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기사
보기

ARTS

KMU ARTS

이미지와 텍스트

(미술학부 김희영 교수)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이미지는 많은 경우 그와 연관되는 텍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광고 이미지에서부터 핸드폰에서 펼쳐보는 웹툰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와 텍스트의 배치는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세심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렇게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긴밀한 관계는 현대의 대중적인 시각 문화 안에서 빠르게 발전되어 온 듯하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도구로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사용된 역사 안에서 중세의 필사본을 출발점으로 되돌아 보고자 한다.

인류는 5천여 년 전부터 진흙이나 왁스를 입힌 판, 도자기 조각, 파피루스, 동물 가죽, 종이 등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누적된 기록은 책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연속되는 이야기를 담은 두루마리(scroll) 형식과 개별 이미지와 텍스트의 낱장을 묶는 코덱스(codex)의 두 형식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1세기 말 정도에 코덱스가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모든 책은 손으로 작성이 되었고 이것을 필사본(manuscript)이라 부른다. 파피루스보다 기록과 보존이 안정적인 양가죽(parchment)이나 송아지 가죽(vellum)이 중세의 책에 많이 사용되었다. 필사본이 제작되던 초기부터 종종 삽화가 포함되었으나 텍스트와 이미지를 배치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이미지를 페이지에 넣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텍스트의 위나 아래에 넣는 것이지만, 텍스트 중간에 이미지를 넣거나 테두리와 함께 별도로 그려 넣기도 했다. 필사본에 포함된 삽화는 세밀화(miniatures: 납 계열의 붉은 안료를 칭하는 라틴어 minium에서 옴)로 불리며, 금과 채색으로 장식된 필사본은 채식화(illumination)라 부른다.

유럽의 중세 필사본 제작은 고도로 전문화되기 시작하여, 이미지, 문자, 금박, 은박 장식의 각 전문가가 부분적으로 제작하였다. 500년~1500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중세 시기의 사회와 경제의 점진적인 변화에 따라 필사본의 형식, 내용, 제작자, 의뢰자, 소장자도 달라졌다.

초기 중세의 필사본은 대체로 라틴어로 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만들고 읽었다.[도1]

▲ [도 1]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는 여전히 성서가 주요 내용이지만 점차 문학, 철학, 역사적인 내용을 포함한 다양한 문헌들이 다루어지고 대학이나 귀족의 개인 서재에 소장되었다. 후기인 14세기~16세기에 들어서는 성자의 생애, 시, 무용담, 궁정예의 등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내용이 자국어로도 작성되었고, 특히 개인 기도서(Books of Hours)가 세밀한 장식을 갖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도2]

▲ [도 2]

중세 후기에는 귀족이나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이 의뢰한 개인 소장용 필사본의 제작이 증가하였다. 이에 중세의 특징인 상징적인 표현에 머물지 않고, 매우 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로 세속적인 궁정이나 풍속의 기록도 보여준다.[도3]

▲ [도 3]

필사본에서 텍스트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이미지는 텍스트의 시작에 시선을 집중시키거나, [도4] 내용의 전환을 알리거나, 여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텍스트를 시작하는 첫 글자(initial)는 몇 개의 줄에 해당하는 큰 크기로 제작되며 텍스트 내용의 주된 인물이나 장면을 글자의 형태와 연결하여 장식하는 역할을 한다.[도5]

▲ [도 4]

▲ [도 5]

대부분의 중세 필사본에서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이미지가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야기나 신학적인 해석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필사본에서 이미지로 전달하는 이야기가 선형적인 시간의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시를 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의 하나로 창세기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이 필사본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를 위해 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보라색 염료로 염색한 송아지가죽 위에 은으로 만든 잉크로 성서를 기록하고 선명한 색채의 세밀화로 장식되어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호화로운 유물이기도 하다.[도6]

▲ [도 6]

