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학 최태만 학장ㆍ고경록(미술학부 21학번)ㆍ마혜원(미술학부 22학번) 학생
추상의 부드러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국민대학교 가까이에 있다. 국민대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10분. 최태만 교수(예술대학 미술학부 회화전공)가 안내하는 최만린미술관을 고경록 학생(미술학부 회화전공 21학번)과 마혜원 학생(미술학부 회화전공 22학번)이 찾았다.
고(故) 최만린 작가는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앞에 설치된 <올림픽운동조형물>, 인천자유공원에 전시된 <움직임 그 100년>,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 있는 <태>는 우리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간 최만린 작가의 작품들이다.
국민인들의 일상에서 최만린미술관은 등하굣길, 산책길에서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최만린미술관을 찾은 고경록 학생과 마혜원 학생이 공강 시간에 오면 딱 좋을 장소라고 말한다. 이날 두 학생을 이끈 이는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최태만 교수다. 최태만 교수는 최만린미술관이 정식 개관하면서 준비한 <흙의 숨결> 전시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최만린 작가를 뵌 적이 있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개인적인 인연으로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최만린 작가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한다. 낮은 집들이 오순도순 자리해 미술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정릉 주택가. 최태만 교수는 왜 두 학생을 이곳으로 이끈 걸까?
최만린미술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것은 정원에 놓인 조각상이다. 최태만 교수가 최만린 작가의 시리즈 작품인 <태> 앞에 서서 마혜원 학생에게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다. 마혜원 학생이 “신기한 덩어리”라고 말하자 최태만 교수가 “무언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나요?” 라며 상상을 자극한다.
최태만 교수가 이번에는 최만린 작가의 대표작인 <맥> 앞에 섰다. 이번에는 고경록 학생에게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다. “세포 조직인 것 같기도 하고, 핵이 폭발해서 발생하는 에너지처럼도 보이는데요.” 고경록 학생이 ‘생명체’라는 단어에 자신의 상상을 순발력 있게 더한다.
“최만린 작가의 주된 관심사는 ‘생명’이었어요. 마혜영 학생에게 물은 작품은 제목이 <태>인데요. 태아의 태(胎)입니다. 고경록 학생에게 물은 작품은 <맥>입니다. 한자 맥(脈)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최만린 작가는 대표작 <EVE>에서 ‘생명’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를 연작으로 선보이다가 한자의 서체를 형상화한 조각 <천(天)·지(地)·현(玄)·황(黃)>을 선보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태(胎)·맥(脈)·점(點)>으로 이어지죠.”
최만린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EVE> 연작은 인체에 대한 조형적 탐구가 곧 인간에 대한 믿음, 생명에 관한 관심이라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EVE>의 성공 이후, 서구식 조각 교육의 바탕에서 탄생한 인체 조각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한국적인 조각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강박적으로 매달린 결과 서예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자의 서체를 형상화한 조각이 탄생했다. 정원에 있는 <태>와 <맥>이 최만린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을 첫 번째로 반기는 이유다.
미술관에 들어온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 그런데 최만린미술관은 작품을 일렬로 전시해 놓은 미술관과는 좀 다른 콘텐츠를 지니고 있다. 2층 구조의 미술관에는 1층에는 전시실, 작업실, 수장고가 2층에는 자료실, 연구실, 수장고가 있다. 하우스뮤지엄의 형식을 띤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최만린 작가는 성북구 정릉에서 30여 년간 거주하며 자택 겸 작업실로 쓸 지금의 주택을 매입하셨어요. 최만린 작가와 유족들은 거주공간이자 아틀리에로 사용한 이 공간과 소중한 작품들을 지역을 위해 기증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죠. 우리가 흔히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인 미술관에서는 작업의 결과인 작품 중심으로 전시가 이뤄지잖아요. 그런데 최만린미술관은 아틀리에를 갖추고 있어 작가가 남긴 에스키스(esquisse: 회화에서 작품 구상을 정리하는 밑그림), 마켓(maquette: 계획하는 조각이나 건물의 조그마한 모형), 드로잉, 메모, 도서 등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최만린미술관의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최태만 교수가 두 학생에게 관람 팁을 전하자, 고경록 학생이 기대감에 차서 말한다.
