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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STYLE 기억을 걷는 공간 공간사옥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한다는 것은 얼마나 치열하고 집요한 작업인가. 고(故) 김수근 건축가(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초대학장)가 설계한 공간사옥에서 스타일의 영감을 찾는 여행을 떠났다. 김수근 건축가의 제자인 이공희 교수(건축학부)가 이 여행길의 가이드를 자처하고, 차세대 공연예술인 김차웅(공연예술학부 17학번)·김정연(공연예술학부 19학번) 학생이 그 여정을 함께했다.

현대 건축의 선구자이자, 조형대학의 창시자

김수근 건축가는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맞이한 한국의 근대화·산업화 시대, 서양의 모더니즘에 한국적 전통을 건축물에 접목한 예술가다. 우리는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경동교회, 불광동 성당, 아르코미술관, 올림픽주경기장 등)을 다행스럽게도 만날 수 있다(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몇몇 건축물은 재개발로 사라지거나 리모델링됐다). 그 중 공간사옥(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은 김수근 건축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1년 지어진 공간사옥은 김수근설계사무소이자, 70년대 문화운동의 발원지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김수근 건축가가 기획한 예술종합월간지 <공간(空間)>이 창간된 곳이자, 동시대의 미술, 연극, 영화, 춤 등 다양한 예술 장르가 발표되며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주목받는 꿈의 무대이기도 했다.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으며,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인수해 김수근 건축가를 기억하는 공간이자, 현대미술작품 컬렉션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 1980년대 초 <타임>지에 소개되었던 김수근 건축가. 당시 일본 기자가 촬영했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앞에 있는 김수근 건축가 흉상

2월 겨울의 끝자락, 공간사옥 앞에 김차웅·김정연 학생이 섰다. 김차웅 학생이 김정연 학생에게 공간사옥의 특별한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말하자, 김정현 학생이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김수근 건축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수근 초대학장은 국민대학교의 건축학과, 의상학과, 장식미술학과, 생활미술학과를 통합해 국내 최초로 조형대학을 신설했다. 국민대학교는 건축, 디자인, 공예 분야를 통합한 디자인 대학을 선보이며 1970년대 당시 학계와 산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공희 교수가 들려주는 우리가 사랑한 건축가

국민대학교 건축대학에는 김수근 건축가를 기억하는 특별한 분이 있다. 국민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고 현재는 후배를 제자로 가르치는 이공희 교수다. 오늘 이공희 교수가 대학 시절 만나 뵌 김수근 건축가에 대한 기억과 공간사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공간사옥을 둘러보기 전, 이공희 교수가 김차웅·김정연 학생에게 질문한다. “공간을 평상시에 어떻게 바라보나요?”

▲ 김정연(가운데) 김차웅(오른쪽) 학생이 이번 정릉 STYLE의 가이드인 이공희 교수(왼쪽)를 맞이한다.

김차웅 학생은 ‘공간은 각기 분위기가 다른 곳’, 김정연 학생은 ‘비울 수 있고 또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이공희 교수가 공연예술학부 학생들의 전공에 대입해 공간에 대해 설명한다. “건축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없어진 건물들도 우리 기억에 남아있죠. 공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영화를 예로 들자면, 액션이 주를 이루는 영화에서는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잔잔한 서사가 돋보이는 영화는 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요. 관객이 영화를 인식하는 그 기운 같은 것을 공간과 연결하면 쉽게 이해되는데요. 지금부터 공간사옥을 살펴보면서 김수근 건축가가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는지를 상상하며 보길 바라요.”

자연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공간으로

이공희 교수와 김차웅·김정연 학생이 공간사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공간사옥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에요. 자, 지금부터 영화가 이 마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원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예전에 공간사옥 관계자가 손님을 환영하고, 손님들은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는 웨이팅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잠깐 주변을 둘러볼까요? 우리가 공간사옥 내부에 들어왔는데도 외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외부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부에 있는 기분이 들지 않나요? 반공간(무한 평면만을 경계로 하는 공간)인데요.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도시로부터 건축으로 다다르게 되는데 공간사옥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건축물과 도시의 경계에 들어와 있어요.”

▲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공간사옥(사진제공: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 제주 전통 가옥의 대문을 모티프로 꾸민 계단 입구. 벽돌의 양 옆 둥근 홈에 삼나무를 걸치면 제주도의 대문 정낭이다
▲ 공간사옥의 지층에서 바라본 마당

두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의 기운과 인공 건축물이 하나의 겹으로 만나있는 공간을 인지한다.
도시가 자연이라면, 도시를 자연으로 인식하고 시작되는 건축. 건물인지, 자연인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이 모호함이 공간사옥에서 감동하는 첫 포인트다. 외장 벽돌을 감싸는 담쟁이덤굴이 겨울의 색으로 변해 겨울 숲을 연상시키는데 봄·여름에는 초록의 숲이, 가을에는 붉은 숲이 건물을 감싼다고.

직각에 순응하지 않은 모태적 공간

이공희 교수와 두 학생이 낮고 좁은 계단을 올라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이 걸린 공간으로 들어섰다. 김정연 학생이 “확 트인 공간이네요.”라고 말한다. 이공희 교수가 이번에는 영화 연출에 비유한다. “우리가 낮고 좁은 계단을 타고 지금 이곳으로 올라왔잖아요. 층고가 낮았다가 높아지는, 막혔다가 열리는 경험을 했는데 김수근 건축가가 수축됐다가 이완되는 건축 연출을 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김수근 건축가께서는 건축의 본질이 공간에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공간사옥을 좋은 건축물이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좋은 건축물이란 무엇일까요?”

