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진 몸에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장광효 디자이너의 첫인상이다.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눈빛은 패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언뜻 매서워진다. 전문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냉철함이랄까? 그에게는 늘 대한민국 1호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남성복 패션에 있어서 그 발자취는 지금까지 왕성하게 이어지고 있다.
크고 작은 부띠끄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강남의 청담동, 인근 압구정 로데오거리와 더불어 이 곳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패션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그 중 장광효 디자이너의 브랜드 ‘카루소’ 는 꽤 오랜 기간 회자되어온 패션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남성복의 개념이 대중화 되기 이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원을 마친 후 파리로 떠났다. 향수병과 싸워가며 약 2년여, 파리 인근에 위치한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 후 캠브리지, 논노의 수석디자이너로 남성복 패션의 전성기를 일으켰다. 1987년 자신의 독자 브랜드 ‘카루소’를 론칭한 이후 그의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국내 최초의 남성복 컬렉션을 개최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혁신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의상조합 정식 회원이 된 것도 그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방차’, ‘조용필’은 그의 단골 고객이었고, ‘소방차 바지’로 이름을 떨친 그의 히트작은 지금도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 되며 젊은 트렌드셰터에게 선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의 도전을 즐기고 있다. 과연 그의 삶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무엇일까?
Q 얼마 전 있었던 ‘2015 K-모델 어워드’에서 오프닝쇼를 맡으신 것은 물론 디자이너상을 수상하셨습니다. 3월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카루소 컬렉션도 진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굉장히 바쁘셨을 듯한데요.
맞아요. 3월은 물론이고 5월만해도 컬렉션 때문에 정신 없었죠. 최근에는 대구텍스타일콤플렉스(DTC)라는 곳에서 이영희 한복디자이너, 이진윤 디자이너 등과 쇼를 했어요. 또 경기도에서는 니트 콜라보를 하기도 했고요. 경기도 양주는 우리나라 니트의 거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 곳인데, 거기에 패션 빌리지가 만들어졌거든요. 제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부회장이다 보니 거기에서 나온 원단을 가지고 디자인을 한 쇼였죠. 또 경기도 내에 중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교복 디자인도 맡게 됐어요. 경기도에서 생산한 원단을 가지고 교복을 디자인해 주니 일종의 재능기부를 하는 거라 할 수 있죠. 또 경찰 유니폼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하고 있고요. 아마 곧 경찰 유니폼도 바뀔 거예요(웃음).
Q 1세대 남성복 디자이너이자 남성복 패션의 역사를 일궈오신 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유독 남성복에 올인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제가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할 때 여성복 업체하고 남성복 업체 채용에 모두 합격을 했어요. 반도패션(현 LG패션)과 캠브리지였죠. 고민이 되더군요. 그래서 은사이신 배천범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죠. 솔직히 남성복이 더 끌려서 “저는 남성복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라고 여쭤봤어요(웃음). 다행히 교수님께서도 “여성복은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남성복은 없니 네가 개척해서 1인자가 돼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쭉 남성복 디자이너로 살아오다 보니 지금까지 온 거죠.
Q 그렇다고 해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 디자이너라고 하면 겉보기에 멋있어 보이죠. 제가 쇼도 하고 TV에도 나오면 의상디자인학과 학생들은 동경을 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학생들에게 제가 하는 이야기는 좀 달라요. 패션디자이너가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죠. 또 경쟁이 꽤 치열하다는 것도 이야기 해요. 한 마디로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요즘 저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해요. 예를 들면 마네킹 같은 거죠. 최근에 DTC전시를 하다 보니 마네킹이 너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쇼를 할 때 모델을 고르는 이유는 좋은 모델을 써야 옷이 돋보이기 때문인데, 마네킹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마네킹 디자이너가 없어요. 그냥 유관 전공자들이 적당히 만들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패션을 전공한 사람이 살짝 발상을 전환을 해서 디자인이 돋보이는 마네킹을 만들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일본, 중국 시장만 개척하면 전세계 시장이 열리는 거예요. 대단하지 않아요?
