마운 부분이죠.
Q 미술교육을 언제 정식으로 받았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학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심지어 예술 고등학교가 있는지도 몰랐죠. 미대를 염두하고는 있었는데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들과 실력 차가 벌어지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집안 형편상 학원을 가는 것은 쉽지 않았죠. 결국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누나들의 도움으로 드문드문 학원들 다니긴 했어요.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것은 고교 때 미술선생님의 영향이 컸죠. 미술 수업 시간에 동양화를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제 그림을 보고 선생님께서 동양화 작가가 되라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리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수채화 도구도 겨우 마련했는데 동양화 재료를 어떻게 사겠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직접 대구까지 가셔서 당신 돈으로 재료를 사다주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동양화를 전공하게 됐죠.
Q 대학시절, 작가님께서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1~3학년 때는 온통 콤플렉스에 빠져 살았어요. 저보다 그림 잘 그리는 친구도 많았거든요. 게다가 전 전공점수도 별로 좋지 않았어요. 또 동양화과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았고요. 세상은 다양한 색인데 동양화는 온통 까맣기만 한 것이 싫었어요. 엄밀히 따지만 1980년대 수묵운동의 영향인데 당시에는 그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만 했어요(웃음). 그렇게 항상 주눅이 들어서 어깨도 펴지 못하고 다녔어요. 오죽하면 친구들이 고개 좀 들고 다니라고 할 정도였죠. 가진 것도 없고, 재주도 없다고 생각되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대면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에게 속았다는 생각만 했죠(웃음).
Q 그 열등감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 듯한데요.
대학 4학년 당시에 해동검도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터였어요. 그것도 꽤 비주류적인 운동이죠(웃음). 어쨌든 그로 인해 제 삶을 굉장히 많이 바꿨어요. 그 전까지 저는 어떤 계기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게다가 당시 저는 팔굽혀펴기 10개도 못하는 저질체력이었거든요. 그런데 해동검도를 한지 6개월 만에 사람이 바뀌더라고요. 허리가 아파서 목검 휘두르기도 힘들었었는데 6개월 후에 전 상급 클래스에 가있더군요.
그 다음해에는 동아리를 이끄는 회장이 됐어요. 심지어는 총협회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시범단 활동을 하게 되고 전국대회 1등도 하게 됐고요. 이전의 저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 진거에요. 그때 처음으로 적어도 6개월만이라도 뭔가를 집중하게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다음부터는 뭔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면 좌절하는 대신 ‘6개월만 참아보자’ 혹은 ‘1년만 참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후 대학원 시절은 정말 즐겁고 에너지 넘치는 시간을 보냈죠.
Q 당시의 경험이 그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일단 체력이 뒷받침되니까 초창기 동구리 작업을 할 때도 밤샘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자신감도 생기고 동아리를 이끌다보니 선후배들과 교류하게 되고 열등감으로 피해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어요. 진취적인 성향이 된 거죠. 그때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제게 다른 삶을 살게 했다고 믿어요. 사실 당시 동아리 활동에서 만난 후배가 제 아내가 되기도 했고요(웃음). 인생 자체가 바뀐 셈이죠. 어찌 보면 제 안의 예술적인 요소가 드러날 수 있었던 저력도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경험 덕분인 듯해요.
Q 학생들 중에는 ‘내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확신을 갖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고요. 작가님의 경험에서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신다면?
같은 이야기지만, 일단 꿈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그 이후에 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6개월만 노력 해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매일 조금이라도 뭔가를 해보면 6개월 이후에는 확실한 변화가 생겨요. 때로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기도 하죠. 제가 해동검도 동아리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전 그렇게 집중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버티는 것,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것은 작가세계도 마찬가지에요. 살아남으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까지는 어떤 분야든지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해동검도 동아리를 할 당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 게 아니라 동아리 활동을 몇 년간 지속한 것뿐이에요. 버텨냈다는 정도죠.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언제 주목받을지 모르지만 살아남고 버티는 거죠.
[권기수]
작가 프로필
1998년부터 최근 2013 The Golden Garden 展을 비롯해 수많은 개인전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최근에는 자신의 대표작인 ‘동구리’ 시리즈로 다양한 기업, 당체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