이 페이지는 창세기 24장의 내용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텍스트 하단에 삽화가 그려져 있다. 왼쪽 페이지에는 아브라함의 하인이 아브라함의 명을 받아 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낙타를 끌고 길을 떠나는 장면이 보이며, 이어지는 오른쪽 페이지에는 하인이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나는 장면이 보인다. 리브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른쪽 페이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리브가는 다른 시간대의 장면 안에서 두 번 등장한다.[도7]

▲ [도 7]

왼쪽 편에는 리브가가 어깨에 물동이를 이고 나홀 성을 벗어나 우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우물로 가는 길은 그리스 양식의 작은 기둥들이 이어지고 그 길의 끝에는 의인화된 우물의 여신이 흐르는 물병을 안고 기대어 앉아 있다. 이야기는 계속 전개되어,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 리브가가 정면에 다시 등장하여 하인에게 물을 주고 그가 끌고 온 낙타 10필에게도 물을 먹인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하인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확신하도록 하였다.

연속되는 이야기를 제시하는 두루마리의 서사 방식을 수용하면서도, 하나의 화면 안에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두 개 이상의 장면을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후 중세 미술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6세기 초반에 제작된 이 필사본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반나의 여성으로 묘사된 우물의 여신 [도8]이나 열주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모티브가 잔존함에도 불구하고, 리브가의 판토마임과 같은 표현적인 제스처, [도9] 그리고 장난감같이 배경에 놓인 성을 제외하고는 평면으로 제시된 배경 위에 강한 윤곽선으로 제시되는 인물과 낙타들이 가능한 가장 단순하게 묘사되고 있어 리브가의 이야기가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는 점이다. 이 필사본에서는 고대 그리스 양식과 중세의 이야기 전달 방식이 독자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또한 성스러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매체에 담고자 했던 비잔틴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도 8]

▲ [도 9]

이후 전개된 중세의 필사본은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점차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미지들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촉발하기도 한다. 중세 후기에는 페이지 가장자리에 텍스트의 내용과는 무관한 세속적이고 풍자적인 시각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기도 한다. 이것은 영적인 명상 가운데 세상의 터무니없고 하찮은 것들 안에서 얻는 쾌감을 허용하는 여유를 보여준다.[도10]

▲ [도 10]

오랜 역사 안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다양한 관계를 돌아볼 때, 중요하게 남겨야 할 것들을 기록해야 하는 엄중한 과제가 예술적인 창의성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롭게 다루어져 왔음을 보게 된다.

captions
도1. The Book of Kells (an illuminated manuscript), 9th century, Folio 32v, Christ Enthroned.
도2. Opening from the Hours of Catherine of Cleves, c. 1440, with Catherine kneeling before the Virgin and Child, surrounded by her family heraldry. Opposite is the start of Matins in the Little Office, illustrated by the Annunciation to Joachim, as the start of a long cycle of the Life of the Virgin.
도3. Limbourg brothers, A illuminated page from the Très Riches Heures de Jean Duc de Berry showing the day for exchanging gifts from the month of January, 1410-11
도4. Folio 27r from the Lindisfarne Gospels contains the incipit to the Gospel of Matthew. 8th century
도5. The letter P as a historiated initial (depicting Peter) in an illuminated Latin bible, 1407 AD. Colored with paint and gold leaf
도6. Fragment of the Vienna Genesis,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tempera, gold, and silver paint on purple-dyed vellum
도7. Rebecca and Eliezer at the Well, from the Vienna Genesis,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도8. Pagan water nymph with a flowing jar, from the Vienna Genesis,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도9. Rebecca offers water Eliezer to drink, from the Vienna Genesis,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도10. Detail from a full border of a monkey playing a game (possibly blowing bubbles?), from the Isabella Breviary, Southern Netherlands (Bruges), late 1480s and before 1497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김희영 교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및 동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미국 시카고대학교 서양 미술사 석사를 거쳐 아이오아대학교 서양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며, 서양미술사학회장 및 한국미술이론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페이스북
  • 트위터

이 코너의 다른 기사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