Q 여러 히트작이 있으시지만, 그래도 장광효의 작품 중 성공한 것은 아마 지금도 회자되는 ‘소방차 바지’가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탄생한 디자인인가요?
당시 고객 중에 승마국가대표가 있었는데 그분이 영국에서 승마복을 사왔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다며 나한테 제작해 달라고 의뢰한 거예요. 전 승마복을 만들어 보지 않았던 터라 일단 사온 옷을 보자고 했죠. 원단과 패턴을 분석해보니 이걸 평상복으로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입히면 어떨까 싶더군요. 오늘 내가 입은 바지도 소방차바지 비슷한 거예요. 하렘팬츠, 일명 똥싼 바지라고도 하죠(웃음). 당시 소방차는 지금 엑소에 버금가는 인기가 있었죠. 일주일이면 소방차 무대 의상을 10벌 정도씩 해줄 때여서 마침 그 바지를 입혀봤는데 그게 히트를 친 거예요. 전국에서 소방차바지를 찾는데 한창 때는 하루에 1,000장 이상 나갔어요. 그때는 주 고객이 소방차와 조용필 씨였던 거고 그 외 다른 연예인들 옷도 거의 다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스타일리스트가 없던 때였으니 디자이너가 그 역할을 대신했죠.
Q ‘장광효 패션’을 이야기하자면 ‘카루소’를 빼 놓을 수 없는데요. 카루소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 직장이었던 논노가 부도가 났어요. 그리고 나니 다른 회사를 들어가기보다는 회사를 차리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은행에 모아둔 예금으로 차린 것이 카루소였어요.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 숍을 차렸는데, 독특한 패션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군요(웃음). 당시만 해도 옷에 관심이 많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은 옷보다는 액세서리나 몸을 가꾸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땐 그랬어요. 또 요즘 패션은 과도한 멋을 부리지 않고 심플하게 신경 안 쓰는 듯 입는 게 멋쟁이 소리를 듣잖아요. 예전과는 많이 다르죠.
Q ‘카루소’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생을 노래한 곡의 제목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를 브랜드 명으로 짓게 된 이유가 문득 궁금하네요.
제가 캠브리지를 다닐 때 결혼을 했어요. 아내가 음대 교수(성악가 길애령 씨)이기도 했고, 당시에는 음악 용어에서 브랜드네이밍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아내에게 남성복 브랜드 명으로 발음이 정확한 단어가 없는지 자문을 구했더니 카루소를 이야기하더군요. 엔리코 카루소의 이름에서 따온 게 맞아요(웃음). 듣는 순간 좋은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채택했죠. 아내는 지금도 자기가 이름을 지었다고 종종 자랑을 해요(웃음).
Q 사업적인 측면에서 선생님 역시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을 듯 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말씀해주신다면?
잘될 때는 안될 때를 염두에 두어야 해요. 특히 정상급의 연예인, 사업가, 아티스트들은 더욱 그렇죠. 한창 때 카루소 매장이 38곳이었던 시절도 있었어요. 본점 빼고 매출만 500억원이 넘었으니 엄청난 성공이었죠. 하지만 저는 사업가는 아니었어요. 계산에 약했던 셈인데, 중간에 이리저리 돈이 빠져나가는 걸 몰랐던 거죠. 그때 난 서울 컬렉션, 파리 컬렉션을 연이어 하고 전국 각지로 특강을 다니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그 사이 관리가 안됐던 거죠. 결국은 한날 한시에 모든 매장을 철수하고 사업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6개월 있다가 IMF사태가 터진 거죠. 그때 내 손에 없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 개인으로서 사업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죠. 그리고 전략을 바꿨어요. 바로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것’이었어요. 디자이너 장광효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 그게 홈쇼핑이었어요.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당시에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장광효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고요. 하지만 그 역시도 언젠가부터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나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은퇴를 하더라도 이어질 수 있는 좋은 일, 이를테면 장학재단을 통한 인재양성 같은 거죠.
