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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국민인 고3 되어 뒤늦게 입시 공부 시작 지금은 변호사 목표로 학업 매진

“막연한 꿈이었던 법대…치열한 1년 보내고 결국 입학했습니다”

국민대학교 법학부 19학번 김하늘 학생

법학부 19학번으로 재학 중인 김하늘 학생은 “동기부여가 없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성격”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그가 고등학생 시절의 어느 날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험 생활에 돌입하게 된다.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입시학원에 다녔고,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치열하게 자신을 갈고 닦았다. 국민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1년간의 수험기를 들어보자.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목표로 수험 생활 시작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그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던 김하늘 학생은 2학년 무렵 학교 체험 학습의 일환으로 서울을 찾았다. 빌딩 숲이 화려하게 빛나던 그 날 한강의 야경을 본 그는 처음으로 ‘고향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그전까진 제대로 공부에 매달려 본 적이 없던 그는, 고향에서만 받는 교육으론 부족함을 느꼈다.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며 부모님을 졸라 그해 5월 강남 대치동의 한 대형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주변에서는 돈과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에겐 충분히 감수할만한 수고였다.

부모님은 사흘도 못 버틸 거로 생각했지만, 김하늘 학생은 꾸준히 학원에 다녔다. 수능 전까지 학기 중엔 주말마다 홍성 집과 대치동 학원을 오갔다. 방학에는 아예 평택에 있는 친척 집에 머물며 학원에 다녔다. 처음 접한 대치동의 분위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주변을 스치는 수많은 학생이 아무 표정 없이 영어 단어를 외우며 교실에 들어가고, 온종일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은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고향 학교와 대치동 학원의 교육이 어떻게 다른지 보이기 시작했다.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인터넷 강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교적 한정적인 교재로만 공부하는 반면, 대치동 학원가에선 매주 엄선된 기출 ‧ 사설 문제와 체계적인 과제가 쏟아졌다. 학원을 찾는 학생들의 태도도 굉장히 달랐다. 인기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기 위해 교실부터 계단까지 책가방으로 줄을 만들고, 미적분 한 과목을 공부하는데 각기 다른 강사 3명으로부터 수업을 듣기도 했다.

▲ 수험 서적이 빼곡하던 김하늘 학생의 가방

그가 공부하던 반은 가장 성적 좋은 학생들이 모인 곳이었다. 모의고사 만점자, 강남 8학군 우등생, 명문대에 입학하고서도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사람 등 다양했다. 입시학원의 1년 커리큘럼은 개념-문제풀이-심화-마무리 순으로 흘러간다. 김하늘 학생이 개념을 겨우 끝낸 시기에 그들은 심화 이상의 진도를 나간 수준이었다. 그는 “주변의 학생들과 비교해 격차가 너무 커서 패배감도 상당히 많이 느꼈죠”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목표를 생각하며 공부를 이어갈 힘을 얻었다. 당시 학원에서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법대 졸업 후 사법고시를 준비한 이력이 있었다. 김하늘 학생은 “그 선생님에게 법학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법학을 공부하면 주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막연하게 법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었지만 다시 힘내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위기감도 같이 떠올랐죠. ‘개천에서 용 나기도 어려운 세대인데, 지금 용의 꼬리라도 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왼쪽부터) 김하늘 학생의 수험 공부 노트 ‧ 스케쥴표

늦게 시작한 만큼 스스로 더 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새벽 한 시에 자고 다섯 시에 일어났다. 시간이 아까웠다. 당시 그는 지하철 안, 지하철 3호선 대치역 근처의 은마상가 떡볶이집, 학원 복도의 키다리 책상, 집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모두 공부방이자 독서실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학원에선 교실 입실과 퇴실 시 ID카드로 출입시간을 기록했다. 여름이 끝나갈 즈음엔 학원 내 전체 학생 중 김하늘 학생의 공부 시간이 두 번째로 많았다. 동시에 성적도 눈에 띄게 오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학교에서 치른 모의고사에서는 전교 1등까지 했다.

그러다 수능이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학원의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아 서울권 대학에 확실히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작은 실수에도 자신을 심하게 질타하는 강박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서울권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공포’에 가까웠어요”라고 회상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던 만큼 수험 생활을 다시 한다는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험난했던 입시

결국, 수능 당일. 1년간의 노력을 단 몇 시간 만에 쏟아 부었지만, 목표한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사회탐구는 만점이었으나 초반부터 긴장했던 국어와 수학에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술 시험도 1점 차이로 대학에서 요구하는 최저등급을 채우지 못하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결국, 논술을 포기하고 정시 원서를 썼다. 막상 원서 쓸 때가 되니 수능 직전까지 목표로 삼았던 법학과는 도전하기에 벅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대학만 보고 달려온 날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딱히 지원하고 싶은 과가 떠오르지 않았다. 흥미를 찾지 못한 채 무작정 가군으로 국민대학교 광고홍보학과에 지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생각이었다. 결과는 예비번호 14번으로 불합격이었다. 학원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한 패배감이 들었다. 수험 생활을 할 때는 ‘원하는 대학에 갈 것’이라는 희망의 끈이라도 있었지만, 이 시기엔 자괴감만 느껴졌다.

▲ 모의재판 수업에 참여한 김하늘 학생

대학 새내기 생활을 준비한다는 친구들 소식을 들으며, 그렇게나 가기 싫어하던 재수학원을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할 즈음 추가모집 전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재수하지 말고 제발 추가모집으로 아무 지방 대학이나 넣고 보자는 부모님의 말씀에, 원서 접수 사이트에 들어갔다. 당시 국민대학교에서는 경영학부 2명, 국어국문학과 1명, 행정학과 2명, 정치외교학과 1명, 법학부 2명을 추가 모집하고 있었다.

처음엔 입시 요강이나 구경하자는 생각이었는데 법학부가 자꾸 눈에 밟혔다. 추가모집은 정시보다 합격점이 높아지는 대신 원서 개수 제한이 없다. 결국 ‘떨어지더라도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국민대학교 법학과에 지원했다. 얼마 뒤 합격자를 조회한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화면만 쳐다봤다. 합격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부모님은 국민대학교에 원서를 넣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딸이 장난을 친 줄로만 알았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김하늘 학생이 2학년이 된 지금까지 화장대에 합격증을 붙여 놓고 매일같이 본다고 한다.

추가합격자 발표일은 국민대학교 입학식 전날이었다. 부랴부랴 입학식에 참석한 김하늘 학생은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 떨렸던 적이 없었어요”라고 그날을 돌아봤다. 학교 근처의 원룸을 계약하면서 염원했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 변호사를 목표로 학업에 매진 중인 김하늘 학생의 전공서적

지금 그는 더욱 명확해진 목표를 향해 다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형법과 관련된 유레카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형사 사건을 직접 해석해나가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어요. 모의재판을 진행할 때는 변호사로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경험과 승소의 기쁨을 처음으로 알게 됐죠. 이제는 변호사로서 소외된 자들의 권리를 구제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또, 법과대학 영어 강독회에서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 코로나19로 부득이하게 사이버강의를 받고 있지만, 다양한 활동으로 학회를 알차게 운영하려 한다. 졸업 후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는 게 목표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 예상된다. 하지만 노력 끝에 국민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것처럼 한 번 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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