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임금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 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요가 화 지방을 돌아볼 때 그곳을 지키는 봉인(封人)이 장수(長壽)·부(富)·다남자(多男子)로 세 가지를 축원한 말)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하였다(『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1월 15일 계묘).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보물 1710호)
우리나라 다섯 번째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에는 방어를 위한 성으로써의 기능 뿐만 아니라 화성의 잉태부터 축성 과정, 그리고 그 완성을 위한 많은 문화 자산이 깃들여 있다. 남문인 팔달문·창룡문(동)·화서문(서)·장안문(북) 등 4대문과 북·남수문 2개의 수문, 동·서장대와 동북·서북공심돈, 내부의 화성행궁과 이를 잇댄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원 ‘화성(華城)’이 1997년 12월 3일 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석굴암, 종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창덕궁과 함께 5번째, 세계적으로는 380번째였다. 현재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은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2010,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 한국의 서원(2019, 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필암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무성서원·돈암서원), 가야고분군(2023, 대성동고분군·말이산고분군·옥전고분군·지산동고분군·송학동고분군·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반구천의 암각화(2025,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등 15개이다.
유네스코는 수원 화성을 지정하며, “근대 초기의 군사 건축으로서 동서양의 과학기술을 통합해 발전시킨 건축물”이라고 평가했다. 서구인들의 눈으로 우리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겠으나, 화성은 내년이면 240주년을 맞이한다. 1796년에 준공된 화성은 정조(正祖)시대 조선의 역량이 총동원되었으며, 정조와 당대인들의 아름다운 꿈과 원대한 구상, 세련된 문화 수준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한 화성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답사를 해 본 이들은 알겠지만,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 우리나라의 수많은 성들과는 그 맛이 다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경이로움에 마치 이국(異國)의 한 도시 성곽을 구경하듯 감탄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30년쯤 1394년(태조 3년), 노쇠한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이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도읍지로 한양(漢陽)을 선정하여 도읍을 옮기고 도성과 왕궁을 마련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4백년 후인 1794년(정조 18), 갖은 파란 끝에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를 꾀하였던 정조는 한양 남쪽 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華城 : ‘수원성’은 일제시대 이후 붙여진 별명)‘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러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우선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이 지난 1789년, 죄인으로 단죄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초라한 무덤인 영우원(永佑園 : 양주 배봉산, 현 서울 시립대 뒷산에 위치)을 원래 수원 읍치가 있던 화산(花山) 아래의 천하명당 자리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격상된 위의를 갖추어 놓았다(후일 융릉). 세자의 원소(園所)임에도 이곳에는 왕릉에 준하는 치장을 하여 인조(仁祖) 아버지의 장릉(長陵)이후 처음으로 봉분에 화려한 병풍석(屛風石)과 와첨석(瓦詹石)을 두르는 등 정조대에 도달한 문화 중흥의 역량과 수준을 반영한 극도로 세련된 표현 기법을 사용하였기에 조선후기 석물 조각의 한 정점을 이루어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5년을 기다려 살아있다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함께 육순을 맞는 1794년 정월에 효도의 유교윤리를 명분을 내세우며 행궁(行宮)과 화성건설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정조는 착수한 바로 그 해에 서둘러 화성행궁의 기본 시설을 완성한 후, 1년 후인 1795년 윤2월에는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進饌宴]를 대대적으로 치르고, 즉위 20주년이 되는 이듬해 1796년에는 화성 성역의 전체 사업을 완결짓게 된다.
▲「화성행행도병(반차도)」(리움미술관 소장)
「화성행행도병(반차도)」(리움미술관 소장)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이 있는 화성에서 개최한 행사 장면을 그린 8폭 병풍. 오른쪽 제1폭 명륜당 참배, 제2폭, 제3폭 혜경궁 회갑잔치, 제4폭 경로잔치, 제5폭 야간군사훈련, 제6폭 활쏘기와 불꽃놀이, 제7폭 한양으로 돌아오는 행렬, 제8폭 환궁길 한강 배다리로 구성되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불렀던 이 엄청난 사업은 낙성연을 갖기까지 단지 34개월의 시간만이 소요되었다. 여기에는 정조의 남다른 열정, 신하들의 힘이 효과적으로 집결되는 등, 당시 중흥을 맞았던 정조시대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남긴, 세계에 유레없이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들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목수, 석수의 이름과 작업과정까지) 작업내용과 들어간 돌 한 덩이, 못 하나까지도 세밀히 기록한 완벽한 자료들은 당시 조선의 높은 관리능력과 책임성, 그리고 후대에의 배려와 문화적 자신감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전체 화성성역이 끝난 후 남겨진 공사보고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1795년 윤2월 혜경궁 홍씨의 수원행차 및 회갑연 행사 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통해 우리는 화성의 여러 시설물의 건설과정과 준공된 원형, 행사일정과 진행과정 들을 완전하게 알아내고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1년 간행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이 책은 공사에 들어간 물품의 수량과 단가, 장인들에게 지급한 급료까지 하나하나 기록하여 당시 경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장인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 지역, 근무일수, 담당 작업 등까지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표지와 ‘화성원행반차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표지와 '화성원행반차도‘. 1795년 윤2월 9일에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으로 화성에서 있었던 7박 8일 간의 행사를 기록하였다.
