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과 올해 봄, 김용필 동문은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참가자로 출전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불확실한 가능성보다 항상 낫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증명해냈다. 앵커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뒤로 하고 트로트 가수로 대중 앞에 서기까지, ‘도전이라는 여정에는 원래 실패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김용필 동문을 만났다.
“아버지는 늘 제 방을 보시고 ‘학생 방이 이래도 되는 걸까?’하고 물으셨어요? 드릴, 드라이버 등 온갖 공구가 방의 절반을 차지했었거든요.” 김용필 동문은 유년 시절 무선자동차에 푹 빠져 지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거의 매달 열리는 크고 작은 무선자동차대회에 출전했다. 실력이 출중한 덕분에 국내 대형 프라모델 기업이 매년 여는 무선자동차대회에 연속 네 번 그랑프리를 수상해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국민대학교 자동차공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학과 시절에 전공 소모임인 ‘자동차 연구회’에 가입해 1인용 경주용 카트를 만들기도 했고, 국민대학교 산악동아리 KMAC 부원으로 매주 암벽 등반도 했다. 학생회 임원으로 교내 공연과 행사를 진행하게 되면서 전시 공연에 차츰 관심이 생겼다.
“대학생 시절에만 아르바이트를 30여 개 이상 했어요. 제대 후 복학하고 나서는 제 관심사인 공연 전시 아르바이트로 사회 경험을 쌓았죠. 신문사와 대기업 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하는 공연 전시 일을 하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도 해보고, 보도자료도 만들어봤죠. 일도 재미있고, 꽤 잘했어요. 그래서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게 됐어요. 그러던 차에 중학생 시절 책 읽는 저를 보고 아나운서를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한마디가 문득 떠올랐죠. 4학년 때 방송아카데미에 등록해 아나운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어요.”
김용필 동문은 졸업 후에 케이블 방송사의 아나운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목표했던 공중파 방송사 입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방송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케이블 방송사에서 익힐 수 있었다.
“규모가 작은 방송사의 장점은 일이 많다는 점이에요. 아나운서가 취재, 기사, 촬영, 편집 등을 하죠. 2년간 방송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한 후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전환했어요.” 국방홍보원의 <국방뉴스> 앵커를 시작으로 MBC <생방송 오늘 아침>의 리포터, KBS <생생정보통>의 성우, 매일경제TV와 한국경제TV의 앵커 등 대체 인력이 많은 방송가에서 하차 없이 오래가는 전천후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생방송 오늘 아침>을 13년, <생생정보통>과 한국경제TV를 7년간 진행했어요. 고정 프로그램을 4~5개 하면서 신차 발표회, 모터쇼, 의전행사의 사회도 맡았죠. 방송가에서 치열하게 일해 성실하다는 평판을 쌓았고, 꾸준하게 일했더니 방송국에서 만난 PD와 작가 사이가 일로 맺어진 동료 그 이상의 인간관계로 발전하더군요. 하루는 PD를 거쳐 국장을 지낸 한 선배가 정년퇴직 후 연락을 주셔서 식사했어요. 회사생활을 30년 하면 은퇴하고 쉬면서 인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앞으로 30년을 더 보낸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게 벌써 10여 년 전 일입니다. 저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기가 곧 오리라 생각했죠.”
김용필 동문은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시청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라디오 DJ 방송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23년을 보도 중심의 방송을 진행했기 때문에 예능의 영역에서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김용필 동문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지인들은 방송에서 ‘노래’를 불러보기를 권했다.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제 지인들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면 제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조언했어요. 이십년지기인 박성웅 배우는 음반에 투자할 사업가를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실력도 부족했고, 용기도 없었죠.”
김용필 동문이 노래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시기는 다름 아닌 팬데믹 기간이었다. 방송과 행사 일이 줄어들면서 수입도 줄어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지인이 보컬 레슨비를 지원해 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국민대학교 자동차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했던 형인데요. 지금은 한의사예요. 한때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죠. 형이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큰돈은 아니지만 제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형이 저를 돕겠다고 나섰어요.”
‘또 다른 경쟁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시작한 노래가 어느새 마음의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 때 김용필 동문은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전했다. 경연 첫 무대에서 부른 <낭만에 대하여>는 ‘트로트 낭만가객’이란 수식어로 김용필 동문을 유명 인사로 만들었고, 이어지는 경연에서 <당신>, <열애>, <옥경이>를 부르며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는 초강수를 두며 결승 무대 진출에 집중했지만 아쉽게도 TOP10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 드라마틱한 일들이 펼쳐졌다. <낭만에 대하여>의 원곡 가수인 최백호 가수와 결승전 스페셜 무대에 오른 것이다. 가수로서의 도전을 계속 이어가라는 시청자들의 격려와 응원은 그의 도전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었다.
“결승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저는 이 경험을 ‘실패’, ‘좌절’이라고 정의하지 않아요. 덕분에 최백호 선생님과 한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그 무대를 기점으로 가수로서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데 큰 힘을 얻었죠.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전환한 이후 20년 만에 한 도전이었는데요. 제 안에 과연 열정의 불씨가 남아있는지 그 시작이 두렵기만 했어요.”
김용필 동문은 도전은 국민대학교 뒤편에 있는 북악산과 북한산처럼 태산과 같다고 말한다. 암벽을 오르려고 하면 도저히 못 오를 것 같지만 도전하는 용기,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는 일은 아름답고 박수받을 만한 일이란다.
“어쩌면 도전의 결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도전의 과정에서 깨닫는 것,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고 믿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그 모든 행위에 감동이 있고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죠.”
김용필 동문은 지난 7월에 첫 싱글 <낭만연가>를 발표했다. 수묵화처럼 담담하고 정갈한 목소리에는 김용필 동문의 섬세한 감성이 담겨있다.
“방송에서 23년간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하며 ‘삶의 애환’을 알았어요. 인간을 바라보며 느낀 다양한 감정이 제 노래를 표현하는 자양분이 됐죠. 제 첫 싱글은 인터뷰어로서 사람을 만나고 삶을 바라보고 성찰했던 시간, 가족과 지인의 응원, 자기확신이 낳은 결과물이에요. 저보다 저를 더 잘 아는 지인들이 제 마음속에 ‘확신’이라는 희망을 심어줬고, 내면화된 자기확신이 중년의 나이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줬죠.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결과 그리고 감동도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 당장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물을 얻지 못한대도 괜찮다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아름답고 빛나는 정체성이 소모되거나 훼손되지 않게 씩씩하고 꿋꿋하고 신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막 가수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김용필 동문은 진심을 담아 자신의 노래를 한 곡, 두 곡 더할 예정이다. 김용필 동문이 진행해온 방송처럼 사람 곁에서 오랫동안 불리고 기억되는 가수가 되길. 라디오 애청자와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인간미 넘치는 김용필 DJ의 모습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