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시키는 대로 발걸음을 내딛으라! 세계 최대 컨설팅 펌 델로이트 시애틀 본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상인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 04학번)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유명한 시애틀은 60만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미국 북서부의 최대 도시이다. 백인 이주자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았는데, 1853년 이곳에 머무르던 추장의 이름을 따 지금의 ‘시애틀’이 되었다.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 연안의 상업과 조선산업의 중심지이다. 세계 최초 인터넷서점인 아마존, 세계 항공 우주산업의 핵심인 보잉, 세계 최대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 세계 50여 개국에 수많은 매장을 가지고 있는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등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 시애틀에 있는 세계 최대 컨설팅 회사 ‘델로이트(Deloitte)’에서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 전, 나는 디자이너를 꿈꿨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등학생 시절 논술 공부를 위해 읽던 신문에서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지오 알마니가 백발머리로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는데, 순간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멋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사진 한 장이 내게 살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듯했고, 막연하게 나도 조르지오 알마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002년부터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2004년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해 신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군대를 갔고, 제대 후에는 아버지 회사의 디자인 업무를 도와드렸다. 실제 업무를 접해보니 이번엔 더 큰 무대로 나가 내 재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당시 내가 생각한 무대는 뉴욕이었다. 나는 결심이 서자 곧 유학준비를 시작했고, 2008년 뉴욕의 SVA(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에 편입학 하게 되었다.

마치 사진 한 장이 내게 살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듯했고, 막연하게 나도 조르지오 알마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TIP 유학 생활도 첫 술에 배부르지 않다

다양한 인종과 낯선 문화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영어로 진행해야 하는 발표수업도 내겐 큰 부담이었다. 한국에서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내가 파란 눈의 친구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한번은 독감에 걸렸는데, 당시 학생 보험이 있음에도 영어 울렁증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했다. 결국 폐렴으로 두 달이 넘도록 앓아눕기도 했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 1년이 지나 졸업반이 됐을 때는 어느 정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교수님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졸업 즈음에는 뉴욕 디자인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내 포트폴리오 담당 교수님이었던 폴라 셰어(Paula Scher) 교수님 지도를 받아 현재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디지털 디자인’을 알게 됐다.

전쟁 같은 신입 시절, 그러나 반드시 돌아오는 보답

졸업 후에는 나이키, 마스터카드, 골드만삭스 등 세계적인 회사들의 UX/Digital 디자인을 도맡아 하는 R/GA(알쥐에이)에 입사했다. 하지만 취업만 하면 끝일 것 같았던 내 예상은 고스란히 빗나갔다. 누군가의 말처럼 대학 졸업이 고생길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학생 수준의 회화능력으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던 각종 회의와 프레젠테이션, 전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이 매일같이 벌이는 경합은 검투사들의 진검승부를 방불케 했다. 처음 유학 왔던 그날처럼 심신은 지쳐갔지만,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니 2년 뒤 R/GA의 리드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R/GA에서 2년간은 내겐 운동선수들이 비시즌기에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어두듯, 디자인의 기본기를 쌓는 시간이었다.

심신은 지쳐갔지만,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니 2년뒤 R/GA의 리드 디자이너가 되어있었다.

리드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는 삼성, 빅토리아 시크릿,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삼성 홈페이지 리디자인 작업과 마스터카드의 뮤직 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일이었다. 삼성 프로젝트의 경우 고국의 일등 제품을 해외에 소개하는 일이니 그 어떤 작업보다 뿌듯함이 컸다. 마스터카드의 뮤직앱은 전 세계 프로페셔널들이 인정해주는 깐느 광고제(Cannes Creative Festival)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TIP 일 외 뜻깊은 곳에 ‘재능’을 사용하라

회사생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고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여전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는 ‘K/REATE(2012)’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전시와, 광복절 타임스퀘어 이벤트가 첫 사업이었다. 지인들과 뜻을 모으다 보니 점점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주어, 지금은 명실상부한 뉴욕의 대표 크리에이티브 단체로 자리 잡았다. 크리에이트는 현재 뉴욕을 비롯한 미국 각지에서 1년에 10회 정도 한국과 관련된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있다. 고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시작한 이 일은 카림 라시드,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같은 거장들과도 인연을 맺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오른쪽 위안부헌정 전시 포스터 왼쪽 위안부헌정 전시 포스터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

제2의 도약, 델로이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지난여름 나는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세계 최대 컨설팅 회사 델로이트(Deloitte)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델로이트의 본사 시애틀에 있는데, 시애틀의 회사들은 일반 비자로는 취업이 어려워 외국인이 취업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새로운 타이틀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니 사실 꿈만 같다.

이곳에서는 현재 BMW 부서의 디자인을 리드하고 있다. BMW의 모든 디지털 미디어 모체가 될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기회가 왔을 때 가슴이 시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새로운 환경과 주어지는 직무들은 나를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의 ‘종’이라면, 그 종이 가진 소리의 깊이는 부딪쳐 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세게 부딪쳐야만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는 법’이다. 내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글을 읽는 후배들에게도 아버지의 조언을 꼭 들려주고 싶다.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가 부딪쳐보라. 그러면 당신의 종소리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울려 퍼질 것이다. 당신이 부딪치기 전까지는 당신의 종이 어떤 소리를 낼지 절대 알 수 없다.”

이상인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 2004학번
SVA(School of Visual Arts) 2011년 졸업

2008년 8월 ~ 2014 7월 뉴욕 거주
2014년 7월 ~ 현재 시애틀 거주

2011년 7월 ~ 2014년 6월
뉴욕 인터렉티브 디자인 에이전시 R/GA 비쥬얼 디자이너 근무

2014년 7월 ~ 현재
Deloitte ACD(Associate Creative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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