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치열한 광고판에 광고카피로 우뚝 선 한 남자가 작사까지 하는 도전적인 스토리를 취재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 “오늘 인터뷰 잘못하시는 거예요.”라고 광고카피처럼 내뱉는다. 직장인도 딴짓이 필요한 거라며... 성공한 카피라이터의 집무실에는 세 대의 자전거, 뇌 구조를 그린 그림이 벽에 붙어 있다. 박승욱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는 “이게 다 내 장난감”이라고 말한다.
“올해도 새해 목표가 또 영어회화야? 영어 삼사십분씩 각잡고 앉아서 힘들게 하지 말랬지.”
하루 10분, 작은 성공이 쌓이면 ‘너도 할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이 광고는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배우의 말맛도 좋고, 카피도 긍정적이다. 박승욱 ECD가 쓴 광고카피들은 광고계에서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한계를 긋지 않는 기분 좋은 광고로 유명하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비비디 바비디 두’, ‘생각이 에너지다’,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등 듣기만 해도 기분이 산뜻해진다. 그래서 박승욱 작사가가 쓴 노랫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반전이다. 가사가 조금 구슬프다고 하자 “그게 원래는 코미디인데 목소리가 깊다 보니 슬프게 들릴 수 있죠.”라고 말한다.
박승욱 ECD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된 어머니가 파스를 붙이시는 모습을 보며 노랫말을 썼다. 곡 이름은 <파스>. 저음이 매력적인 문주란 가수가 탱고 선율에 맞춰 노래 부른다. 4월 발매된 <파스>는 발표 초기에는 주목받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사람에게 불리는 노래가 되진 못했다. 박승욱 ECD의 표현을 빌리자면 흥행에는 실패했다.
“마이너스 통장을 대출받아 낸 음반이에요. <파스> 이후에도 문주란 선생님과 후속곡 작업이 예정되어 있긴 해요. 그렇다고 앞으로 작사가로 되겠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광고만 하다 보니 딴짓을 하고 싶었어요. 취미 말고, 딴짓이요. 제가 가수 중 진짜 가수라고 생각하는 분이 문주란 선생님이거든요. 그런 분과 함께 만드는 음반이니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일 수밖에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광고시장. 24년 차 광고맨은 광고업계에 쏟아져나오는 새로운 직종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만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늘 하던 방식이 아닌, 이제껏 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딴짓은 의미 없는 뻘짓이 아니에요. 뇌라는 게 늘 쓰던 방식대로 움직이면 그 경로대로만 움직이게 돼요. 새로운 행동을 해서 잘 쓰지 않은 감각기관들에 자극을 줘야 하고, 그렇게 움직여야 광고 카피라이터로서의 일과 삶이 윤택해진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박승욱 ECD가 자리에서 일어나 뇌 그림 앞에 선다. 자신의 관심사인 뇌과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박승욱 ECD는 4년째 뇌 과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주로 뇌 그림을 보면서 감각기관의 역할을 떠올린다.
“뇌 과학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이야기에요. 일본에서는 사람의 뇌를 FMRI(기능적자기공명영상)로 촬영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알 수 있다고 해요. 바이올린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뇌를 FMRI로 찍으면 바이올린이라고 정확히 나오진 않아도 악기를 떠올리고 있구나 정도로 알 수 있다는 거죠. 사람은 평생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데 저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는 어렵게만 느껴져요. 그런데 뇌과학은 명쾌합니다. 뇌 이야기는 제 사용설명서이자, 본질적인 활동이에요.”
그래서 자아에 대한 답을 얻었냐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앞으로도 절대 모르지 않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자전거를 탈 때만은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오늘 가야 할 목적지가 있고, 돌아올 집이 있으니까. 출발할 때는 정처 없고, 열심히 달리다 보면 알거든요. 멀리 가봤자 돌아올 곳은 하나다. 그게 뭔가 이뤄낸 것 같은 착각을 주죠. 한 가지 분명한 건 엄마가 강요하는 나로 살지 말고 내가 누군지 빨리 찾아가야 한다는 거죠.”
