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호텔은 화려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호텔리어’라고 한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여행객, 비즈니스 목적으로 방한하는 기업인들이 주 고객이다. 즉, 호텔의 품격은 그 나라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텔리어에게는 엄격한 근무 룰이 적용된다. 깔끔한 용모와 복장 규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에티켓과 서비스 마인드는 필수다.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직업 중 하나지만, 그만큼 확고한 프로의식이 필요한 분야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롯데호텔울산 명노훈 총지배인은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살아온 호텔리어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의 한국 방문이 큰 폭으로 증가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롯데그룹 공채 22기로 입사한 그는 28년간 호텔리어로 살아오며, 판촉, 인사, 총무, 복지 등 호텔 경영에 필요한 각 파트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그 사이 로컬 브랜드였던 롯데호텔은 소공동 본점을 시작으로 잠실점, 제주점, 부산점, 울산점을 비롯해 지난해 뉴욕 팰리스호텔을 인수하며 국내외 20여개 호텔을 보유하게 됐다. 이제는 2020년까지 아시아 TOP 3를 목표로 하는 글로벌 호텔 브랜드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까까머리 소년이 5성급 호텔 총지배인이 되기까지 겪었던 시련과 도전의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발견한 삶의 지혜를 들어봤다.
올해 롯데호텔울산 개관 14주년을 맞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총지배인님께서 부임 하신지도 만 1년이 넘었는데요.
그간의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7월이면 부임한 지 1년 7개월에 접어들죠. 최근 의미 있는 일이라면 지난 4월 저희 롯데호텔울산이 롯데호텔 각 지점 중 처음으로 5성급 호텔 인증을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체인들은 모두 특1급 호텔을 무궁화로 표시했는데, 올해부터 스타로 바뀌게 된 겁니다. 5성급 호텔 인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평가에서 합격점을 얻어야 하는데, 호텔 서비스와 시설의 편의성, 안전, 위생, 음식의 맛 등을 디테일하게 보죠. 1천점 만점에 9백점 이상을 넘어야 가능한 결과에요. 롯데호텔 중에서, 또 영남권에서 처음 5성을 획득하며 지난 4월 대표이사께서도 오셔서 현판식을 하기도 했어요. 늘 최고의 서비스를 자부하지만, 5성을 달고 영업을 하는 만큼, 더욱 차별화된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겠다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평생을 호텔리어로 산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을 듯 합니다.
겉으로 볼 때 화려함도 있지만, 나름의 고충도 있었을 텐데요.
처음 입사할 당시 우리나라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국운이 융성하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호텔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죠. 특히나 저희 호텔은 로컬 브랜드로 막 시작한 터라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고 봐요. 더 역동적이고 도전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죠. 총무, 인사를 비롯해 호텔의 꽃이라고 하는 판촉을 맡아 원 없이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노사관계 주무 책임자를 맡으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죠. 물론 그 과정에서 힘든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간간히 회의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죠. 하지만 그런 순간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거라 생각해요. 나름 어려움을 극복하며 얻는 성취감도 작지 않습니다. 제 경우는 회사가 가진 역동성에 제 목표를 이입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충남 당진이 고향이 그는 농부의 큰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예감한 그의 부친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서울을 새 삶의 터전으로 정했고 가족을 남겨둔 채 그와 단 둘이 먼저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삶이 도전적이었던 이유는 부친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서울생활은 어린 그에게 익숙지 않았다. 초등학교 막바지 1년은 외로움으로 기억된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은 점차 적응이 됐다. 하지만 그 즈음 그의 관심사는 취직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동생이 줄줄이 셋이니 장남으로서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 무렵 대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동년배에 비해 키도 크시고 호남형이셔서 고교시절 에피소드가 적지 않으실 듯 한데요.
당시 어떤 꿈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 용산공고에 진학했어요. 젊은 혈기로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한때는 제복에 대한 로망으로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꾸기도 했죠. 그런데 막상 고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다 보니 제 실력이라고 할 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늦게 철이 든 편이에요(웃음). 집안 형편은 어렵고 공부를 하자니 돈은 없고, 결국은 1년 간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어요. 그렇게 주경야독해서 결국 국민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81학번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어요.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으시다면?
1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고 그러면서 공장 노동자의 애환도 겪어봤죠.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공고를 나왔던 터라 대입과목에 소양이 부족해 재수, 삼수를 거치며 어렵게 독학을 해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대학교에 입학 후에는 정말 좋았습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당시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럽고 대학도 조용하지 않았지만, 제게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는 그런 외부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 제겐 사치에 불과했죠.