“그럼 지금부터 최만린 작가님의 인생 아카이브를 만나보는 건가요?”
1층 전시장에는 최만린 작가의 작업실을 재현해 놓았다. 최만린 작가가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흙칼, 흙주걱, 나무망치, 나무끌 등 작업 도구들이 있다. 최만린 작가가 치열하고 집요하게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함께했던 분신과 같은 존재들이다.
최만린 작가는 193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시절, 스승 박승구의 권유로 조각반에 가입했다. 3학년 때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한 작품 <얼굴>이 입선하면서 주목받았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많은 고민을 했으나 미술에 대한 열망이 대단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EVE 58-1>로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서울대학교에 재직해 주요 전시회에 참가했고,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도 활동했다. 은퇴 후에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작업실을 창작의 산실이라고 하죠. 실제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몸에 익숙한 도구를 평생 간직하는 데요. 이 낡은 도구를 통해서 최만린 작가의 연륜과 동시에 작가로서 겪었을 창작의 고통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죠.”
회화를 전공하고 있는 마혜원 학생과 고경록 학생이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본다. 가까운 미래에 본인만의 창작활동을 위해 작업실을 꾸릴 두 학생이 창작의 영감을 얻는 듯하다.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오른다. 왼쪽에는 연구실이, 오른쪽에는 자료실이 있다. 자료실 O-Library는 최만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아카이브뿐 아니라 국내외 현대조각과 관련된 자료, 도서, 도록 등이 있고, 연구실에는 최만린 작가가 집무를 봤던 책상과 의자와 함께 개인적인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놓여 있다.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 최만린 작가가 좋아했던 담배와 커피, 기록하는 습관을 보여주는 메모 등 평범한 개인의 삶과 치열했던 조각가의 삶이 중첩된다.
최태만 교수의 손에 파일 하나가 들려있다. 최만린 작가의 작품을 아카이브한 자료다. 다 함께 자리에 앉아 최만린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다가 마혜원 학생이 “교수님, 이 작품이 최만린 작가님의 대표작 <EVE> 아닌가요?”하고 묻는다. 최태만 교수가 마혜원 학생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우리 마혜원 학생은 작품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네요. 이 작품은 <EVE>입니다. <EVE>는 작품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는 연작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은 1958년에 발표한 <EVE58-1>입니다. 인체를 표현한 작품인데 자세히 보면 표면이 굉장히 거칩니다. 나무 막대로 두드리고 손으로 압력을 가해 짓이겼죠. 왜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최태만 교수가 묻자 고경록 학생이 답한다. “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최만린 작가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한국 전쟁을 겪었고, 조각가의 길로 인도한 스승은 한국 전쟁 중에 월북했다. <EVE>에는 전쟁에 대한 분노, 사람에 대한 연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목격한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의지 등을 왜곡된 인체로 표현했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던졌다.
“작업 노트에는 최만린 작가의 관심이 ‘생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과 드로잉이 있습니다. 1970년대 작가가 가졌던 관심, 고민 등이 적혀 있는데요. 이러한 메모를 통해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정신세계 또한 알 수 있죠. 최만린 작가는 최만린미술관의 정식 개관 전시전인 <흙의 숨결>을 앞두고 2020년 11월에 갑자기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최만린 작가가 남긴 작품, 메모, 작업 도구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국민대학교에서 걸으면 15분 안에 예술에 관한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누구든지 방문해서 편하게 작품을 볼 수 있고,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공간. 우리가 바라는 일상 속 예술의 확산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최만린 작가가 추상 미술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많은 이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국민인들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정신적 향유를 마구마구 여기저기로 퍼뜨려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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