Q 10년째 쿨가이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차승원 씨를 비롯해 유지태, 현빈 씨 등을 런웨이 모델로 캐스팅하며 데뷔시킨 안목도 있으시다고 알고 있고요. 멋있는 사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용기, 도전정신, 실험정신이 중요하죠. 저도 나이를 먹으니 어쩔 수 없이 안전지향적이 되긴 하지만, 젊은 친구들을 보면 다시 욕심이 생기기도 해요(웃음). 쿨가이 선발대회는 말 그대로 멋진 남자를 뽑는 콘테스트에요. 하지만 단지 잘생기기만 해서는 안 되요. 신체적인 건강함도 뒤 따라야죠. 사회에서 성공을 하려면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매력 있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하거든요. 실제로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실력이 없으면 안되죠. 실력이 없는 매력은 허당이거든요. 진정 멋진 사람이 되려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고 자기계발과 함께 운동도 병행해야 해요. 또 편협한 생각을 떨쳐내야 하죠.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아가 강한 친구가 있어요. ‘난 이것은 싫다’고 이야기하는데, 주관이 뚜렷하다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못나고 못하니까 싫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부자들이 향유하는 것, 잘난 사람들이 멋 내는 것을 싫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동경 하거든요. 정말 똑똑한 것은 싫어하는 것을 잘 하는 거죠. 조건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해요. 집이 가난하고 스펙이 없고, 외모가 떨어지고…, 그런 생각은 한없어요. 세상에 의외로 똑똑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노력하고 실력과 매너를 갖추면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Q 오래 전 젊은 ‘쿨가이’ 장광효라는 사람이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꿈은 키우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내가 고교시절만 해도 남자가 디자이너가 되는 건 상상을 하지 못했어요. 그저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막무가내로 원하는 것을 찾았던 거죠. 처음에는 서울대 미대 시험에서 떨어져 크게 낙담을 했어요. 그리고는 붓을 다 버렸죠. 상심이 그 정도였어요. 그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데, 같은 독서실 친구였던 손석희(JTBC 보도부문 사장,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76 동문)가 “국민대학교도 좋은 대학이니 같이 도전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석희는 국어국문학과, 저는 조형대학에 합격했고 학교도 같이 다녔죠. 돌이켜 보면 젊은 시기에는 친구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난 다행히 좋은 친구를 만났죠(웃음).
Q 선생님께서는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의상디자인학과 공부는 어떻게 하신 건지 궁금하네요.
그때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는 남자를 뽑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장님을 찾아갔죠. 제가 알기로 해외 유명 아티스트, 디자이너, 요리사는 다 남자니 남학생을 뽑아달라고 부탁 드렸어요. 공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이상하니 여자 공대생도 뽑아야 한다고 했고요(웃음). 일단 알겠다고 하셨고, 난 그 이후로도 학교를 다니며 계속 건의했어요. 결국 제가 3학년 때 의상학과가 남자를 선발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장식미술학과(현 시각디자인학과)를 들어가서 부전공으로 의상디자인을 했고, 결과적으로 전공보다 더 성공하게 된 거죠.
Q 손석희 앵커와의 기억을 더 말씀해 주신다면?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석희는 대학 다닐 때 구두 하나, 가방 하나로 버티고 졸업했어요. 겨울에는 재킷하고 진회색 바지, 여름에는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은 패션이었죠. 근데 참 담백했어요. 좋은 친구였고 향기가 있는 사람이었죠. 분야도 틀리고 전공도 다르지만 서로 어려울 때 만나서 그랬는지,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네요. 요즘에 만나도 ‘내가 네 친구라는 걸 사람들이 다 아는데, 멋진 옷 하나 만들어 줄 테니 입으라’고하면 싫다며 손사래를 쳐요(웃음). 아나운서 시절에도 다른 사람과 달리 그 친구는 메이크업도 안 해요. 피부가 좋아, 수려했죠. 우리 둘이 똑같이 동안이었는데, 지금은 석희가 더 늙었죠(웃음). 나도 대학 다닐 때는 멋있었어요.
Q 선생님의 학창시절 모습이 궁금합니다. 꽤나 멋쟁이였을 듯 한데요.
