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하면 우리는 왕골로 짠 화문석이나 6년근 인삼, 강화 순무, 강화 사자 약쑥 정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대표적 토산품은 토양과 기후변화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역사여행을 하다가 배고픈 허기를 채우려면, 강화도 풍물시장과 전통시장, 강화군청 주변의 이름난 식당에서 강화섬쌀밥과 순무김치를 곁들여 한번은 먹어야 할 젓갈갈비, 갯벌장어구이, 꽃게탕, 밴댕이회를 먹어볼 만하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핫플’을 검색하면 곧바로 찾아갈 수 있다.
시장기를 해결했다면, 강화 한 바퀴 돌고 다리 건너 석모도나 교동도를 건너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80년대까지는 신촌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연인들이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강화도를 거쳐 배를 타고 석모도에 들어가 일부러 배 시간을 놓쳐 민박집에서 1박을 많이 했다고 한다. 60대 후반의 장년들은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기나 할까.
이렇게 먹거리가 풍부한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때문에 이곳에 올해에 수도권문화유산센터가 건립될 예정에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고려, 조선, 근현대사가 모두 어우러진 역사의 현장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가 압축된 곳은 그리 흔치 않다. 특히 강화는 1231년 몽골침략에 맞선 40년간의 고려 임시 수도였다. 때문에 고려 수도였던 개경(현 개성) 다음으로 고려시대 왕릉과 관인 무덤, 성터나 사찰터 등 역사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 [사진 2] 강화부전도(1872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원래 강화는 고려 태조 왕건의 해상세력 기반이 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漢陽)의 외곽을 지키는 배후기지였다. 한강을 아우르고 있어서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부터 ‘보장지처(保障之處)’로써 유사시 왕이 피란할 수 있는 북한산성(北漢山城),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 그리고 정조(正祖) 때 축성한 수원의 화성(華城)과 함께 한양의 외곽경비를 담당하던 중요한 지역이다. 또 강화는 고려와 조선 왕족의 절규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섬이면서도 그 규모가 적당하고 한양과는 지척에 있어서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고려말에는 공민왕에 의해 나이 어린 조카 충정왕을 이곳으로 유배하여 독살하였고, 아홉 살의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이곳으로 추방되었다가 곧 살해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사사(賜死)된 안평대군과 폭군으로 쫓겨난 연산군이 강화도에 귀양 왔다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교동에서 병사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붕당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숱한 왕족이 당쟁의 제물이 되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도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여덟 살의 영창대군이 역모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펄펄 끓는 방바닥에서 절규하며 죽게 했다. 또 배다른 아우인 능창군도 이곳에서 자살케 하였고, 광해군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강화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은신군·은전군도 강화로 유배되었는데,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철종이 된 ‘강화도령’ 원범(元範)이다.
지금이야 국토분단으로 막강 해병이 지키는 살벌한 곳으로만 기억할 뿐이고, 민통선인 제적봉 통일전망대와 연미정(燕尾亭)에 올라서면 들려오는 대남방송의 거친 목소리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개풍군(開豊郡)의 흙내음, 오래전 북쪽에서 황소가 떠내려온 유도(留島)의 처연함은 이곳에 살고 있는 북한 실향민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옛날 전쟁 속에 이곳에서 쓰러져 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 [사진 3] 강화도 초입의 연미정(燕尾亭) (홍영의 제공)
특히 390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 때부터 전해오는 ‘경징이 풀’에 얽힌 사연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구 강화대교가 걸친 갑곳(甲串)의 맞은 편 해안 갯벌에는 꽃인지 풀인지 모를 불그레한 펄풀이 널려있다(나문재나물·칠면초·함초). 이 펄에는 당시 호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궁중의 비빈들과 고관대작의 부녀자, 일반 백성들이 배를 기다리며 수십 리나 널려 있었는데, 강화도 검찰사인 김경징(金慶徵)이 그의 어머니와 아내, 그의 가산(家産) 만을 먼저 배에 태워 피난케 하였다. 곧 청나라 병사가 들이 닥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말굽에 밟히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그 참혹한 형상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죽어가던 사람들은 오랑캐를 욕한 것이 아니라 ‘경징아 경징아’ 부르며 김경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김경징은 강화부를 다스리는 동안 패악질이 너무 심한 사람이었다. 김포 통진 일대의 나라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실어 왔으나 그의 친구 이외에는 얻어먹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강화로 침입한 청나라 군대와는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미리 마련해 둔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강화를 도망쳐 버렸다. 때문에 그 펄에 흘린 원한의 피가 바로 붉은 펄꽃으로 피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아물어 잊어버릴지라도 김경징이 행한 부조리는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사(邪)’를 ‘정(正)’이라 하며, ‘정’을 ‘사’라 호도하는 경징이과 망녕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생각할 때, 이들에 의해 쓰러져 간 백성들의 고초에 마냥 가슴만 아파해야 할까.
