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 궁궐이라 하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한양 정도(定都)와 함께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의 위상을 가졌던 곳이 경복궁이다. 법궁이란 왕조의 공식 궁궐로서 조회나 사신 접대 등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공간을 말한다. 종묘가 조선 왕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법궁이자 한양도성의 중심축”
경복궁은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가장 먼저 위치가 정해진 시설이었다. 먼저 경복궁의 위치를 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종묘와 사직, 시장과 도로를 비롯한 기타 시설들이 배치되었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제도를 담았다고 전해지는 『주례(周禮)』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 앞쪽에 관아, 뒤쪽에 시장을 배치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도시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궁궐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복궁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중심축이기도 했던 것이다.
태조 4년(1395) 일단 완성된 초기의 경복궁은 약 755칸 규모로, 아직 후대의 장려한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평탄하고 넓은 대지 위에 남북을 잇는 주요 건물들, 즉 침전-편전-정전-정문은 이 시기에 일단 완성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조선 초 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담당한 정도전은 궁궐의 이름을 대대로 이어지는 군자의 복을 뜻하는 “경복(景福)”으로 짓고, 전각들에도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담은 이름들을 부여하였다. 임금이 휴식을 취하는 침전에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복을 누리라는 의미의 강녕전(康寧殿), 평소 신하들과 만나 정무를 의논하는 편전에는 정치의 올바른 이치를 늘 생각하라는 의미의 사정전(思政殿),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정전에는 인재를 찾고 등용하는 데 부지런하라는 뜻의 근정전(勤政殿)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금에게 평소부터 마음을 수양하여 나라를 다스릴 기틀을 닦으며, 늘 바른 정치를 생각하고 인재를 부지런히 등용하기를 촉구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경복궁의 위상은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정종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시도했으며,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 역시 자신이 죽인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보다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지어 머무르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태종 역시 경복궁이 갖는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부정할 수는 없었고, 사신 접대나 조하(朝賀) 등 공식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태종 12년(1412) 경복궁 내 서쪽 구역에 경회루(慶會樓)를 건설한 것은 그러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
경복궁과 개인적인 악연을 갖고 있지 않은 세종은 즉위 중반부터 경복궁으로 이어하여 거주하면서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교태전(交泰殿) 등 여러 전각을 새로 건립하고, 강녕전, 사정전 등의 기존 전각을 증수하며, 세자가 사용할 동궁(東宮) 영역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의 정문 이름이 우리가 아는 광화문(光化門)으로 정해진 것도 세종 8년(1426)의 일이다. 법궁으로서의 경복궁은 태종대와 세종대의 대대적인 개축 및 보완 작업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후 조선 전기 국왕들은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 및 성종대 정비된 창경궁을 이궁으로 활용하는 양궐체제(兩闕體制)를 운영하였다.
▲ 조선 전기 경복궁도, 서울역사박물관 복원
경복궁은 명종 8년(1553) 화재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欽敬閣) 등의 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겪기도 했지만, 1년 만에 복구되어 법궁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미증유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한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다른 궁궐 및 관아 건물들과 함께 불에 타버린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가 한양을 떠나 파천할 무렵 도성 백성들이 어지러이 약탈하는 과정에서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양에 들어왔던 일본군 장수나 승려들이 궁궐의 아름다운 자태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음을 감안하면,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에 경복궁이 타버렸는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사실은 일본군이 물러갔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 소실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 조정은 종묘 및 궁궐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법궁으로서 경복궁이 가장 먼저 중건의 대상으로 고려되었던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중건에 들어가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논의도 있어서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경복궁 중건을 고려했으나, 결국 경복궁은 27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고 빈터로 남아 있게 되었다.
다만 조선 조정이 경복궁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군사를 파견하여 경복궁 터를 수호하였으며, 담장을 수리하고, 의례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영조는 경복궁 유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거둥하여 의례를 거행하거나, 교서나 훈유(訓諭)를 반포하거나, 기념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경복궁이 갖는 조선 전기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은 조선 후기에도 유지되고 있었고, 이후의 국왕들은 그 상징성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광과 상처가 공존한 궁궐, 경복궁의 근대사”
오랫동안 빈터로 남겨져 있던 경복궁이 중건된 것은 고종 때였다. 고종 2년(1865)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는 선왕들의 유지라는 명분으로 경복궁 중건을 논의하도록 명령하고, 그 총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일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실무를 담당한 영건도감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갖지는 못했지만, 공사 현장을 지속적으로 둘러보고 현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등 실질적으로 경복궁 중건을 주도하였다. 이는 2018년 발견된 『경복궁영건일기』에 수록된 「경복궁영건기」에서 경복궁 중건을 “대원위 합하가 지혜와 명확한 판단으로 임금을 잘 도운 결과”라고 칭송하고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흥선대원군은 왕조의 중흥을 내걸고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재정적 부담이나 병인양요를 비롯한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추진력 하에 경복궁 공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고종 5년(1868) 완공된 경복궁은 조선 전기보다도 큰 규모로 중건되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건물 밀집 정도는 태조대에 비해 5~6배 정도로 추정된다. 교태전 동쪽에 대비전(大妃殿)이 추가로 마련되었으며, 궁궐 서북쪽에는 국상(國喪)이 났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상장례 용도의 전각들을 별도로 조성하였다. 광화문 역시 기존보다 4척 7촌 높여 새로 건립되었고, 광화문 앞길도 조선 초를 모범으로 삼아 전반적으로 정비되었다. 여기에 더해 고종은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를 조성하고 후원 영역을 북문 밖으로 확장하였으며, 건청궁(乾淸宮)을 건설하고, 창덕궁에서 집옥재(集玉齋) 등을 건청궁 서쪽으로 옮겨오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고 향원정(香遠亭)을 지은 것도 고종 때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경복궁의 모습은 이처럼 대대적으로 중건된 고종 때의 경복궁과 연결되어 있다.