화성 건설은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일이었기에 여기에는 국왕으로부터 관료, 백성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이 참여한 정조시대 조선왕조의 국력이 집약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수원에 국한된 한 지역의 일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사업으로 추진되어 오늘의 민족유산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화성은 200여 년 동안의 풍상과 한국전쟁으로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5년부터 당시로서는 막대한 총공사비 16억6천6백만 원을 들여 4차년 계획으로 복원하였으며, 성곽 주변 정화사업으로 16억2천만 원을 투입하였다.
▲ 1920년부터 벽체가 무너져 내린 동북공심돈의 모습과 복원된 동북공심돈
▲『화성성역의궤』의 동북공심돈 설계도 모습
『화성성역의궤』의 완벽에 가까운 공사기록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화성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반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행궁은 헐려 나갔고, 성곽은 날로 쇠약해진 왕조와 함께 무관심 속에서 무너져갔다. 한국전쟁 때 격렬했던 시가전은 화성을 폐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간 뒤 우리나라 고유의 빼어난 ‘군사시설물’의 멸실을 안타까워하던 사람이 있었다. ‘군인’ 박정희가 바로 그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 75년 대대적인 화성 복원작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 성공을 거뒀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당시 무지막지하게 벌어졌던 문화재 복원 사업 가운데 화성에 대해서만큼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한결같이 그 성공의 열쇠로 화성 공사 기록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를 지목한다.
1796년 화성 건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정조의 명으로 발간이 추진돼 1801년(순조 1) 금속활자 정리자로 인쇄된 『화성성역의궤』는 전체 640여 장의 방대한 분량이 머리책(수권) 1권, 몸책(본권) 6권, 부록 3권으로 구성됐다. 머리책에는 공사 일정과 공사 감독관의 명단·직위, 건물 각 부분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을 실었으며, 몸책 제1~4권에는 공사 진행 중 오고 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어전회의 기록, 상량문, 공장들의 명단과 그들에게 지급한 노임 규정 등을 기록했다. 이어 5~6권에는 시설물별로 짓는데 들어간 각종 자재의 명칭과 수량, 비용의 출납 내역을 소상히 밝혔으며, 행궁 건설에 관련된 기록을 모은 부록은 공문서와 상량문, 행궁 안 각 건물에 들어간 자재의 수량을 적어놓았다. 심지어는 공사 책임을 맡은 관료들, 목공·석공의 이름, 인부가 아플 때 무슨 약을 주었는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재의 수원 화성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도 이 『화성성역의궤』를 참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거중기는 부품도까지 남아 있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 일종의 설계도 격인 이 그림들을 통해 조선시대 건축은 물론 그림인 판화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특징은 작업 과정이 모두 ‘실명제’였다는 점이다.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지방에서 동원된 장인들과 단순 노무자들의 명단과 임금까지 낱낱이 기록돼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 축조에는 석수·목수·와벽장 등 22가지 직종에 종사하는 장인 1,856명이 참여했으며, 장인들이 받는 하루 임금은 조수 1명이 딸린 석수의 경우 쌀 17되 가량이었다. 물자 내역도 자세하다. 근처 숙지산에서 떼내온 돌 19만5241덩어리, 서까래용 목재 1만4212개, 송판 2300닢 등등. 공사에 들어간 인력과 물자가 이렇게 분명하다 보니 부실 공사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화성이 왜 아름답고 튼튼한가. 『화성성역의궤』는 그 비밀을 일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화성
정조는 무슨 목적으로 멀쩡한 고을 하나를 옮겨서 팔달산 아래에 새로운 신도시를 만들었을까? 오로지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기 위해 백성들을 낯선 땅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화성 신도시 건설에 부친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효성심이 크게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에는 그보다 더 큰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계획이 깔려 있었다.
