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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STYLE

정릉동 역사학개론의 출발점, 정릉

한국역사학과 황선익 교수, 김세범·신유현(19학번) 학생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정릉에 사는 서연은 건축학개론을 강의하는 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정릉이 누구 능이야?” 서연이 답한다. “정조, 정종, 정약용?” 정릉은 익숙한 지명이지만 정작 그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황선익 교수와 김세범·신유현 학생이 역사학의 관점에서 정릉을, 더 나아가 정릉을 품고 있는 정릉동을 살펴봤다.

정조, 정종 아니고 정약용은 더 아니고, 신덕왕후 강씨!

<uniK>가 국민대학교 주변의 숨은 명소를 찾아 소개하는 정릉 STYLE을 연재한 지 어느덧 2년이다. 이번 호 정릉 STYLE은 그 의미가 더 특별하다. 드디어 정릉을 찾았기 때문이다. 황선익 교수가 정릉 안내소가 세워진 진입공간에서 김세범·신유현 학생에게 정릉을 간단히 소개한다.

▲ 정릉동 지역의 어린이들이 단풍놀이를 하기 위해 정릉을 찾았다

“ 정릉, ‘능’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덤’이겠죠.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되는데 그중에서도 능은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칭합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입니다”
신유현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질문한다. “교수님, 계비란 무슨 뜻인가요?”
“계비는 ‘왕비의 지위를 잇는다’라는 뜻입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의 두 번째 왕비죠.”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이 개국되기 1년 전에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신덕왕후 강씨가 1392년에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른다.

신덕왕후 강씨를 만나러 가는 길

조선왕릉은 공간의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 등 세 공간으로 나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킨 것이다.
황선익 교수와 두 학생이 봉분이 모셔진 능침공간으로 가려면 진입공간과 제향공간을 우선 지나야 한다.

▲ 금천교를 건너면 제향공간과 능침공간이 있는 왕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작은 돌다리 하나가 보인다. 이 작은 돌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하는데 금천교를 건너면 왕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속세의 공간과 왕의 공간을 나누는 상징적인 공간이 바로 금천교다. 금천교를 건너면 제향공간과 능침공간이 있는 능역에 들어서게 된다. 황선익 교수가 앞장서 금천교를 건너자 두 학생이 뒤따른다. 이번에는 하늘을 향해 솟은 붉은 기둥으로 된 문이 있다. 붉은 기둥 문 앞에 서자 한국역사학과 전공생답게 김세범 학생이 “우리가 지금 홍살문(紅箭門) 앞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신유현 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황선익 교수에게 조선왕릉의 능과 비교해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진입공간과, 제향공간, 능침공간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일반적인 조선 왕릉에 비해 정릉은 금천이 꺾어지면서 동쪽으로 흐르는 구조이고, 홍살문도 정릉쪽에서 보면 기역 자로 꺾여 들어가는 구조다.

▲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붉은 기둥의 홍살문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정릉이 다른 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아요. 꺾어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죠. 다른 능과 대비되는 뚜렷한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도 마찬가지죠.” 이번에는 김세범 학생이 질문한다. “교수님, 향로와 어로의 높낮이가 다른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 정자각에서 일직선으로 봉분이 작게 보인다

향로는 왼쪽으로 높게 난 길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향로 옆에 높이가 낮은 길이 어로다. 어로는 왕이 가는 길 또는 산 사람이 가는 길이다. 황선익 교수가 두 학생을 이끌고 어로를 따라 정자각(丁字閣) 앞에 선다. 드디어 봉분을 일직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둥근 봉분이 보이자 황선익 교수가 정릉의 주인인 신덕왕후 강씨와 태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들의 첫 만남, 사랑 이야기란다.

중구 정동 사대문 안에 지은 능

“이성계가 사냥하다 목이 말라 물가에 갔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기르고 있었죠. 물을 달라고 하니 그 여인이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냈어요. 이성계가 잎을 띄운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물을 마시면 몸을 해할까 그랬습니다’라고 말하죠. 이성계는 여인의 지혜로움 면모에 반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신덕왕후 강씨입니다.” 신덕왕후 강씨는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결탁했고, 신덕왕후 강씨는 향처(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경처가 되어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를 낳았다.

▲ 태종의 훼철 명령으로 모진 풍파를 겪은 정릉.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를 대하는 애틋한 마음은 능을 짓는 과정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 정릉이 있던 자리는 중구 정동이었습니다. 지금의 덕수궁 옆자리, 그것도 바로 궁궐 옆에 지었는데요.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첫 번째로 지은 능으로 규모가 무려 1만 평에서 4만 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원래 사대문 안에 능을 두면 안되는 불문율이 있어 신하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태조는 듣지 않았다고 해요.”
이세범 학생이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인지 묻는다.
“정릉(貞陵)의 ‘정’자와 정동(貞陵)의 ‘정’자는 같은 한자입니다. 정동에 있었던 정릉이 지금 자리로 오면서 이 지역의 명칭이 정릉동이 된 것이죠. 정동과 정릉은 인연이 깊은 동네라고 할 수 있어요.”

