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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시공간을 변주해 펼쳐지는 예술가의 우주 현대미술가 김아영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97학번 ※ 이 이미지는 작가가 페이스 필터의 특징을 살려 직접 제작, 게재를 요청한 이미지다. 비전형적인 구도와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의 철학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김아영

김아영 작가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물질 앞에 ‘예술’이라는 도구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공간을 변주해 펼쳐지는 사변적 픽션 속 김아영 작가의 고요한 우주에 손을 뻗어 보았다.

사변적 픽션의 세계로

김아영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VR 기기 없이도 그의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서울의 중심가, 오랜 역사와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에 자리한 스튜디오는 발을 내딛는 순간 70년대 과거로 이동하는 느낌이었고,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은 현실로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컴퓨터와 음향 장비, 수많은 파일과 보드에 빼곡하게 적힌 각성 같은 문장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세계관을 담은 소우주를 잉태하고 있다.
지난 3월 막을 내린 부산현대미술관 《그 후, 그 뒤,》에서 선보인 <수리솔: POVCR>은 재작년 부산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의 스핀 오프 버전으로, 인류가 해초 다시마를 발효해 바이오 연료를 사용하는 미래가 배경이다. 다시마 양식과 바이오매스 공정을 통합 관리하는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는 예멘 출신 이주자 연구원 소하일라가 근무하고 있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능세계가 제시된다.

<수리솔: POVCR>의 본편인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는 소하일라가 AI 수리솔의 보고를 듣고 정찰하는 과정 중에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코로나19 시대 이주자가 겪는 현재의 상황을 병치해 그려냈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는 다공성 계곡에 사는 신화적 존재 페트라가 이주하면서 겪는 험난한 여정(이주, 심사, 감시, 수감, 탈출 등)이 펼쳐진다.

▲ 신화적 존재인 페트라도 이주를 위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다공성 계곡2: 트릭스터 플롯> ©김아영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는 ‘난민화’와 ‘이주’는 그가 다루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만의 방식이 흥미롭다. 가정을 문제로 제시하고 그 문제를 푸는 사변적 픽션(speculative fiction) 장르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변적 픽션은 현실의 이슈를 조금 더 비틀어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합니다. 거리두기가 가능한 장치적 효과와 일종의 대안 세계를 제시해 여러 가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해요.”

▲ 김아영 작가는 STRP Festival 2022에서 수리솔 수중 연구소를 안내하는 렉처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김아영

현재 대만 타이중의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 울산시립미술관 개관전시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 난징 G 뮤지엄의 《시간이 돈이라면, ATM은 타임머신인가?》 등의 전시에 참여 중인 그는, 4월에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열리는 STRP Festival 2022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를 공개할 예정이다. VR챗(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수리솔 수중 연구소의 투어 가이드가 되어 관객을 맞이하며 연구소 업무를 소개하고 그 세계 속으로 이끄는 렉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 퍼포먼스에서는 다양한 현실이 중첩된다. 관객이 모인 오프라인 장소에서 그가 VR 헤드셋을 쓰고 무대에 서는 실제 현실, VR챗 플랫폼에 접속해 아바타의 상태로 관객과 소통하는 가상현실, 이러한 과정을 라이브 스트리밍 상태로 송출해 세계 곳곳의 관객에게 제공하는 온라인 현실 등 세 겹의 현실이 동시에 벌어질 예정으로, 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온라인으로 접속해 사변적 이벤트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https://strp.nl/program/scenario-16)

가능세계를 현실로 끌어내는 사람

그는 동시대의 다양한 이슈를 다루는 작가로 유명하다. 2007년에 뉴스에 보도된 사건들을 무대 장치로 재구성하는 사진 콜라주 <이파메랄 이페메라>로 현대미술계에 데뷔한 후에 영토 제국주의(<PH 익스프레스>), 석유 에너지(<제페트, 그 공중공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한국의 비틀어진 근현대사(<돌아와요 부산항에>), 자본과 정보의 이동(<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인간의 재난(<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 등 다양한 주제를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의 작업으로 선보였다. 그의 시선은 외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외국으로 이동했고,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하며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 들여다보기 위한 자신의 감각을 키웠다.

▲ 영국 해군이 불법 점령한 거문도 사건을 담은 <PH 익스프레스> ©김아영

“작가는 끊임없이 고군분투해 결과를 도출해 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고 가서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의미 있는 작업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관점을 예리하게 벼리고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중요한데, 매일매일 어떤 종류의 상황에 반응하는 레이더와 센서가 미세한 자극에도 반응하도록 늘 켜져 있어야 해요. 소설가들이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며 창작활동을 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모든 예술가는 매일매일 꾸준히 생각을 쌓아 그것을 작품으로 연결해 냅니다. 저 또한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주기적으로 운동하고, 뉴스를 꼼꼼하게 보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탐독해요. 제 머릿속에 있는 가능세계들을 현실로 끌어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노력이에요.”

▲ 미디어에 노출된 사건을 수집해 재현한 <이파메랄 이페메라> 중 “템즈강에서 머리 없는 시체 발견 2007.4.21.” ©김아영

‘가능세계를 현실로 끌어내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얻기까지 그는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 학부 시절에는 다양한 외부 모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이어가며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시종일관 고민했고, 졸업 후에는 다양한 디자인 회사에 소속되거나 소속되지 않은 상태의 디자이너로,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세상에 대해, 살아감의 조건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날, 해 오던 모든 일을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해 영국으로 떠났다.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온전히 스스로 생산 가능한 작업이라고 믿었던 사진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대학에 편입해 현대사진을 공부했고, 순수미술로 석사 과정을 마치며 자연스럽게 현대미술가가 됐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함 속에서 파리, 베를린, 서울, 런던 등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2010년에는 영국 로얄 아카데미 오브 아트로부터 브리티쉬 인스티튜션 어워드를, 2015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201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상의 후원 작가로 인정받으며 작품 활동을 지속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가능한 많은 일에 호기심을 갖고 두드려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낯선 장소에 가보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후에야 내면의 센서를 예리하게 작동시킬 수 있어요.

연차를 쌓는 직장인처럼 예술가들도 그에 따른 연차를 쌓게 된다는 그. 15년을 치열하게 작업한 덕분에 이제는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며 예술가의 작업은 ‘정신적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일’,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기능 없는 일을 관장하는 분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신적 사치의 큰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세상의 보편적 조건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고도 한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결국 어느 순간 본인의 작업이 기업이나 집단에 귀속된 노동이자, 자본을 유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창작가로서 깊은 고민의 결과물이라 여기면서도 작업의 결과물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다가 보면, 스스로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 생산해 낸 결과물을 꿈꾸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단기간에 순발력 있게 진행하는 일들보다 긴 호흡으로 풀어내는 일에 끌리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친구들이 있다면 저는 가능하면 학부 기간에 쓸모없는 짓을 많이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본인 스스로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지 않으면 평생이 힘들어질 수 있거든요. 가능한 많은 일에 호기심을 갖고 두드려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낯선 장소에 가보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후에야 내면의 센서를 예리하게 작동시킬 수 있어요. 스스로를 가장 흥분시키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저의 경우에는 거기 다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술가가 우주를 완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은 창작을 향한 열망보다는 예술이라는 세계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용기가 아닐까. 그 용기로 단단한 예술을 완성하는 자의 우주는 위엄이 있고, 우아하고, 고요하다. 김아영 작가의 내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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