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영하고 있는 캘리그라피 아카데미 제자들과 함께 프로젝트 하나를 준비하고 있어요. 보통 캘리그라피 작업은 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제자들과는 아카데미 과정이 끝나면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서로 교류했던 기억과 인연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에 시작하게 됐어요. 우리끼리의 작업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대중들과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글을 써보자는 취지죠. 페이스북을 통해 저와 제자들이 글씨 작업을 거쳐 글을 올리는 방식인데, 페이스북 이름도 이미 정했어요. ‘마음 글밥’인데 어떠세요? 주로 사람들이 집을 나서는 아침 시간대에 글을 올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감동을 주려고 해요. 아침밥을 못 먹은 사람도 있을 거고, 전날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있을 테죠. 그런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캘리그라피 글귀를 생각하는 일은 떠다니는 먼지를 줍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요할수록 물소리는 더 커진다’는 글귀를 떠올렸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제가 쓴 <자연스럽게>라는 책에 넣은 글귀에요. 제가 산책을 좋아하거든요. 지인들과 가볍게 술 한 잔을 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 근처 하천 길을 산책을 하다가 떠오른 글귀에요. 한 밤중에 세상은 고요한데 유독 하천의 물소리만 굉장히 크게 들리더군요. 취중이면서도 떠오르는 글귀를 휴대폰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었어요. 마침 그날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세상에는 참 자기 자랑을 하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어요. 사실 저는 그런 것에 익숙지 않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 비해 전 그렇지 못하니,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런데 물소리를 들으니 ‘내가 지금 고요하게 있는 것은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일상을 살아가며 떠오른 생각이 작품으로 표출 된 경우죠.
일단 자기 자신을 한 발 짝 떨어져서 보는 객관성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도 제 글씨는 변화를 거치고 있어요. 과거에는 화려함에 치중했다면 요즘에는 아기자기해졌다고 할까요. 요즘 일부 작가들의 캘리그라피를 보면 글씨 자체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걸 느껴요. 잘난 척 한다고 해야 할지, 너무 드러내려고만 하다 보니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일단 그 대상에 대해서 관찰하고 탐구해야 한다는 거죠. 그냥 쓰면 단순한 글씨지만 좋은 캘리그라피가 되려면 내가 글씨로 표현하려는 어떤 대상, 혹은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싶다고 해보죠. 저는 그 사람의 성격과 미소, 눈물도 알고 있어요. 뭘 좋아하는지 사소한 감정까지도 알고 있죠. 그런 모든 것을 염두하고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을 유지하고 쓰다보면 캘리그라피에서 그 사람이 보이게 되요. 그게 가장 좋은 진정성 있는 캘리그라피죠. 저 같은 경우 작업 기간이 열흘이라면 그 중 7~8일 정도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면서 감정을 조절하는데 써요. 그런 습관이 돼 있으면 글씨를 보는 사람도 굉장한 공감을 하지 않을까요.
제 작업은 상업적인 작업과 개인적으로 감성을 추구하는 작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방식은 같아요. 글씨를 통해서 교감을 하는 거죠. 계속 변화하는 제 글씨지만, 마음이라는 일종의 화두는 변치 않아요. 상업적인 작업을 할 때도 그 작은 대상, 사물에도 생각이 있다고 가정을 해요.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뽑아내는 저만의 방식이죠.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글은 도구와 재료들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요. 재미있는 건 제가 ‘꽃’이라는 글자를 100번 쓴다고 할 때, 그 100가지 ‘꽃’이라는 글자가 다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글씨든 똑같이 쓸 수는 없어요. 다양한 소재로 글씨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죠. ‘산’이라는 글자를 쓸 때 제각기 다른 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꽃’ 역시도 바람에 흩날리는 꽃의 느낌을 담을 수가 있게 되거든요.
벌써 12년 전이네요. 광고 디자이너로서 삶을 계속 살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었나를 떠올려봤죠. 전 어릴 때부터 항상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글씨쓰기를 좋아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캘리그라피를 알게 됐죠. 이미 외국에서는 보편화 돼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태동 단계였거든요. 캘리그라피를 알게 된 순간 ‘번쩍’ 했다고 할까요. ‘과연 이걸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은 안중에도 없었어요(웃음). 당시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과연 캘리그라피가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였죠. 그런 울림을 느끼면서 시작했어요.
맞아요(웃음). 초창기에는 알리기 바빴죠. 수익 창출이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희소가치가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미쳐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욕심껏 캘리그라피를 알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죠. 처음에는 캘리그라피라는 단어 자체를 설명하기에 바빴어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법이 없었죠. 대뜸 ‘돈 좀 되냐’는 질문을 하니,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어요(웃음). 블로그를 통해서 알리기도 하고 상업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하면서 인식을 넓혀왔어요. 요즘은 그래도 많이 알려진 편이라 한결 수월하죠. 하지만 일장일단이 있어요. 어떤 분야든 대중화가 되면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거든요. 제자들 중에서도 과거의 저처럼 캘리그라피에 미쳐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물려주는 게 지금의 제 고민이에요.