강화도는 혈구군(穴口郡)·해구군(海口郡)·혈구진(穴口鎭)이라 불리었다가 940년(태조 23)에 강화현(江華縣)으로 바뀌었다. 이때 비로소 ‘강화’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직전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강도(江都)’라 칭하고 몽골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개경 환도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1천여 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함께 인질로 삼은 고관의 가족들을 싣고 진도로 남하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피해가 컸으며, 충렬왕 때에는 잠시 인주(仁州, 현재의 인천 부평)에 병합되었다가 1377년(우왕 3)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는 부윤을 두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잠시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였는데, 이때 다시 유수로 승격시켰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김상용(金尙容) 등에게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인조는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청나라에 끌려간 봉림대군(이후 효종)이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강화도에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일이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강화도에는 내성, 외성, 13진보, 53돈대 등이 축조, 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또 1678년(숙종 4)에는 강화부윤이 진무사를 겸직하도록 하고 강화만 일대를 방어하는 오영(五營)을 통솔하게 하였다.
▲ [사진 4] 강화도를 지나 외규장각으로 행군하는 프랑스군(국립소재문화재재단 제공)
▲ [사진 5]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10주년 전시 포스터(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866년(고종 3)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 강화성을 함락하고 약 1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에게 패퇴하자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병인양요’이다. 강화성이 함락될 때 전 병조판서 이시원(李是遠) 형제가 독약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외규장각(外奎章閣) 의궤 반환 문제가 이 때문에 일어났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일전을 치루었다. 미군이 광성보(廣城堡)와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을 점령하였는데,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魚在淵) 이하 모든 장병이 끝까지 싸우다가 중상자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 싸움은 미 해병대와 강계(江界) 포수(砲手)가 치룬 ‘한미전쟁(韓美戰爭)’이지만,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해외 전사자(휴멕키 중위)가 나온 전투였다. 미 해사(海士) 교회에 그의 추모비가 있다. 때문에 주한미군과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는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 [사진 6] 빼앗긴 콜로라도호 함상의
어재연 장군 ‘수(帥)’ 자기
(국립소재문화재재단 제공)
▲ [사진 7] 미국 해사박물관에서 장기임대 형식으로
136년만에 돌아온 ‘수(帥)’ 자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제공)
이 두 양요를 거친 뒤 1874년에 강화도 동쪽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여 외침에 대비하였으나, 이듬해에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나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 군함의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렇게 강화도는 지리적 위치로 해서 역사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 [사진 8]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사적 137호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로
비스듬이 경사진 굄돌 위에 50톤이 넘는 덮개돌이 올려져 있어,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엿볼 수 있다.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2000년 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홍영의 제공).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는 강화도에는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양사면 북성리 패총 등지에서 신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동막리와 북성리 패총 유적은 본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바가 있다. 또한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분포한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길상면의 삼랑성(三郞城) 등을 통해서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9] 강화 곤릉(고종의 모인 원덕태후) 2004년 발굴 전경. 남한에 두 개뿐인 왕후릉의 하나이다(홍영의 제공).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사적과 보물, 천연기념물 등 국가 문화유산이 분포하고 있음에도 강화 태생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강화의 지역적 특성과 풍부한 물산을 생각할 때 의아스런 점이 있으나,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며 강화학파(江華學派)의 대표인 이건창(李建昌)과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된 황사영 백서사건의 주인공인 황사영(黃嗣永),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1958년 1월 평화통일론과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투옥되었다가, 1959년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위반으로 사형된 조봉암(曺奉岩)도 이곳 출신이다.
▲ [사진 9] 강화 곤릉 출토 청자 유물(국립문화유산원구원 제공)
이렇듯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한 강화도에 올봄엔 가족과 연인이 발길을 한번 돌려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강화역사박물관 관람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보고 느끼는 감성 답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