정조의 세밀한 신도시 구상은 그 휘하 당대 대학자들이 전통적 지식에 최신의 외래지식을 종합 절충하여 제시한 것을 토대로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의 경험에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제시한 치성(雉城), 옹성(甕城) 등 성곽축조의 제안을 수용하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이래 수원을 중시한 구상들을 받아들였으며, 숙종대 이후 서울성곽과 전국 산성의 축조 경험을 광범위하게 원용하였다. 또한 휘하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 하여금 중국의 성제(城制)와 축성 기술을 연구하게 하여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도르래)를 설계하도록 하고, 이것을 화성성역에 이용하는 등 기존의 축성술에 청나라로부터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당시로서는 최신의 공법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구현하였다.
정약용은 수원화성의 축성을 위하여 모두 7편의 글을 작성하여 왕에게 바쳤다. 곧 「성설」,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기중도설」, 「총설」 등이다. 이 글들은 수원화성의 기본적인 형태와 규모, 각종 방어 시설, 그리고 축성 공사와 관련된 공사 방법 등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는 재래의 축성술을 계승한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이제까지 조선의 성곽에서 설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시설들이 많이 있었고, 공사 시공을 위한 새로운 기구들이 여러 가지 고안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산이 오랜 기간 조선의 종래 성체를 검토하고 중국의 관련 서적들을 면밀히 연구 검토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중에 특히 기구의 고안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활용한 것이었다.
정조는 1793년 12월 6일에 화성건설의 전체 책임자로 당시 총리대신인 채제공(蔡濟恭)과 실무책임자로 훈련대장을 지낸 조심태(趙心泰)를 감동당상에 임명하였다. 12월 8일에는 화성성역소를 설치하고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인 도청에 이유경(李儒敬)을 임명하였다. 그 하위 단위는 작업관리 및 현장감독 분야와 사무관리 및 지원부서로 나누었다. 화성 성역에 동원된 기술자는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이, 대장장이 등 549명이었다.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화성성역에서는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지 않고 전부 임금을 주어 임금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작업효율을 높였으며, 벽돌과 석물 등 건설의 여러 부자재도 표준화하여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또한 화성성곽은 물론 행궁과 여러 건물, 시설물들을 일거에 건설하되 그것이 평상시의 기능과 비상시의 군사적 기능을 함께 갖추도록 설계하고, 동시에 이 인공적 시설물이 주위의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하였다.
둘레 5,743미터의 장대한 성곽 남북에는 팔달문(八達門), 장안문(長安門)이 웅장하게 서고, 팔달산 꼭대기에는 서장대(西將臺)가 들어섰으며, 산기슭에는 행궁(行宮)을 더 늘려 건설하였다. 광교산에서 흘러내린 유천(柳川 : 지금의 수원천)의 물줄기가 머무는 곳엔 북지(北池), 남지(南池) 등 아름다운 연못이 축조되고, 그 곁 화목(花木) 사이 전망 좋은 자리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란 멋들어진 정자가 서고, 유천 위로는 남북의 수문(水門)을 세워 물의 흐름을 관리하였다. 또한 송금절목(松禁節目)을 내려 수원 부근 사방 30리에 소나무를 심고 보호하였으며, 화성 외곽으로 만석거(萬石渠 : 일왕저수지 - 일명 조재정방죽), 만년제(萬年堤 : 화성군 안녕리 소재), 축만제(祝萬堤 : 농업진흥청 옆 서호)등 여러 저수지를 파서 인근의 대유둔(大有屯)이란 둔전을 설치하는 등 수원 일대 드넓은 농토의 관개가 가능하게 되어 농업생산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새 도시 건설의 배려는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수원에 유수부(留守府)와 장용위영(壯勇衛營)을 설치하여 경기도 일대의 행정 군사의 중심지로 그 위상을 높였으며, 수원이 행정기능과 소비기능, 생산기능을 함께 갖추어 대도회(大都會)로서 자족적 발전이 가능하도록 도시 기반시설을 마련하였다. 특히 도시재정의 확보책으로 상업의 진흥과 인구의 증대를 위해 화성 안쪽 대로변에 수원의 부호와 지주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가 하면, 시전(市廛)과 시장, 상인을 유치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와 장사하는 서울 상인들에게 인삼 등 특정 물품의 대외무역 독점권을 주어 이곳을 근거지로 삼게함으로써 산업의 진흥도 꾀하였다. 이때 대규모의 소(牛)시장 설치는 수원갈비의 명성을 낳게 한 배경이 되었다.