▲ 한 사람이 겨우 이동할 수 있는 너비의 계단이 숲처럼 연결돼 있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한 층에 한 개의 바닥으로 구성된다. 서류상 등록된 건물의 규격화된 정보는 ‘지하 O층, 지상 O층’. 그런데 공간사옥은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이지만 22개의 바닥으로 설계된 세상에 없는 특별한 건축물이다. 상업화라는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똑같은 형태로 재단되어 찍어내는데 김수근 건축가는 이 특별한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집요하게 탐구했고 답을 스스로 얻기 위해 그 질문에 매달렸다.

▲ 산도를 통과하듯 낮고 좁은 계단을 지나면 빛 우물에서 햇볕이 쏟아지는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한다
▲ 하나의 층에 세 개의 바닥을 구성해 독특한 리듬감을 부여했다

“공간사옥은 김수근 건축가가 자신만의 독보적인 건축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가 느껴지는 건축물이에요. 그 노력은 김수근 건축가의 의도이고, 그 의도는 사유에서 시작된 것이며, 다시 말하자면 철학인 것이죠. 김수근 건축가의 공간 철학은 ‘궁극적인 공간’이에요. 제가 건축을 공부하던 학부 시절, 국민대학교 신문에 김수근 건축가가 밝힌 공간에 대한 철학이 제 마음속에 새겨있어요. 궁극적인 공간은 모태적 공간(Womb Space), 즉 어머니의 공간이다. 우리는 빛 하나 없는 작은 공간에서 자라 세상으로 태어났는데 이 모태적 공간을 현세에 만들면 최고의 공간이 아니겠는가. 당시 저는 그 기사를 읽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김수근 건축가가 만들려고 했던 공간이 어머니의 작은 공간, 즉 ‘인간의 근원’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경동교회, 마산 성당, 불광동 성당 등은 불규칙적인 형태인데 직각에 순응하지 않죠. 오히려 직각이 아닌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죠.”

오롯이 새겨진 공간의 기억

이공희 교수와 학생들이 24개의 슬라브로 설계된 공간사옥을 둘러본다. 층층이 연결된 8층 구조의 계단, 미로의 방처럼 계단과 계단 사이, 층과 층 사이에는 비밀 같은 공간들이 숨어 있다. 각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재미있고 경이로운, 이 세상에는 없는 김수근 건축가만의 건축 스타일이다. 김정연 학생이 이공희 교수에게 김수근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 계단과 계단 사이 미로 같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 (사진제공: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김수근 건축가는 건축이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고,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죠. 조형대학 입학식 때 뵌 김수근 건축가의 첫인상은 보통 교수님하면 떠오르는 그런 근엄한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어요. 마이크 앞에 서서 디자인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한테는 건축을 잘하는 방법으로 들렸어요. 먼저 미치도록 사랑해야 한대요. 그러다가 싫어하는 시기, 그걸 전문용어로 권태기라고 하죠. 권태기 그다음은 다시 좋아하는 마음이 된대요. 그러면 그때 비로소 건축가가 되어 있다고 해요. ‘사랑하라, 죽도록 사랑하라. 미워한 다음에 다시 사랑하게 되면 진짜 건축가가 되는 것이다’ 국민대학교 건축학부 김수근 교수님께 건축가가 하는 일에 대해 배웠고, 지금은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학생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요. 정말 오랜만에 공간사옥에 왔는데요. 다른 건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세 가지는 기억이 생생해요. 건축은 형태에 있지 않고, 공간에 있고, 공간은 기억의 장소이니까. 이 건물이 지금 무엇이든 간에 공간에 대한 기억은 저한테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공간사옥이 미술관이 됐지만 좀 덜 서운해도 되는 거 같아요.”
이공희 교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공간사옥의 공기가 봄의 초입에 다다른 듯 따뜻해진다. 조금 분위기가 숙연하다. 이공희 교수가 쑥스러운 듯 앞장서 지하 소극장으로 내려가자고 한다. 이번에는 공연예술학부생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공간이란다.

▲ 한국 전통 예술가들의 데뷔 무대였던 소극장, 공간사랑. 현재는 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열 평 남짓의 소극장, 공간사랑이다. 김차웅 학생이 국민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공간사랑에서 연극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김수근 건축가는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에 착안해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공연장을 설계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고(故)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의 첫 공연이 공간사랑에서 열렸고, 세상에 알려졌다.

▲ 김차웅,김정현 학생은 공연예술학부 전공생답게 소극장 무대 설계와 관련된 질문을 했다

“건축은 시대에 모든 총량을 담고 있죠. 김수근 건축가는 공간사옥을 설계하실 때 전통, 문화, 사람도 그 안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공간은 열 평이지만, 열 평이 갖는 힘은 10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곳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공간사옥을 나서는 길, 김차웅 학생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써 공간을 느끼는 특별한 하루였다고 감상을 말한다. 김정연 학생은 건축과 연극이 ‘시대를 담는 거울’이라는 공통분모를 알게 되어 건축이 더 친근해졌다고 한다.

켜를 쌓아 공간사옥을 휘감은 담쟁이덩굴이 이제 막 초록색 잎을 틔우는 봄이다. 공간사옥에서 김수근 건축가가 집요하게 매달린 독특한 스타일과 그 결과물이 무엇인지 국민*인들이 꼭 느껴보길. 그 영감이 국민*인의 마음에 닿아 꿈을 그리는 지도에 영감을 주는 값진 여정이 되길.

주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83
문의 02-73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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