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에는 1년간 25개국을 다니며 365명의 삶과 꿈을 담은 꿈의 파노라마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를 글로 옮겨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현재 그는 꿈의 파노라마 2탄을 위해 오는 9월부터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을 누빌 예정이다. 식을 줄 모르는 작가 김수영의 꿈에 대한 열정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중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학창시절 때 끝도 없이 방황했었죠. 소위 문제아라는 이름을 낙인처럼 찍고 다녔죠.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도 몇 번 했어요. 그때 힘이 되었던 노래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이에요.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라는 가사 한 마디에 정신이 확 들었죠. 그렇게 집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검정고시로 1년 늦게 실업계인 여수정보과학고에 입학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됐어요. 참담한 비극을 맞은 사람들을 보면서 제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더라고요. 정말 이 세상에는 이렇게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어요.
그 시절 기자의 꿈을 품게 됐어요. 세상의 많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거든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런데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는데 돈을 들일 수는 없고, 문제집을 쓰레기장 같은 데서 주어다가 풀기 시작했어요.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무도 저의 꿈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네 분수를 알라며 모두들 비웃기만 했죠.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것 같아요. 고 2때 도전 골든벨에 출연해 골든벨을 울렸어요. 저한테는 좋은 기회였고, 더 열심히 공부해 연세대에 합격했죠.
대학교를 다니면서 꿈꿔왔던 동아일보 인터넷 기자 활동을 했어요. 2000년에는 인터넷 최고 기사 상을 받기도 했었죠. 그런데 기자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자보다 내가 성공해서 기자들이 나를 취재하러 오게 하면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요.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대학 때는 서른 개가 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정말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4개월 동안은 작정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일을 했죠. 그 돈으로 호주 교환학생도 가고,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다양한 세상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 때 결심을 했어요. 도전적으로 삶을 살고 싶다고. 그 후 제 경험이 담긴 책을 냈어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시절,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입사를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취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국내 기업 50여 군데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죠. 끊임없이 정보를 찾았고, 드디어 글로벌 기업인 골드만삭스에 들어갈 수 있었죠. 감사한 일이었지만 제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어요. 모니터 앞에 나열된 수많은 숫자들을 보면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몇 천억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일이었죠. 일에 대한 흥미를 못 느끼고 있던 찰나에 몸에서 암세포가 발견 됐어요.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히 초기에 발견을 해서 수술로 완치가 됐어요. 스물다섯의 나이에 그런 일이 있고나니, 사람의 죽음이란 게 멀지 않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며 73가지의 꿈 리스트를 작성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됐죠. 첫 번째 꿈이었던 인생의 1/3을 한국에서 살고, 1/3을 세계를 돌아다니고, 1/3을 가장 사랑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이루기 위해 한국땅을 떠났죠.
제가 쓴 꿈 리스트에는 해외에서 취업하기,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께 집 사드리기, 남미를 여행하면서 살사와 스페인어도 배우기, 뮤지컬 무대에 오르기, 영화 출연, 책 쓰기, 강연하기, 에베레스트 오르기, 다큐 찍기 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현재는 70개국을 돌면서 47개 정도를 이뤘는데, 저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나는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꿈 리스트를 쓰고 나니까 불평 불만할 시간조차 없더라고요. 꿈을 이루기만도 바쁜 시간이잖아요. 제가 달라진 것도 꿈을 써본 이후예요. 꿈을 쓰기 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래요. 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모르니 꿈과 멀어질 수밖에 없죠.
주변에 해외 취업에 관련해서 조언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해외에서 너무 일을 해 보고 싶은데, 정보가 많이 부족했죠. 그래서 한 번은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어요. 그런데 답변이 뭐라고 온줄 아세요? 꿈 깨!라는 싸늘한 말 한 마디었죠. 현지인처럼 영어를 잘하지도 않고,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에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취업을 할 수 있겠느냐. 게다가 인종차별도 심해서 뽑아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악담이 난무했죠.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2005년 무작정 짐을 싸서 런던행 비행기 표를 끊었어요. 돈을 탈탈 털어서 석사 유학을 하게 됐죠. 문제는 생활비였죠.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알아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너무 참담한 심정으로 미래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잡았어요. 죽으란 법은 없는지 포기하지 않으니까 살 길이 열리더라고요. 해외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꾸준히 이력서를 내고 도전을 했어요. 아마 100번 정도 끊임없이 시도를 했어요. 수십 번 인터뷰에 낙방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로열 더치 쉘이라는 세계적인 에너지 기업에 들어가게 됐죠.