수원을 발전시키려던 이러한 정조의 노력은 자신의 원대한 꿈의 실현 과정이었다. 사도세자의 산소를 모시었기에 수원은 정조에게 선산이 있는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으며, 더욱이 장차 세자의 나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 헤경궁 홍씨를 모시고 가서 살아갈 곳으로 생각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신풍(新豐)’이라 아로새겨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남겼다. 이렇게 자족적인 신도시로 화성을 가꾸고자 했던 정조는 화성의 목표를 “집집마다 부유롭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한다는[戶戶富實 人人和樂]”이라 삼았던 것 같다.
정조가 다녀간 이후에도 새 수원읍에서는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공사가 계속 이어졌다. 주민들의 살림집도 속속 들어섰으며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5월에는 관청이 모두 완성되었다. 그리고 7월, 새 고을로 주민 이주가 시작된 지 만 1년이 되었을 때 고을에 모여든 주민의 숫자가 보고되었다. 옛 수원 고을과 그 주변에서 옮겨 온 세대수가 515호, 팔달산 주변의 원거주민이 63호이고 수원에 새 고을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타관에서 모여든 세대수가 141호, 도합 719호였다. 이제 수원 신읍은 행궁을 비롯한 객사와 관아가 번듯이 들어서고 700여 호의 집들이 모인 신도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
결국 화성은 정조의 노후 안식처로 대비하기 위하여 행궁과 성곽이 장대하게 건설되고 행정·군사·경제기반, 심지어 휴식과 유락 시설까지도 골고루 갖추어 상왕(上王)의 노후생활과 민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자족의 새로운 도회를 건설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화성의 경관과 주변의 문화재
지금은 수원 춘팔경(春八景)과 추팔경(秋八景)은 없어져 버렸지만, 1796년 10월 16일 화성성역의 낙성연을 진행할 당시에 이미 수원에는 화성성역의 일환으로 여러 자랑스러운 명소와 아름다운 경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에 화성성역의 주역들은 수원 춘팔경과 추팔경의 열여섯 장면을 병풍 그림으로 그려 낙성연 장소인 행궁에 진열해 놓고 화려한 낙성연을 벌였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화산의 정경(華山瑞靄), 맑은 날 물안개 낀 수원천의 풍경(柳川晴烟), 꽃놀이가 한창인 매향교(午橋尋花), 뽕나무 숲 아름다운 관길야(吉野觀桑), 향음주례가 행해지는 신풍루 광경(新豊社酒), 농요 소리 드높이 농사가 한창인 대유돈의 들녁(大有農歌), 말들이 이리저리 뛰노는 영화역의 풍경(華郵散駒), 연꽃 사이로 물새가 떠 다니는 연못 정경(荷汀泛鷁) 그리고 흰비단을 펼친 듯 물살 장쾌한 화홍문의 경관(虹渚素練),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 이룬 만석거 주변 풍경(石渠黃雲), 맑은 하늘 달밝은 가을 밤의 용연(龍淵霽月), 저녁별 찬란한 구암의 경치(龜巖返照), 가을 사냥이 한창인 화서문 밖의 풍경(西城羽獵), 활쏘기가 벌어진 동장대 정경(東臺畵鵠), 국화꽃 벌여놓고 완상하는 미호한정의 가을 풍경(閒亭品菊), 늦가을의 화양루 눈구경(陽樓賞雪) 등 16폭의 운치있는 그림을 상상만 해도 화성 주변의 아름다움이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대장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희자되고 있는 경관은 어느 때부터인가 수원팔경(水原八景)으로 정리되었다. 흰눈 덮힌 광교산의 장관(光敎積雪), 연꽃 곱게 피어난 북지(北池賞蓮), 장쾌한 물보라가 넘쳐나오는 화홍문(華虹觀漲), 방화수류정 옆 용연에서의 달맞이(龍池待月), 남제의 긴 버드나무 숲길(南堤長柳), 남기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八達晴嵐), 해질녘 낙조 드리운 서호(西湖落照), 진달래 흐드러지게 핀 화산(花山杜鵑)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수원의 옛모습을 대표하는 이들 마져도 어느 사이 없어져 버렸고 또 사라져 가고 있다.
화성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수원성곽’으로 일괄 처리되어 문화재 지정을 받은 이후, 수원의 각 시설물들은 각각의 개성이나 가치를 올바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학자의 노력과 화성 건설 200주년을 맞아 그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오늘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앞으로의 과제는 주변의 유물 유적의 보존과 복원이라는 지속적인 관심과 역사 도시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 수원 화성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