재학 당시 기억나는 공간에 대한 질문에 그는 도서관과 운동장을 꼽았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1학년 때부터 과대표를 맡으며 타 학과의 과대표들과 교류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 김혜경 씨였다.
아내 분 역시 국민대학교 동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만나셨나요?
학번은 저보다 두 학번 후배지만, 나이는 다섯 살 차이가 나죠. 한번은 제가 학과 MT 무대에 올릴 연극 총감독을 하게 됐는데, 그 과정을 함께 하며 친해져서 캠퍼스 커플이 됐어요. 지금 학생들은 꽤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저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 데이트였어요. 전철 노선도 많지 않을 때라 차를 3번은 갈아타면서 집에 데려다 주곤 했죠(웃음).
그가 롯데호텔에 입사했을 당시는 우리나라 각 기업이 대거 신규인력을 충원하던 시기였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나름대로 멋진 기업에 공채 입사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와 동기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는 창고정리였다고 한다. 수년을 방치해 놓은 먼지 쌓인 창고를 정리하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새로 장만한 흰 와이셔츠가 까맣게 더러워질 정도였다.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지금 같으면 어렵게 채용한 사람들에게 절대 시키지 않을 일 이었다”며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겸손해 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평생을 해 오신 입장에서 호텔리어는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희가 처음 입사할 당시만 해도 호텔에 대한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왜곡돼 있었어요. 호텔에서 일한다고 하면 보이, 메이드라는 식으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었죠. 지금 호텔의 위상과는 격차가 컸죠. 하지만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사회가 성숙해지며 호텔은 비즈니스의 장, 대중적인 여가의 장으로 인식이 바뀌었어요. TV 등 대중매체의 영향도 컸죠(웃음). 그러면서 호텔리어는 선망의 직업 중 하나가 됐어요. 요즘 호텔을 찾는 사람들은 경사스러운 일 때문에 오시죠. 세미나나 컨퍼런스 혹은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꿈꾸며 오시는 분도 있어요. 모두가 즐거운 목적을 위해 온 분들이고 그 목적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호텔리어의 역할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죠. 단점이라면 호텔은 365일, 24시간 운영된다는 점이에요. 일반적인 회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항상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하죠. 그래서 어려운 직업이기도 해요. 세련된 호텔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위해서 호텔리어는 마치 호수 위의 백조처럼 쉼 없이 물갈퀴를 움직여야 하죠.
신입직원을 볼 때면 요즘 청년들의 어려움도 공감하실 듯 합니다.
대학생들에게 응원의 말씀을 해 주신다면?
제 아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학원 공부를 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젊은 세대를 보는 게 예사롭지 않죠. 사실 제 아들에게도 잘 못하는 이야기에요(웃음). 엄청난 노력을 하고 스펙을 쌓아도 사회구조나 국내외 경제 불황으로 여러 가지를 포기하는 청년들을 볼 때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한다면 너무 정형적인 틀 안에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남들과 똑같은 것에 매달리기 보다는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에 도전했으면 해요. 무엇이든 스스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대학 시절에 많은 경험을 추구하고 정형성을 깨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세요. 그렇게 노력한다면 길은 반드시 보입니다.
롯데호텔울산 명노훈 총지배인의 성공의 계기가 된 ‘순간’
-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
공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대학을 진학한 명노훈 총지배인. 그러나 기초가 없는 탓에 영어 강의는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답은 공부뿐이었다. 토플 책을 모두 외울 정도로 공부를 했고 나중에는 어느 페이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까지 알 정도였다. 그런 노력으로 쌓은 실력은 훗날 호텔리어가 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8부 능선까지 와서 힘들다고 포기하지만 성공은 9부 능선을 넘어야 보인다.”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극복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 발상의 전환, 궁하면 통한다 -
잠실 롯데월드호텔에서 세일즈 파트 업무를 담당했을 당시, 잠실은 허허벌판이라 국제회의를 유치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방문 판촉을 하고 잠실의 장점을 설명하길 수차례. 성공의 물꼬를 연 것은 발상의 전환 덕분이었다. 당시 3천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던 잠실 롯데월드호텔. 하지만 호텔은 기어이 3천여명 규모의 국제회의를 유치했다. 그가 롯데월드 어드벤처 공간을 통째로 빌려 국제회의와 리셉션 파티를 진행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이 성공을 계기로 잠실 롯데월드호텔은 매년 15건 정도의 국제회의를 유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