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부터 반복되던 국가 간 영토 · 무역경쟁은, 오늘날 기술·경제전쟁의 형태로 이어져 왔다. 최초의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비롯해 초기 반도체 기술 발전을 일궈낸 미국, 기술 역량과 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각각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의 큰 축을 담당하는 한국과 대만, 반도체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일본, 그리고 막대한 자본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쟁에 참여한 중국까지,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이 지속되고 있다. 심화되는 외교·기술적 전략들에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길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1960년대 미국 자본과 아남산업에 의해 국내 반도체 조립 사업이 출범하였고, 1970년대 금성반도체와 한국반도체 등 해외 반도체의 조립·수출을 시작으로 한다. 1983년 삼성그룹의 64K DRAM을 통한 반도체사업 진출과 1986년 현대전자 반도체공장을 신호탄으로, 대한민국은 고집적 DRAM 시장을 선도하며 메모리 산업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반면, 일본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메모리반도체 산업을 휩쓸며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황금기를 누렸으나, 기업용 고성능 메모리에서 개인 PC용 저가 메모리로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늦은 적응, 미국과의 반도체 경쟁 구도 및 갈등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은 미-일 반도체 경쟁 사이에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빈틈이 발생할 때,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비교적 늦은 시작이었으나,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견제, 산업용 컴퓨터에서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으로 반도체 응용 분야가 확장되는 등, 시대적 상황이 맞아 떨어졌던 당시의 배경 역시 중요하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 10여 년 만에 미-일이 장악하고 있던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 성장과 비슷한 시기, 대만의 반도체 기술 역시 급변하며 성장했다. 1960년대 이후, 대만은 일본의 전자 부품 기업을 인수하여 반도체 산업 기틀을 마련하고, 정부 주도의 공업화를 통해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었다. 1985년 대만 정부는 국책연구기관 ITRI(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하며, 미국 반도체 기술 발전을 이끌어온 TI(Texas Instruments)의 모리스 창(MorrisChang)을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반도체 생산 설비의 확보가 불가능하여 반도체 설계 기업의 탄생이 더딤과 미-일 경쟁이 치열한 메모리 기술에서의 경쟁력 확보가 어려움을 판단한 대만 정부와 ITRI는 시스템 반도체 제조 및 생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에 따라, 대만 정부와 외국 투자금을 바탕으로 1987년 TSMC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출범하며,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Foundry) 형태의 새로운 반도체 사업 모델이 등장함과 동시에, TSMC의 생산 기술을 필두로 다양한 팹리스 반도체 기업(fablesssemiconductor company: 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 외주를 통해 생산이 완료된 칩의 소유권이나 영업권은 팹리스 기업에 있어 자사 브랜드로 판매한다)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대만에는 시장 점유율 상위 1,000개 기업 중 약 80개 이상의 반도체 기업이 존재하는 거대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구축되었으며, 이는 최근 대만이 거대한 반도체 산업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요구되는 기술 수준과 그 구현 난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최근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파운드리 산업은 그 규모가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패자로, 대만은 시스템 반도체라는 새로운 반도체 산업 구조를 구축하며, 하나로 연결되는 각각의 영역을 견고히 해왔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의 코스트 상승과 경쟁으로 인한 수익성 확보의 어려움, 시스템 반도체 기술 고도화에 따른 시장 규모 상승 등의 이유로,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의 경쟁력을 발판으로 넓은 분야로의 진출을 꾀하며 시스템 반도체 시장 공략을 진행 중이다.
또한, 2010년대에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효율적인 인공지능 구현을 위한 지능형 반도체 기술, 그리고 메모리 기반 연산 반도체 기술(PIM, Processing-In-Memory)이 개발되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서 촉발된 이러한 컴퓨팅 패러다임의 변화는, NPU(Neural Processing Unit) 및 HBM (High-Bandwidth Memory) 등 반도체 기술의 새로운 응용 분야를 창출하여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각각의 시장 규모를 증가시킴과 동시에,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의 융합을 요구하며 두 기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기회를 눈앞에 두고 들썩이고 있다. 한국 역시 메모리 반도체의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면전에 뛰어들었으며, HBM 등 신 메모리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중국은 2015년 ‘중국 제조 2025’ 라는 제조업 혁신 계획을 발표한다. 2018년 중국 정부가 선언한 ‘반도체 굴기’라 불리는 반도체 분야 핵심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그 골자는 2025년까지 한화 196조 원에 이르는 지원 자금을 바탕으로 전 세계 반도체 시장 60%를 담당하는 중국 반도체 시장의 자급률을 70%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투자는 한국의 핵심 인재 · 영업 기밀과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 수준으로 번지며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2018년 대만은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를 빠르게 도입하였고, 한국 역시 전문가에 대한 보안강화와 기술 유출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에 이른다. 또한 과거 미-일 반도체 경쟁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미-중 반도체 기술 경쟁 및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은 열강의 경쟁 · 대립구도 속에서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 근성과 하나됨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 반도체 산업 경쟁에서도 한국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며, 그 속에 크고 작은 기회와 리스크가 혼재함은 당연하다. 전 세계적으로 경쟁이 심화되며 찬바람이 불어오는 지금이 한국의 역사, 과거의 미-일 반도체 경쟁과 일본의 쇠퇴, 한국 반도체 기술 발전 등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1980년대 일본, 그 당시 한국·대만과 비교해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이 다시 저력을 보일 때이며,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한 기회이지 않을까? 물론 과거에 비해 이미 다양한 경험과 기술적 경쟁 우위를 확보한 상태이지만, 안주해서는 안된다. 한 명의 우수한 반도체 기술자가 시급하며, 대학의 역할과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다. 이러한 시기적 상황에 발맞춰, 정부, 기업과 대학 모두 반도체 교육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경쟁과 변화는 발전으로 이어진다. 준비되어 있을 때 직면한 위기는 곧 기회이다. 마찬가지, 위기에는 보상이 따른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Low-Risk, High-Return이라면, 이에 투자하지 않는 투자자는 없을 것이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 논공행상이 머지않겠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그리고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그 가운데에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