박승욱 ECD는 막연히 광고와 잘 맞을 것 같다는 본능 하나로 광고업계에 뛰어들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은 많지만 하나를 분석적으로 깊게 파고드는 건 적성에 안 맞고, 단기적으로 접근해 핵심을 전달하는 눈썰미는 좋았다. 히트시킨 수많은 광고 중 스스로가 생각해도 잘한 광고를 묻는 질문에 국정홍보처의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를 꼽는다.
“이 광고가 2006년에 나왔는데 ‘긍정의 힘’이라는 워딩이 지금도 인용되고 있어요. 그게 당시 제 가치관이었어요. 그 광고카피로 3~4년은 주목받으며 일했죠. 그런데 지금은 광고시장이 많이 변했잖아요. 이 바닥에 잘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지금의 가치관은 ‘즐기자’입니다.”
광고는 경쟁을 통해 일이 돌아간다. 광고대행사 간 경쟁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회사 안에서는 팀원 간의 경쟁이 이어진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최선이 아닌 최고의 결과를 들고 동료들 앞에, 광고주 앞에 선다. 캘린더에는 작은 전쟁이 빼꼭하게 적혀있다.
“광고는 결과로 증명하는 일이에요.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음악을 듣든, 웹툰을 보든, 주말을 반납하고 일하든, 그건 각자 알아서 하고 ‘그 대신 반드시 이겨라’니깐 엄청 치열하고 잔인하죠. 그래서 되게 좋아요. 뭐라고 할까. 버젓이 제 사무실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을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제 장난감들이 사무실에 없으면 머물고 싶지 않거든요. 아마 제가 이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중 하나일 건데요. 그건 제 장난감이 여기에 있어 가능한 거예요.”
그제야 집무실에 놓인 자전거와 뇌 그림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오브제로 보인다. 마치 박승욱 ECD가 만든 명확한 광고카피처럼.
“넓고 얕고 다양한 호기심을 단기적으로 접근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광고맨의 접근 방식이 저에게 잘 맞아요. 제 자식이 한다고 하면 저는 환영이에요. 재미있거든요.”
최근 광고계에서 주목받는 빙그레우스 광고와 20년 전 찬사를 받았던 울림이 큰 광고들은 분명 많은 차이가 있다. 시대가 달라졌고, 사람들의 취향도 변했고, 그 시간 동안 박승욱 ECD가 서 있는 위치도 달라졌다. 승률 높은 투수 시절, 제일 자신 있는 공을 눈치 보지 않고 던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자신의 가설과 팀원의 가설을 놓고 직접 결정하고, 광고 전략도 짠다. 요즘은 가끔 힘들 때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그제큐티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건 제 직함일 뿐이고, 제 본질은 여전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예요. 이 세계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어요. 저는 문제를 줬을 때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 재미로 광고를 하는 거죠. 만화 <슬램덩크> 봤어요?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던 농구부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팀플레이를 보여줘요. 주장인 채치수가 감격에 겨워 동료들에게 조용히 고맙다고 말하니 농구부원들이 ‘무슨 웃기는 소리 하는거야. 난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야. 뭐가 고맙다는 거야?’ 라고 말하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광고대행사예요.”
박승욱 ECD는 회사에서 일과가 끝나면 집무실에 있는 자전거 중 하나를 골라 강남에서 팔당댐까지 사이클링을 한다. 62킬로미터를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다 보면 그가 가야 할 최종 목표이자 목적지가 보인다. 숨은 차오르고, 내가 누군지 알 것만 같은 착각도 들고, 기분이 꽤 긍정적이고, 광고는 늘 재미있다. 실력 좋은 사람이 많은 광고업계에서 운 좋게도 박수받으며 광고를 만들어왔다. 여전히 즐기면서 일하고 싶고, 이 일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박수받으며 떠나고 싶다. 어둠이 깔린 도시, 자전거를 회사에 가져다 놓으며 전쟁 같은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