캘리그라피는 기본적으로 상업성을 업고 시작이 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글씨 자체도 계속 변화를 거듭할 거고요. 그러면서 상업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대중들에게 뭔가 새로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감동적인 수단으로 진화해 나갈 거예요. 제 개인적으로는 ‘힐링 캘리그라피’라는 개념을 만들었어요. 글씨라는 것이 사람의 감정을 다스려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힐링 캘리그라피의 근본적인 정신은 나눔이에요. 이제까지 캘리그라피가 단순히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작업에 국한 됐다면, 힐링 캘리그라피는 마음을 연구하고 다스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향후 제 작업의 대부분은 힐링 캘리그라피가 될 거예요. 최근에는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힐링 캘리그라피 수업을 하고 있어요. 장애인 분들을 대상으로 한달 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 다음으로는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분들을 대상으로 할 예정이죠. 그런 식으로 차츰 힐링 캘리그라피를 통한 나눔 활동을 넓혀 갈 생각이에요.
한글은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치함의 대명사였어요. 촌스럽고 유치한 느낌이라는 거죠. 디자이너들이 그렇게 말하곤 할 정도였어요. 한글 대신 영어로 쓰는 게 더 세련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한때 통념이었고요. 그런데 그걸 깨기 시작한 게 캘리그라피거든요. 앞으로도 한글 글꼴연구는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하게 될 거예요. 결국 그런 열정은 개개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가면서 더 넓은 세계를 표현하게 될 거고요. 한글에 녹아 있는 천지인 사상, 애민 정신도 소중하지만 더욱 독특한 아름다움은 글의 획이 하나 바뀌고 꼴이 하나 바뀔 때마다 그 느낌이 굉장히 달라진다는 거예요.
가독성을 해치는 글씨, 내용하고 안 맞는 글씨는 참 안 좋은 글씨거든요. 그런 글씨가 많아지게 되면 결국 공해가 되요. 글씨를 쓰고자하고 캘리그라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면, 좋은 글씨를 쓰려고 하는 열정에 앞서 마음의 바른 자세를 유지를 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런 바탕에서 창의적이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듯이 미치면 누구나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단, 한글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중심은 잃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우리말이에요. 우리말에 이렇게 예쁜 말이 있을까 싶어요. 아카데미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때, 꽤 오래전에 제가 정해 놨어요. 뜻도 좋고 말도 예쁘잖아요. 노래 중에도 ‘내게도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라는 가사가 있잖아요(웃음). 오로지 한길, 하나의 세계를 지치지 않고 가겠다는 의미기도 하죠. 12기 째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그 의미를 계속 강조해 오고 있어요.
제자들이 왔다가 가고, 그러다 잊히고 한동안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너무 쓸쓸함을 느꼈어요. ‘가르치는 것이 체질적으로 안맞는가보다’ 해서 그만 둘 생각도 했었죠. 그러다가도 다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준비하고 하다보면 또 너무 좋더라고요. 제 감정은 뭔가 소통하고 나누고 싶은 거고 그래서 시행착오 끝에 한 기수의 아카데미 프로그램 기간을 초창기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고 주 2회로 횟수도 늘렸어요. 인원은 늘 10명 내로 하고요. 제 작업을 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에 많이 하진 못해요. 특히 저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 어려운 사람이거든요(웃음). 힐링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기존 캘리그라피 작업도 잠시 멈춘 상태고요.
제 경우는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았어요. 캘리그라피 작업을 할 때도 안 풀릴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아내가 ‘제일 처음 걸 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쓴 글씨를 보니 가장 좋은 작품이더군요. 학생들에게도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처음의 감정을 떠올려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꿈이 뭔지 모를 때는 어린 시절 자신이 어떤 부분에 재능을 보였는지를 떠올려보라는 거예요. 그런 것을 바라보게 되면 사람마다 자기만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글을 잘 쓰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대인 관계가 좋은 것도 재능이죠. 하지만 현재에 사회적인 고정관념에 얽매여서 자신의 재능을 잊고 산 것 뿐이에요. 그렇게 추리다 보면 현재의 내가 추구해야 할 꿈이 무엇인지 보일 거예요.
일단 첫 번째는 한글을 더 다양하고 아름답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즐거운 고민을 계속 할 거 같고요. 두 번째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고정화 돼 있는 글씨의 틀을 깨고 싶어요. 그런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줄 수 있었으면 해요. 다채롭고 따뜻한 저만의 캘리그라피를 대중들에게 선물하는 것,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게 제 목표죠.
[캘리그라피스트 박병철]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글판 제작,
2010년 중학교 국어교과서, 영어교과서 작품 등재
서울시 초등학교 디자인교과서 작품 등재
관악구청 글판, 부산시청 글판, 우리은행 글판 을 비롯해
각종 제품 B.I와 브랜드, 광고, 달력, 출판물의 표지를 장식한 글씨와 글 제작
2011년 박병철의 캘리그라피 이야기 <자연스럽게> 출간
2012년 박병철 단상집 <마음낙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