광교에 옷을 맞추는 단골집이 있었어요. 잡지 같은 걸 오려서 디자인을 바꿔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종종 맞춰서 입기도 했죠. 또 동대문에 가면 미군들 군용제품 파는 곳에서 군복을 염색해 입기도 하고요. 요즘은 밀리터리룩이라고 해서 군복을 그냥 입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안됐거든요. 그래서 영화 ‘닥터지바고’에 나오는 이끼 낀 녹색, 혹은 요즘 유행하는 버건디 컬러로 염색해 입고 다녔죠. 전령가방을 염색해서 도구, 옷감 같은 것도 넣고 다니고, 빈티지로 나름 멋 부려 입고 다니고 그랬죠.
Q 선생님께 가장 큰 영향을 주신 교수님이나 수업이 있다면? 그 이유는?
앞서 얘기한 배천범 교수님께서도 좋은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 시절 제 꿈을 크게 만들어 주신 분은 당시 조형대학 학장을 하셨던 김수근 교수님이셨어요. 조형론 수업을 그분께 들었는데, 내가 남자인데도 정말 멋지게 느껴지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교수님이 수업 중에 제게 “넌 목표가 뭐냐”라고 하셔서 “사실 전 목표가 없다, 적당히 살려고 한다”고 했더니 꿈을 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디자인을 전공했으니 부모님께 책 사본다는 구실로라도 돈을 타서 서울에서 제일 멋진 커피숍, 레스토랑을 가보라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가난하다고 빵집, 중국집만 다니고 좋은 것, 멋진 것을 보지 않고 꾸는 꿈은 허황이라고 하시더군요. 진짜 교수님이 일러 주신 대로 한번 해봤죠. 정말 다르더군요. 대학교 자판기 커피 맛과 호텔 커피 맛이 달랐고, 거기 오는 사람들의 패션, 선글라스, 구두…, 모든 것이 달랐어요. 그렇게 보고 다시 책을 보니 읽기만 해도 쏙쏙 들어왔어요. 그렇게 꿈을 키웠죠. 김수근 교수님뿐 아니라 조형대 교수님들이 그때 최고의 분들이셨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교수님들이었죠. 그래서 제가 감히 1류가 됐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좋은 교수 밑에 좋은 제자가 나오는 거죠(웃음).
Q 파리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 유학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떠난 유학이었는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치던 학교가 파리에 국립장식미술학교였는데, 시험에 합격하게 됐죠. 그런데 한두 달 지나니 매일 눈물이 나는 거예요. 향수병에 걸린 거죠(웃음). 보다 못한 교수님께서 여기서 괜히 힘들어하지 말고 자기가 학장으로 있는 파리 인근의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학위가 나오는 실기위주 학교였어요. 거기가 너무 좋았죠. 인근에 바르비종이라고 밀레가 만종을 그린 동네도 있었어요.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나와 밀레 생가를 한 바퀴 돌고 오곤 했죠. 그렇게 2년 정도 공부를 했죠.
Q 끝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다면?
세상은 다 살만해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즐겁게 일하느냐가 성공을 좌우해요. 꼭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진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줘요. 기왕이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뭔가 이루는 게 낫지 않겠어요? 자기가 전공한 걸 최대로 살리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성공하고 돈과 명예가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젊은 세대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물론 어려움은 있어요. 공부하고 직장을 얻고, 돈을 버는 것이 쉽지는 않죠. 저도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어요. 하지만 돈은 쫓으면 도망가더군요. 대신 일이 좋아 재미있게 하다 보면 돈을 벌게 되고요. 앞에서 이야기했듯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열정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돼 있어요. 좋아하는 기준이 되지 않고 고생 안하고 적당히 돈 벌 수 있는 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편협한 삶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봐야 허사에요.
장광효
카루소 대표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부회장
쿨가이 선발대회 10년 연속 심사위원
제 10회 서울패션위크 헌정디자이너 10인 선정
삼성 캠브리지 수석디자이너(전)
논노 수석디자이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