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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서울 남산공원

(한국역사학과 황선익 교수)

한양의 수호산이자 안산, 목멱산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남산’이 있다. 그러나 서울의 남산만큼 유명한 남산은 없다. 한양 천도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남산은 한양도성의 남쪽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이자, 궁궐의 앞산 풍광이기도 했다. 이씨왕조를 구한다거나, 나무가 빽빽하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남산의 다른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은 상징적 역할과 경관적 의미를 대변한다.

한양의 안산(案山) 목멱산은 풍수상 주작(朱雀)에 해당하여 신성시 여겨졌다. 산에는 목멱대왕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산의 나무를 베는 것은 엄격히 금해졌다. 덕분에 남산은 서울의 그 어느 산보다 삼림이 우거졌다. 남산의 수려한 산수 경관은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창작 소재가 되었는데, 일월이 걸린 남산의 풍광에는 소나무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애국가에 담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오랫동안 유지된 남산 경관에 대한 전통적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양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남산 산마루에는 봉수대가 세워졌고, 산의 능선에는 성곽이 쌓아졌다. 남산의 북쪽 둔덕에는 남별영(금위영의 분영), 남산 동북쪽에는 남소영(어영청의 분영)이 설치되어 수도를 지키는 군영이 자리 잡았다. 남산의 ‘예장동’이라는 지명은 무예를 닦는 도량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군사상 한양을 지키던 남산은 외침(外侵)과 함께 질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 [조선신궁의 입구/ 출처 :서울역사 아카이브(H-TRNS-100420-899)

식민 지배의 거점이 된 남산의 근대

남산의 수난은 일본의 침략 때마다 거듭되었다. 임진왜란때에는 왜군이 예장동 인근에 진을 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후 일본인들은 고사(古事)를 들며 남산 북록 일대를 ‘왜성대(倭城臺)’라 부르곤 했다. 일본군의 남산 주둔은 청일전쟁을 거치며 조선군사령부 및 헌병대 사령부 설치에 이르게 되었다.

군대 뿐 아니라 한국 침략의 선봉에 선 일본 공사관과 한국통감부도 남산에 자리 잡았다. 일본은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거치며 일본 공사관이 민중의 파괴 대상이 되자 공사관을 남산 자락으로 이전했다. 결국 남산에는 한국통감부(1910년 조선총독부로 개편)와 일본군 사령부, 헌병대 등 식민 통치의 주요 기관이 자리하였고, 일본인 집단거류지가 조성되었다. 남산은 일본인 ‘혼마치(본정통, 현재의 충무로 일대)’를 배후하며, ‘그들의 공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898년에 경성 신사가 들어섰고, 이후 노기신사 등 일본인의 신을 숭배하는 신사와 절들이 남산에 세워졌다.

남산은 식민 통치의 상징 거점이면서 한편으로 일본인들의 공원으로 기능하였다. 1916년부터 남산 전역을 공원화하는 기획이 추진되었는데, ‘남산공원 조성계획’을 담당한 이는 일본인 조경학자 혼다 세이로쿠(本多靜六; 1866~1952)였다. 도쿄의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 메이지진구(明治神宮)를 비롯한 각종 국립공원을 조성하여 일본 ‘공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현지 조사를 하며 남산공원을 기획하였다. 그는 “세계 조영계의 추세가 삼림공원의 조성인데, 남산공원은 그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라고 평가하며, 기존의 한양공원과 왜성대공원, 장충단, 노인정 일대를 아우르는 남산공원 설계안을 작성했다.

공원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서는 “조선 고유의 산수풍경과 동식물, 역사를 존중”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남산공원을 찾을 수 있도록 대·중·소 순환도로를 만들 것을 주문하고, “경성이 제일 잘 보이는 국사당 앞에 전망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산공원은 그의 계획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전망 좋은 국사당’ 일대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들어서 일제 황민화 정책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소나무가 우거진 남산 자락에는 벚나무가 심어졌다.

▲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민족 공원으로 재탄생한 남산공원

광복 후 남산에 있던 일제의 신사와 시설들은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적으로 철거되었다. 그러나 식민 통치의 물리적· 사상적 거점 역할하던 남산의 역할은 독재정권 하에서 답습되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조선신궁 자리에 거대하게 들어서고, 봉우리에는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 지어졌다. 정권의 운명을 대변하듯 동상과 정자는 4·19혁명과 함께 파괴되었다.

서울의 상징 공간인 남산은 1950년대 후반 들어 민족적 공간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1959년 남산 기슭에 있는 숭의여고 교정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건립된 것이다. 1964년에는 장충단공원에 이준열사 동상이 세워지고, 1969년에는 김구, 안중근, 김유신 등의 동상이 서울을 내려다보는 남산 자락에 세워졌다.

1970년에는 조선신궁 터 일부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0월 26일 의거일에 맞춰 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서울에 처음으로 세워진 독립운동 기념관이기도 했다. 한때 일제 황민화 정책을 상징하던 남산은 민족운동을 표상화하는 공원으로 변모했다. 장충단공원, 백범광장, 소파로와 소월길 등으로 구성된 남산에는 수많은 역사 인물의 동상과 기념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그야말로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 출처 :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시민들의 안식처

볼거리와 놀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남산은 새로운 도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68년에는 식물원이, 1971년에는 동물원이 조선신궁 자리에 세워졌으며, 1975년에는 남산타워(현 N서울타워)가 세워져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서울의 문화시설이 확충되어 감에 따라 남산의 역할은 변해갔다. 인위적인 공원이 아닌 자연공원으로서 입지를 되찾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에 따라 남산식물원과 동물원은 철거되었다. 철거 후 발굴 과정에서 조선신궁은 물론 한양도성의 흔적과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양도성 복원을 추진하던 서울시는 이 자리에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남산은 서울의 허파라고도 불린다. 서울 도심 빌딩숲 한가운데 자리한 남산은 바쁘고 지친 시민들의 숨을 트이게 한다. 서울의 팽창으로 인해 남산에는 ‘강남’으로 향하는 터널들이 뚫렸고, 이로 인해 자연 경관과 촌락의 원형이 훼손됐지만, 여전히 도심 한복판 대형 녹지로 사람들을 쉬게 한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역사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들이 즐비하다.

오랫동안 훼손됐던 소나무 숲은 복원되어 ‘소나무 힐링 숲’이 되었고, 터줏대감 ‘주한독일문화원’은 한국과 독일을 잇는 문화 교량이자 전망 명소로 손꼽힌다. 그 외에도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 국립극장과 한옥마을 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한양의 남단이었으나 이제는 서울의 한가운데 자리하게 된 남산공원은, 서울시민뿐 아니라 누구라도 찾기 쉬운 안식처이자 역사공원이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황선익 교수
국민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하고 2017년 국민대학교 글로벌인문지역대학 한국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서울시 문화재위원, 국립대한민국임시 정부기념관 운영자문위원 등이 있으며, 한국근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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