자신이 꿈을 이루려면 꼭 실천해야 하는 것은 꿈을 이룬 사람을 찾아가야 해요. 대부분의 이들이 나의 꿈은 무엇이다라는 이야기를 주변인에게 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주의 사람들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해요. 너무 큰 꿈을 이야기하면 비난 할 뿐이죠. 그렇다고 기가 죽으면 안돼요. 그 꿈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거든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꿈을 이룬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드는 나라로 일 년에 1,300편 이상의 영화가 나와요.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정말 황당한 이야기지만 인도영화에 출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향했죠. 그리고 영화 관계자 100명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다들 부정적인 이야기뿐이었죠. 그러다 가끔씩 좋은 반응이 오면 열이면 열 다 사기꾼이더라고요. 돈도 많이 뜯기고 우울증이 올 만큼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접촉을 시도했죠. 그러다 운 좋게 좋은 분들을 만났어요. 사진도 찍고, 제가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패션쇼에도 출연하게 됐죠. 이러면서 느낀 것이 사람의 인맥으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게 됐어요. 그러다 인도에서 제일 유명한 야시 초프라 감독님과 일하는 캐스팅 디렉터를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호랑이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라 모든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쩔쩔매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온 수영인데, 인도영화에 꼭 한번 출연을 하고 싶다.며 제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그분이 내 손을 잡고 펑펑 우시더니 제 꿈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잡 탁 헤이 자안이라는 영화에 출연 할 수 있게 되었죠.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보고 다큐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를 꿈꾸다가 오토바이 한 대를 타고 떠난 남미여행을 계기로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되잖아요. 이런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요. 이 영화를 보고 너무 가슴이 뛰었고,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허구가 아니라 리얼 로드무비 다큐로 말이죠.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꿈을 카메라에 담아보자.라고 생각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첫 번째는 부모님에게 집을 사드리느라 수중에 돈이 없었고, 두 번째는 영상을 어떻게 만드는 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래서 기업체에 후원을 요청하고 방송국에도 연락을 해봤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평범한 사람 취급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은 손해다라고 더 당당하게 말했어요. 그리고는 제 블로그에 이런 생각과 기획을 올렸더니 어떤 분이 킵워킹 펀드라는 꿈의 공모전에 대해 알려 주시더라고요. 좋은 기회였고, 바로 참여했죠. 그리고 1,500명의 사람들과 경쟁 끝에 1억 원을 받게 됐어요. 그 돈을 가지고 25개국을 다니며 365명의 꿈을 캠코더에 담았어요.
저라고 늘 열정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고요. 쉴 땐 원 없이 푹 쉬어요.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정말 열심히 하는 성격이에요. 실천을 하는 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아요. 시작은 힘들어도 도전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삶에 대한 혜안이나 꿈을 이룬 뒤의 보람이 저에게는 더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쉽게 이뤄 낸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가장 의미가 있었던 일은 최근 꿈의 파노라마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 일이겠죠? 캠코더 하나 들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어요. 위험천만한 일들이 제가 가는 길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어요. 히말라야에 오를 때는 고산증이 왔어요. 정말 제 자신과 사투를 벌였죠. 그래도 다큐를 완성하고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꿈들이 있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한 사람에게는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더라고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첫 번째는 해외로 나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다양한 삶과 문화를 경험을 하다보면 정말 시야가 넓어지거든요. 자신이 생각했던 일들이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요. 두 번째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봐라. 물론 대외활동이나 봉사활동 등도 있겠죠. 단순하게 스펙 쌓기가 아닌 정말 삶의 현장에서 부딪쳐 봤으면 좋겠어요. 학원이나 도서관을 벗어나 접시를 닦더라도 삶의 경험을 늘리고 연애도 많이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20대에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로는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 인 것 같아요. 그 것을 결정해서 평생 그 일만 하고 산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마음이죠. 남들 따라하지 마세요. 진정 가슴이 원하는 일을 찾아야 해요.
자기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 같아요. 결국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거든요.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멘토를 만나도 본인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구한테 의지하거나 남들한테 물어보지 말고 자기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실행에 옮기면 되요. 사람 일은 안 되는 것이 없거든요. 여섯 다리 걸치면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들이대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도와줄 사람도 찾게 되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꿈의 파노라마 2탄을 위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을 다니면서 다른 꿈에 도전할 예정이에요. 꿈을 나누는 사회적 기업인 드림파노라마를 설립하고 강연, 드림워크숍, 드림페스티벌, 드림퍼레이드, 드림펀드(가칭)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이지만 앞으로 할 일이기도 하고요. 인생은 한 번 뿐이잖아요. 사람들은 저에게 많은 것을 이뤘다고 이야기 하는데,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꿈 리스트에 적은 것들을 모두 이루는 그 날까지 파이팅 넘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 김수영]
드림파노라마 대표
前 로열 더치 셸 카테고리매니저
前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
방송
SBS스페셜-나는 산다, 김수영
인도영화 잡 탁 헤이 자안 출연
TVN 스타특강쇼-김수영
저서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