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유산, “종묘사직”의 뜻과 조선에서의 의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을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필자는 주저 없이 종묘를 꼽을 것이다. 종묘는 조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며,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흔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이 나라 종묘사직을 어찌할 것입니까?”와 같은 표현을 듣게 된다.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 중국에서는 고대 이래로 종묘와 사직을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하였다. 왕실이 곧 국가의 통치자였던 시대에 이 중에서도 종묘를 더욱 중시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 시작된 종묘의 역사
성리학 이념을 받아들인 신흥유신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종묘의 건립을 염두에 두었다. 태조 3년(1394) 조선이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은 궁궐인 경복궁이 아니라 왕실의 사당인 종묘였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제도를 담았다고 여겨지는 『주례(周禮)』에서는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배치해야 한다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실었다. 임금은 북극성과 같은 위치에서 남면(南面)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므로, 궁궐의 왼쪽은 동쪽, 오른쪽은 서쪽을 가리킨다. 조선 조정은 경복궁의 위치를 잡은 뒤 제일 먼저 『주례』에 따라 종묘와 사직의 위치를 정하고, 종묘의 건립을 궁궐보다도 서둘렀다. 이듬해인 태조 4년(1395) 9월 종묘가 완공되자 임시로 모셔져 있던 태조의 4대 조상들의 신주를 옮겨옴으로써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세워진 종묘의 위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수도가 한양에 머물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시 개경을 수도로 삼으려 했으나, 한양에 세워진 종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태조의 뜻에 따라 한양으로 환도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환도의 명분을 얻기 위해 활용한 수단이 종묘에서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것이었다. 한양과 개경을 포함한 수도 후보지에 대해 동전점을 쳐서, 점괘를 통해 나타나는 조상들의 뜻을 받든다는 명목이었다. 다행히도(?) 동전점의 결과는 한양으로 나왔고, 태종은 종묘가 있는 한양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였다.
전란의 불길 속, 다시 세워진 종묘
조선의 다사다난했던 500년 역사 속에서 종묘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종묘에 모셔진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한양에서는 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사라졌는데, 그 가운데 종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수정실록』에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일본군의 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가 종묘에 거처했는데, 괴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병사 중에 사망자도 생기자 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야기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왕실의 신성한 공간이었던 종묘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 속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양 정도와 함께 곧바로 종묘를 건립했던 것처럼, 한양으로 돌아온 조선 조정은 재정난을 무릅쓰고 궁궐에 앞서 종묘를 재건하였다. 이후에도 한양은 이괄의 난(1624)이나 병자호란(1637)이라는 재난을 맞았으나, 다행히도 종묘는 전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근대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부속 건물이 사라지고, 창덕궁・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율곡로가 생기면서 궁궐과 종묘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종묘의 주요 건물과 경관은 유지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종묘는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종묘의 다양한 부속 건물, 어떤 역할을 했을까?
종묘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를 띠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인 건물은 정전이다. 정전 앞 넓게 펼쳐진 묘정월대(廟庭月臺)에서 바라본 장중하고도 기다란 정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정전의 길이가 길어진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역대 국왕들을 모시는 공간 ‘정전’
정전은 태조를 비롯한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이다. 국왕이 사망하면 장례를 치르고, 그 신주를 종묘 정전에 봉안함으로써 장례 절차를 마무리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태조(太祖), 세종(世宗)과 같은 역대 국왕들의 묘호(廟號)는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올리는 이름이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식 임금으로 취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고, 따라서 조종(祖宗)의 묘호도 없다.
정전은 원래 태실(太室) 7칸, 좌우의 익실(翼室) 2칸이라는 단촐한 구조로 건립되었다. 전통시대 천자국은 7묘, 제후국은 5묘를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5묘를 운영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규모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태조와 4대에 이르는 후대 국왕의 신주가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차례대로 봉안되었다가, 태조의 신주만 정전에 그대로 머물고 나머지 국왕의 신주들은 세대가 내려갈 때마다 정전에서 옮겨져야 했다.
