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리는 10월의 어느 날, 정선태 교수(국어국문학전공)와 K*reator 박지호(자동차IT융합학과 17학번), 서민정(스포츠산업레저학과 18학번) 학생이 심우장(尋牛莊)을 찾았다. 심우장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불교 승려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지은 집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서도 독립에 대한 신념을 지켜낸 한 남자의 강건한 삶이 투영된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을 추억했다.
정선태 교수와 K*reator 박지호·서민정 학생이 성북동의 만해산책공원 앞에 섰다. 만해 한용운 동상과 시 <님의 침묵>이 전시된 만해산책공원은 심우장으로 가려면 거치게 되는 곳. 박지호·서민정 학생이 맑은 목소리로 정선태 교수와 인사한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가 둘러볼 곳이 심우장이죠?” 정선태 교수가 만해 한용운 동상과 <님의 침묵> 이 새겨진 석상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만해산책공원의 계단을 올라가면 만해 한용운이 집이 완성된 1933년부터 세상을 떠난 1944년까지 살았던 심우장이 있습니다.”
정선태 교수의 안내로 K*reator가 만해산책공원의 계단을 오른다. 계단 정상에 오르면 전봇대 표지판에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라는 표시가 있고, 산비탈 오르막길을 따라 양옆에는 작은 집들이 있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아기자기한 골목길, 가드레일에는 만해 한용운의 어록이 적힌 팻말과 연등이 걸려있다. 가드레일을 따라 몇 걸음 걷다 보니 심우장 앞이다. 정선태 교수와 K*reator가 대문을 열고 심우장을 바라본다. 기와집을 얹고 있는 소박한 5칸 한옥. 만해 한용운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시베리아, 만주를 거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고 백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한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었다.
“심우장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심우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지요.”
만해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본성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자기수련은 물론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
문예창작부 동아리 부장으로 활동하는 박지호 학생은 이번 심우장 방문을 꽤 기대한 눈치다. 정선태 교수에게 수준급 질문을 한다. “교수님, 일반적으로 한옥은 남향에 짓잖아요. 그런데 심우장은 북향에 낸 집이라고 하던데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왜 북향에 집을 지었나요?”
“조선시대 성북동은 도성 밖에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부잣집이 많은 동네가 아니었죠. 성북동에 집이 들어선 것은 1930년대부터인데요. 심우장 건너편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 심우장이 있는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총독부가 보이는 곳을 향해 집을 짓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해요.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의지가 느껴지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곳이 북쪽이기 때문에 북향이 아닌 집을 지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어요.”
만해 한용운은 앞면 4칸, 옆면 2칸, 부엌 1칸이 뒤로 돌출된 ㄴ자형 한옥을 짓고, 마당에는 향나무, 소나무를 심었다. 마당 한쪽에 커다란 향나무 한 그루와 입구의 소나무는 만해 한용운의 손길이 새겨져 있다. 성북구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심우장에서 장편 소설을 쓰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어요. 여느 독립운동가의 말년처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삶 또한 어려웠는데 돌아가시기 1년 전 중풍이 들었고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쉰넷의 나이로 돌아가시죠.”
정선태 교수와 K*reator가 심우장의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강조되는 공간이 바로 부엌입니다. 부엌은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여성의 공간이지요. 부엌에 전시된 액자 속 그림과 글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모습과 글입니다. 독립선언서 후반부의 공약 3장을 쓴 분이 바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죠. 공약 3장에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위를 하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33인이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지만 끝까지 약속을 지키신 분은 많지 않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신 분 중 한 분입니다.”
사랑방과 툇마루에는 만해 한용운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의 초상화, 시집 <님의 침묵>과 외국어로 번역된 판본, 만해 한용운이 간행한 불교 잡지 <유심>, 한시, 만해 한용운과 관련된 신문 기사 스크랩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민정 학생이 정선태 교수와 함께 전시물을 관람하다가 묻는다. “교수님, 이곳 심우장 말고도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이 또 있는 것 같아요.” 정선태 교수가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서 매년 만해 학회가 열린다고 답한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 강원도 속초 신흥사, 경기도 광주 만해 기념관 등 만해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꼭 들러보길 권한다고 덧붙였다.
5칸 한옥을 둘러본 후 전성태 교수가 좋은 시 한 편을 들려주겠다며 K*reator를 마루로 불러 모은다. 손에 들린 시집 <님의 침묵>을 펼치니 <오셔요>라는 시가 있다. ‘사랑과 혁명’에 관한 시 한 편을 들을 차례가 왔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한 편의 시를 듣고 나니 종일 내리던 가을비가 어느새 그쳤다. 심우장을 돌아본 후 박지호 학생이 “심우장 기운을 받아 좋은 글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선태 교수는 “심우장에 마저절위(磨杵絶葦)란 글이 있어요. ‘마저는 쇠로 된 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고, 절위는 책을 맨 책이 끊어질 정도로 공부한다’는 뜻입니다. 뭐든 열심히 해야겠죠?”
조용히 심우장의 대문을 닫고 내려가는 골목길. 절개를 지킨 만해 한용운의 삶이 이곳의 오르막길처럼 느껴졌다. 삶은 곤궁했으나 시인으로서 아름답고 강렬한 시를 썼고, 독립운동가로서는 지조 있었으며, 종교인으로서는 순수했던 삶.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안고 조심히 길을 내려왔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29길 24
관람시간 9:00 –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