태종의 명으로 정동에서 정릉으로

드디어 두 학생이 기대하는 봉분에 오를 차례다. 일반 관객에게 봉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특별히 국민대학교 학생들을 위해 봉분에 오르는 것을 허가했다. 숲속으로 난 오르막길을 약 5분 정도 오르면 능침공간인 봉분에 오를 수 있다. 신유현 학생이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릉의 첫인상을 말한다. “조선왕릉의 다른 능에 비하면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한 것 같아요.” 정동에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규모가 1만 ~ 4만 평에 이르렀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일반 관객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능침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오르막길을 오르면 봉분이 나온다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를 사랑한 만큼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그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어요. 신덕왕후 강씨는 호전적이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로 이방원에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했고,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인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지지기반을 마련합니다. 결국 이 사건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불씨가 되죠. 방석과 방번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태조가 죽고 나서는 정릉을 훼철합니다.”

▲ 봉분에서 바라본 정릉의 가을 뷰,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고루 심어 조경하고 있다

정동에 있었던 정릉은 태조의 릉인 건원릉(健元陵)보다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석의 지름이 10m 가까이 될 정도로 웅장했다고 전해진다. 태종은 정릉의 봉분을 낮추고 석물을 땅에 묻으라고 명한다. 정릉의 웅장했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봉분 앞에 설치된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장명등이다. 봉분에는 장명등 외에 혼주석, 고석 등이 있는데 이 석물들은 예전 그대로의 것을 지금 자리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 봉분 앞 가운데에 있는 것이 장명등이다. 장명등은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의 능원 양식을 보여주는 석물이다

“정릉을 온전하게 보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정릉과 함께 청계천의 광통교를 둘러보길 추천합니다. 청계천 광통교 벽에 설치된 문양 있는 돌들은 정릉에 있었던 석물을 가져다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태종은 흙으로 만들었던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떠내려가자 흙에 파묻었던 석물을 파내어 광통교 복원에 썼다. 백성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왕릉의 석물을 발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한 것이다.

천, 능, 산, 세계유산 그리고 청춘이 있는 정릉동

제향공간, 능침공간까지 돌아본 황선익 교수가 진입공간에 설치된 세계유산 석상 앞에 섰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조선왕릉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40여 개 능으로 구성된 조선왕릉은 2009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죠.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 발전을 보여주는 ‘탁월하고 보편적인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녀야 합니다.”

▲ 정릉의 봉분 역시 조선왕릉의 능원문화를 보여준다.
봉분 앞에 놓인 것은 혼유석(魂遊石)이다. 왕의 혼이 노니는 곳으로 석상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왕릉은 세계유산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 바로 자연 친화적인 장묘문화, 오백 년 이상 지속된 한 왕조의 능원문화, 조상을 숭배했던 전통문화다. 조선왕릉과 관련해 능을 만드는 과정(장례부터 빈소, 능원, 유지까지)이 기록되어 있는 조선왕조 의궤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 황선익 교수가 세계유산으로서 조선왕릉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황선익 교수가 여기에 하나 더 정릉동의 또 다른 지명인 ‘길음’에 대한 유래도 더한다.
“정릉이 있는 이 산을 넘어가면 정릉천이 흐르죠. 정릉천은 물이 맑기로 소문난 곳이었는데요. 북한산에서 정릉천으로 물이 내려갈 때 돌과 모래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고와 ‘좋은 소리가 들린다’라는 의미에서 ‘길음(吉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정동에서 정릉으로 능을 이장했을 당시에는 이곳 지명이 모래 사(沙) 자를 써서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불리기도 했죠. 천, 능, 산이 아름답게 잘 어우러져 있는 곳이 바로 국민대학교가 있는 정릉동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정릉동. 정릉의 이야기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길음과 정릉동의 유래도 알고 나니 이 지역이 맑은 물살에 둥글게 깎여진 몽돌처럼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두 학생도 정릉은 물론이고 정릉을 품고 있는 정릉동의 매력에 푹 빠진 듯하다.

▲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자신이 사는 동네 정릉동을 여행한다 ©네이버영화

정릉은 국민대학교에서 1213번 버스를 타고 정릉2동주민센터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건축학개론>의 서연과 승민이 사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사진 여행의 출발 지점이었던 정릉. 국민인도 정릉동 여행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출발지는 정릉에서부터다.

정릉
주소 서울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
문의 02-735-2038
관람시간 6:00 - 17:30(11월~1월)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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