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를 품에 안은 배우 윤여정부터 이제는 ‘실버 인플루언’의 상징이 된 박막례 할머니(@Koreagrandma)와 밀라논나(@Milannonna)까지, 할머니 셀럽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기가 놀랍다. 패션 어플리케이션 지그재그는 앱의 주 사용층이 2030임에도 불구하고 75세인 배우 윤여정을 브랜드 모델로 기용하여 ‘니들 맘대로 사세요’ 라는 슬로건으로 매출 성장을 견인하며 실버 파워를 실감케 했다. 세련되지 못하다고 여겨져 홀대받던 옛것과 조부모 세대의 문화가 이제 ‘취향’ 이라는 이름 하에 젊은 소비층에게 수용되고, 또 그들의 문화에 맞게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오픈런을 명품 매장 앞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전통 찻집이나 떡집, 혹은 제사상에서나 쉬이 볼 수 있었던 한국의 전통 간식 약과는 이제 소비자들이 기꺼이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 ‘잇템’이 되었다. 한 팩에 6천 원 남짓한 약과를 사기 위해 오픈런까지 하다니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 아닌가 싶지만, 약과를 위해 뛰는 그들이 바로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즐길 줄 아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MZ세대들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구한 약과는 당근마켓과 같은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두배가 넘는 가격에도 인기매물로 거래되는데, 약과 구매경쟁이 어찌나 치열한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약과’와 ‘티켓팅’의 합성어인 ‘약케팅’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소비 트렌드는 소비자들의 검색어 트렌드를 분석해주는 네이버 데이터랩을 활용해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최근 4년간 네이버에서 발생한 한국 전통 간식 약과에 대한 검색량이 2021년을 기점으로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약과에 대한 검색량과 프랑스 대표 디저트인 마카롱의 검색량 추이를 비교해 보면, 2022년 하반기부터 약과의 기세가 한층 거세져 결국 마카롱의 검색량을 역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KB국민카드에서 발표한 4년간의 디저트 시장 소비 트렌드와도 일맥상통하는 결과이다. KB국민카드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떡·한과의 매출액 증가율은 아이스크림, 도넛, 케이크 등 디저트계 전통 강자들의 매출액 증가율을 훌쩍 능가했다.
이렇게 옛 문화를 즐기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즐기는 오늘날의 젊은 소비층을 ‘할매니얼(할머니를 뜻하는 방언인 ‘할매’와 ‘밀레니얼’의 합성어)’라 일컫는다. 할매니얼의 열기는 비단 약과에만 국한되는 문화 현상이 아니다. 약과 뿐만 아니라 흑임자, 인절미, 땅콩, 쑥 등 우리가 흔히 ‘할매 입맛’의 대명사로 칭해왔던 식품들의 인기가 증가하며, 유통업계에서도 관련 제품들을 줄지어 출시하고 있다. 가령, 할머니댁 유선 전화기 옆 바구니나 할머니 바지 호주머니에나 들어있던 땅콩캐러멜 캔디는 가슴 한 켠에 소중한 추억으로나 남으려나 했지만, 작년 한해 2030세대의 매출 비중이 약 60%에 달하며 땅콩캐러멜 맛 막걸리가 출시되기도 했다. 패션 분야에서도 할머니가 입었을 법한 과감한 꽃무늬 패턴, 화려한 색감, 빛바랜 빈티지 옷들이 ‘그래니 룩(Granny Look)’ 혹은 ‘그래니 시크(Granny Chic)’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패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젊은 소비층이 할머니 감성에 열광하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바로 취향 소비 사회의 도래이다. 대세가 아닌 개개인의 취향이 존중 받는 사회, 나만의 특별한 취향이 소위 ‘힙’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조부모 세대의 문화는 MZ세대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또 동시에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온 듯하다. 또한,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제품 소비에 있어서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료를 혼합하거나 수정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이를 소비하는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할머니 세대의 옛 문화는 이러한 모디슈머(modify + consumer)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켰다. 조부모 세대의 문화를 옛날 방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유니크한 취향을 가미함으로써, 이를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하나의 창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작은 약과 하나를 먹더라도 그냥 먹지 않는다. 네이버에서 ‘약과 맛있게 먹는 법’만 검색해도 약과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약과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아메리카노를 곁들이고, 쿠키나 스콘으로 재탄생 시키는 등,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로 작은 소비일지라도 그 소비의 경험 자체를 나만의 영역으로 탈바꿈 시킨다.
또한, 할매니얼 트렌드의 부흥은 문화의 세계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국가 간 교류가 증가하고, 소셜 미디어 등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발달하면서 문화에 있어 국가 간 경계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TS와 블랙핑크의 노래를 전 세계인들이 즐기고,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과 같은 K-컨텐츠가 수출되며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가 크게 향상된 점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K-컬쳐의 세계화는 언제나 문화 수입국이던 대한민국을 문화 수출국으로 발돋움하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 ‘개성’과 ‘힙함’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만이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갈증이 할머니 세대의 문화와 만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적인 문화를 즐기는 할매니얼을 등장시켰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고려 명종 22년과 공민왕 2년, 약과를 만드느라 곡물, 꿀, 기름등의 소비가 많아져 물가가 치솟자 약과의 제조가 금지되어 약과의 희소성이 무척 높아졌던 역사가 있다. 그로부터 7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할매니얼의 등장이라는 굉장히 다른 이유로 유명 브랜드의 약과는 귀한 몸이 되어 만나보기조차 쉽지 않다. 입에 꼭 맞는 달콤하고 쫀득한 약과를 구하기가 티켓팅만큼이나 치열하지만, 그 열기가 참으로 반갑다. 옛 것에 나만의 감성을 더해 ‘내 것’으로 소화하는 젊은 소비자의 전통 문화 향유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