▲ 북궐도형
하지만 중건된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의 염원과 달리 왕조 초기의 전성기를 되살리지 못했다. 경복궁 중건 비용으로 인한 민심 이반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경복궁은 또다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고종 31년(1894)에는 청일전쟁을 도발하려던 일본군에게 침입을 당했고, 이듬해에는 고종이 건설한 건청궁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벌어졌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난 이후 다시는 경복궁에 돌아오지 않았고, 경복궁은 방치된 빈 궁궐인 채로 망국을 맞이하였다.
근현대 한국사의 흐름 속에 경복궁에 난 생채기는 더욱 깊어졌다. 일제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경복궁의 입지에 주목하여, 1916년부터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를 총독부 청사 신축 부지로 삼고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 내부의 건축물 다수가 해체된 것은 물론이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도 철거될 운명에 놓였다가 반대 여론에 의해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져 겨우 살아남았다. 광화문 동쪽의 동십자각이 경복궁 담장과 떨어지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의 도로 공사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아, 6.25 전쟁 때의 폭격으로 인해 광화문 위쪽의 문루가 소실되고 향원정의 나무다리가 파괴되는 등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광화문은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왔지만, 목조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되었고, 방향 및 입지도 본래의 축선과는 틀어진 모습이 되었다.
이처럼 많은 훼손을 당했던 경복궁은 199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해체하고,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행되면서 점차 고종 때 중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콘크리트 광화문이 해체되고 목조 건물이 원래의 방향과 위치대로 복원되었으며, 흥례문을 비롯해 훼손되었던 건물들이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현재 경복궁은 1991~2010년의 1차 복원 사업을 통해 80여 동의 건축물이 복원되어 있으며, 2011년부터 시작되어 2045년에 마무리될 2차 복원 사업을 통해 훨씬 더 밀도가 높고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경복궁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배경지식을 품고 떠나는 궁궐 답사”
경복궁 답사는 정문인 광화문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흥례문을 지나고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을 통과, 정전인 근정전으로 들어간다. 근정전은 조선 궁궐의 정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위엄 있는 건물이며, 근정전 앞의 넓은 뜰은 조회를 비롯한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엄숙한 공간이었다. 근정문 밖에서 대기하던 관원들은 임금이 지나가는 어도(御道) 좌우에 놓인 품계석을 따라 자리를 정돈하고 국왕에게 사배(四拜)를 올렸다.
근정전 동쪽으로는 세자 및 세자빈이 머물던 동궁 영역이 있고, 근정전 서북 방향으로 가면 연못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자리 잡은 경회루를 만나게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동궁은 세종대, 경회루는 태종대 처음 지어진 영역이었다. 특히 경회루는 규모도 규모지만 연못과 조화를 이룬 시원한 경관을 자랑하며, 성종대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 사신이 조선의 장관으로 꼽기도 하였다.
근정전 북쪽의 사정문을 통과하면 임금이 관원들을 만나 국정을 논의하고 경연을 열던 편전인 사정전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다시 말해 경복궁의 공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관원들이 평상시 업무를 보던 실무 공간은 경회루의 남쪽 구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사정전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이 나오고, 그 뒤쪽으로는 중궁전(中宮殿)인 교태전이 위치하고 있다. 앞서 잠깐 소개했듯 교태전은 세종 때 지어진 건물로, 고종 때 중궁전으로 복원하면서 강녕전과 더불어 용마루가 없는 침전(寢殿) 건물로 세워졌다. 교태전 동쪽으로 난 작은 문을 지나면 대비전인 자경전(慈慶殿)이 나오는데, 자경전은 담장 일부를 굴뚝으로 만들고 십장생을 새겨넣은 “십장생 굴뚝”이 유명하다. 강녕전과 교태전, 자경전은 왕실 가족들이 머무는 내밀한 공간이었다.
자경전에서 북쪽으로 여러 건물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고종에 의해 정비된 후원 구역으로 나가게 된다. 먼저 마주치는 것은 큰 연못 가운데에 위치한 향원정(香遠亭)이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군신이 연회하기 위해 건설된 거대한 경회루와는 달리, 향원정은 임금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 정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규모와 형태를 취하고 있다. 향원정 북쪽에는 고종이 사대부 살림집의 형태를 본따 건립한 생활공간이자 을미사변의 무대이기도 한 건청궁이 있고, 건청궁 서쪽에는 중국풍으로 지어진 고종의 서재 집옥재(集玉齋)가 위치한다. 집옥재에는 고종이 수집한 서적들을 보관하였는데, 이 서적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향원정과 집옥재는 고종 때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 일부이다.
집옥재 서쪽에는 국상 때 쓸 목적으로 건립한 태원전(泰元殿) 영역이 있고, 집옥재와 태원전 사이에 북쪽을 향하여 나 있는 문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다. 남쪽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한 경복궁 답사는 북쪽 신무문에서 끝을 맺는다. 물론 다시 광화문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오는 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전각들을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경복궁에서는 화요일 및 휴궁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리는 수문장 교대 의식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어 답사객의 볼거리를 더해준다. 올 4~6월, 9~10월에는 고종의 서재 집옥재를 작은 도서관으로 개방하고 있으며, 5~6월, 9~10월에는 1일 3회 경회루 특별관람을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5월 9일부터 6월 27일까지는 교태전 복원 30주년을 맞아 매주 수~금요일 교태전 내부를 예약제로 특별 개방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얼굴을 이모저모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끽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