하지만 문종과 세조, 인종과 명종처럼 같은 대수(代數)의 형제가 즉위하여 바로 신주를 옮기지 못하거나, 성종의 부친 덕종(德宗)처럼 원래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후손에 의해 왕으로 추존(追尊)된 신주들이 들어오거나, 태종처럼 공적이 높아 차마 정전에서 옮기지 못하는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해지는 사례들이 늘어남으로써 7칸의 태실로는 정전에 모셔져야 할 신주를 다 수용할 수 없는 사태가 생겼다. 그 결과 종묘 정전은 명종 원년(1546) 11칸, 영조 2년(1726) 15칸, 헌종 2년(1836) 19칸으로 증축되었다. 우리가 보는 좌우로 길게 펼쳐진 정전의 모습은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다.
끝없이 가로로 이어진 듯한 정전 건물에 특색을 부여하는 것이 정전 양끝에서 뻗어 나온 월랑(月廊)이다. 월랑은 태종대 제례 중간에 올 수 있는 눈과 비를 피하기 위해 양쪽에 설치한 것이다. 이후 서월랑은 벽을 막아서 의례에 쓰이는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었지만, 동월랑은 기둥만 서 있는 빈 공간으로 본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월랑 쪽에서 바라본, 기둥이 죽 이어진 정전의 옆모습도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영원히 평안한 전각 ‘영녕전’, 그리고
종묘의 부속 건물들”
정전을 계속 늘린다고 해도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두 정전에만 모실 수는 없었다.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들의 신주를 봉안한 공간이 영원히 평안하라는 의미의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원래 태조의 4대 조상들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종 원년(1419)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각 2칸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정전에 모셔져 있던 국왕들의 신주가 하나둘씩 옮겨질 차례에 이르자, 조선 조정은 이들의 신주를 각각의 왕릉 곁에 묻는 방식으로 치우지 않고 영녕전 협실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정전에서 옮겨지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영녕전의 협실도 부족해졌고, 태조의 4대 조상들을 모신 영녕전 정전은 그대로 두는 대신 협실을 좌우로 늘려나갔다. 그 결과 영녕전은 길어지면서도 가운데 4칸이 두드러지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종묘에는 정전과 영녕전 외에도 공신들을 모신 공신당(功臣堂), 국가 의례에 부속된 여러 신들을 모신 칠사당(七祀堂), 종묘를 지키는 사람들이 거처했던 수복방(守僕房), 제수를 진설해놓던 찬막단(饌幕壇), 제사를 쓸 때 사용하는 물을 길어올리던 제정(祭井), 악공들이 대기하던 공인청(工人廳),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지내기 전 국왕이 목욕재계하던 재궁(齋宮), 향이나 축문, 폐백 등을 보관하던 향대청(香大廳), 제사 관련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대기하는 집사청(執事廳), 어진(御眞) 등을 관리하고 의궤를 보관하던 망묘루(望廟樓) 등의 부속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일부 사라지기도 했지만, 큰 틀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종묘 정문, 즉 외대문(外大門)을 들어서면 안으로 뻗은 돌길이 보이는데, 유독 가운데 길이 한 단 높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로(神路)라 하여 신주가 지나가는 길이다. 신로는 정전의 정문인 신문(神門)과 연결되어 있고, 왕이 지나는 어로(御路)는 중간에서 신로와 갈라져 재궁으로 향한다. 국왕은 어로를 따라 재궁으로 가서 목욕재계한 뒤, 정전 동문 앞에 놓인 판위(版位)에 대기했다가 정전으로 들어가 제례를 시작한다. 종묘를 관람하는 가장 좋은 동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의례의 순서에 얽매일 필요 없이 들어가는 방면의 우측에 있는 향대청, 망묘루나 재궁 근처의 전사청, 제정 등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후세의 관람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와 종묘제례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역시 2001년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무형문화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정전에서 1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 두 번 거행되던 종묘제례는 현재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과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리고 있다. 종묘 정전은 2020년부터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외관 관람을 제한하였으나, 4월 20일 수리를 위해 옮겨져 있던 신주들을 다시 봉안하는 환안제(還安祭) 및 준공기념식을 개최하면서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종묘는 월, 수, 목, 금요일에는 정해진 시간에 입장하여 해설사와 함께 1시간 정도 관람하고 퇴장하는 시간제관람만 진행되지만, 토, 일요일 및 공휴일과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자유관람이 진행된다. 2024년부터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율곡로 북신문도 복원되어 자유관람일에 한해 개방되고 있다. 올봄에는 관광객으로 넘치는 궁궐과 달리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조선시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종묘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