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공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녹지이자 ‘근린공원’이다. 압구정동, 신사동, 논현동, 청담동의 중앙인 과거 ‘영동’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에는 안창호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다. 공원의 이름 ‘도산(島⼭)’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 안창호가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섬(하와이)의 기개’를 잊지 못하고 스스로 지은 또 다른 이름[號]이다.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미주와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그의 묘소가 서울 강남에 자리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도산공원 전경>(C)황선익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안창호는 평남 강서군 초리면 일명 도롱섬이라 불리는 봉상도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신식 학문을 익히며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학업 대신 한인 동포를 결속시키는 길을 택하여 민족지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지도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주창하고, 한인들의 안정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는 등 그야말로 동분서주,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후 안창호는 삼엄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수감과 병보석을 거듭하다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도산의 가족들은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에 살고 있어 임종조차 볼 수 없었고, 그의 고향 친척들도 그의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도산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일제는 장례까지 통제하고, 심지어 묘소를 찾는 사람까지 단속하였다.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가족과도 만나지 못한 도산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 <젊은 시절 안창호,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 안창호, 국내 압송 후 안창호>
광복 후가 되어서야 그를 존경하는 인사들이 때가 되면 망우리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 문제가 크게 제기되면서, 애국지사들의 묘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특히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안창호 묘소의 ‘격’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영동지구(현 강남구 일대) 개발이 모색되면서 도산의 유해를 봉환한 묘소 및 공원을 이곳에 조성하자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1971년 도산선생기념사업회는 서울시와 함께 2억원을 들여 영동지구 성동구 학산동 산52 및 압구정동 산20에 걸친 1만여 평에 ‘도산공원’ 건립을 발표하였다. 이어 4월 15일 도산공원 기공식이 열리고, 이듬해에는 도산공원에서 경부고속도로 진입 입구에 이르는 길이 ‘도산로’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강남 한복판에 도산공원이, 그리고 도산대로가 자리하게 되었다.
▲ <1975년 도산공원 전경/국가기록원>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그대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건전한 인격을 갖춰라.”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 <도산공원 전경/ 비석>
도산은 수많은 명문과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글들이 돌에 새겨져 도산공원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1971년 도산공원 조성 계획 당시 서울시와 기념회 측은 공원 내에 도서관과 기념관 등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90년대 후반 들어서야 일부 현실화되었다. 1998년 11월 도산안창호기념관이 개관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안창호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알려주는 유물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도산공원은 안창호·이혜련 묘소와 동상, 그리고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교육·전시공간이 되었다.
▲ <도산안창호기념관 전경, (C)도산안창호기념관>
허허벌판이던 도산공원의 주변은 상전벽해 하여 명품거리가 되었다. 그런 ‘강남’과 이색적인 듯 하지만, 사실 도산공원은 이 곳의 터줏대감이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도산공원에서는 치열한 삶을 살다간 독립운동가의 인생 역정(歷程)을 살필 수 있다. 혹은 치열한 일상 속에서 쉼과 함께 사색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