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과 달리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은 치욕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도시인들에게 휴식의 장소로, 또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쯤으로 알려져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게 항전하다가 국왕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한 곳이어서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2007년에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머문 47일간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재현한 김훈의 『남한산성』과 이를 영화로 2017년에 제작한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이 개봉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여담이지만, ‘남한산성’하면 80년대까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무척 싫어한 단어이다. 지금은 인근의 이천시로 육군교도소가 옮겨져 없어진 말이 되었지만, 군 내부에서 육군교도소를 은어로 ‘남한산성’이라고 에둘러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또 육군종합행정학교가 이 부근에 있어서 남한산성을 줄여 ‘남성대’라 하였고, 학군사관후보생(ROTC)이 교육받는 육군학생군사학교는 ‘문무대’라 불리었다. 필자 역시 이곳에서 대학 1, 2학년 때 군사훈련과 전방 입소 훈련을 1주일간 받은 기억이 있다. 젊은 날 추억이 깃든 이곳은 다 사라지고 위례신도시가 되었다. 전철 8호선을 타고 남한산성역에 내리면 된다.
▲ [사진 1] 남한산성도(영남대박물관 소장)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산성이다. 광주시에 대부분 위치하고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일부가 걸쳐있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에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한다. 국가사적이며, 경기도의 도립공원이다. 우리나라의 11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조선 인조 때 중축되었다. 해발 497m인 청량산(淸凉山)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m 벌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다. 총길이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남한산성은 조선 최대의 산성도시로서 자연생태환경과 더불어 군사·행정·유원 시설, 사당과 사찰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어 역사와 설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 [사진 2] 남한산성 초대형 통일신라 기와와 명문기와. 기와 1장이 최대 길이 62.5㎝에 무게는 19㎏에 달한다(경기도박물관 소장).
“대저 남한산은 가운데가 평평한 반면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그 에워싼 형세가 치밀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웅혼한 자태를 보여준다”라고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가 「남한성기(南漢城記)」에 남긴 내용이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백제 초기부터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는 672년(문무왕 12) 이곳에 둘레가 4,360보(步)인 토성을 축성하고 이를 주장성(晝長城)이라 하였다. 고려 때부터 ‘광주성(廣州城)’·‘일장성(日長城)’·‘일장산성(日長山城)’ 등으로 불렸는데, 오늘날의 명칭인 남한산성으로 불리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삼국시대 이후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은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당시 도성 함락을 계기로 이후 강화도와 함께 서울의 보루로 주목되었다.
남한산성은 광해군 재위 때 일부가 수축되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축성 및 수축은 인조 때였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를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들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외교노선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노선이 후금세력을 자극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방비책으로 변방의 방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는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부터 축성을 시작하여 2년 뒤에 완공하였다. 이로써 수도 남부의 보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이곳에서 항전하다가 좌절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삼전도비와 함께 ‘오랑캐’에 항복한 치욕의 장소로 알려졌다. 병자호란을 치른 이후 반청(反淸) 의식이 높아졌으며, 이러한 의식은 급기야 북벌론으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계속된 견제에도 불구하고 호란 직후부터 효종·숙종·영조·정조대를 거치면서 산성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물론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이 갖는 전략적 의미는 퇴색하였고, 그 대신 도성 수축과 북한산성 축성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남한산성의 수축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것은 이곳이 단지 치욕의 현장으로 머물지 않고 나아가 북벌운동의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영조 때 이집(李集)이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서장대(西將臺)에 오른 영조에게 병자년의 쓰라린 치욕을 되새기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굳건하게 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남한산성은 당대인들에게 청나라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기면서 북벌의지를 다지는 상징적인 곳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천주교인의 처형장이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한 뒤로는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다. 그나마 매몰되어 있던 유구 상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에 마무리되었다.
▲ [사진 3]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청국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전의 ‘형제’ 관계에서 ‘신하’ 관계로 전환할 것을 강요하면서 비롯되었다.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조선 측은 죽음을 불사한 항쟁의 의지를 보이면서, 국교 단절을 통보하였다. 이에 분노한 청 태종은 같은 해 12월 9일 10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5일만인 12월 14일에 개성에 진입하였다.
청나라의 침략 소식을 접한 조선은 먼저 전왕들의 신주(神主)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을 비롯한 왕자와 공주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오후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사들이 강화도로 들어가는 통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부득이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구리개(銅峴, 지금의 을지로 입구)-수구문(水口門, 광희문)-새내(新川, 강동구 신천동)-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면서 항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47일 동안 청나라 군사에 포위당하였다. 또한 동절기의 혹한과 기아 등으로 10만의 청나라 군사를 대적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그나마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국난의 위기에서 청군에게 저항한 의병과 민초(民草)들의 강한 저항의식의 결과였다. 한편 청군에게 포위당한 가운데, 산성 내에서는 청국과 화약(和約)을 체결하자는 주화론(主和論)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主戰論)으로 나누어져 논쟁이 벌어졌음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때 주전론자들은 주화론자들을 ‘매국노’라고까지 비난하였다. 심지어 김상헌(金尙憲)은 “이 건의(주화론)를 한 자들을 죽여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여기서 주화론과 주전론 가운데 어느 것이 정당하였는가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이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성내에서 훈련도감군이 전쟁을 중지하자는 집단 시위를 벌인 것을 감안한다면, 주전론은 당시 민심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전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주전론이 명에 대한 의리론과 함께 문화적 자존심을 근거로 해서 우리의 자존의식을 대변한 것임과 아울러 전쟁 이후에는 북벌론으로 계승 발전되면서 사회 구성원들을 결집시키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전황과 피해가 명분론을 받쳐주기에는 불리하였다.
결국 인조는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국서를 청군에 보내 항복 의사를 전달하였으며, 청 태종은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서 항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1637년 1월 30일 인조와 왕세자는 성을 나와 삼전도 적진(敵陣)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려야만 하는 이른바 ‘삼배(三拜)·구고두(九叩頭)’의 역사상 유례없는 치욕적인 예를 행해야 했다.
▲ [사진 4·5] 삼전도비(사적 101호) : 원명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뒷면은 몽고와 만주문자로, 앞면은 한자로 기록되었다. 2007년 2월 7일에 붉은색 페인트칠로 훼손된 삼전도비 복구 작업 모습(문화유산청 제공).
이때의 굴욕적인 현장으로 풍상(風霜)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도 전해지는 것이 ‘삼전도비(三田渡碑)’이다. 이 비는 청 태종의 조선 침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어서 내용이 매우 굴욕적이었다. 때문에 두 번에 걸쳐 땅에 묻혔다가 다시 세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치욕의 역사를 후대에 알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를 묻는다고 당시의 굴욕적인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삼전도비와 남한산성을 통해 치욕의 역사를 곱씹으며 다시는 외침에 굴하지 않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에 대한 국왕과 신료의 그릇된 판단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원래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과 좌승영(坐勝營)·수어영(守禦營) 등의 관청시설과 방어시설인 서장대(수어장대)·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의 4장대와 출입시설인 문루, 승병 주둔을 위해 세운 천주사·국청사·개원사 등의 사찰과, 누각 및 제각(祭閣)이 있었다.
▲ [사진 8] 연무관 : 남한산성에서 병졸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본래는 연무당이였다(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도록).
▲ [사진 9] 19세기 말 남한산성 자화문. 남문으로 남한산성의 문루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곳이다(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도록).
▲ [사진 10] 청량당 전경. 청량당은 2동으로 구성돼 있다.
사당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자붕의 건물이다(광주시 제공).
2014년에 없어진 전각을 복원하였지만, 이 가운데 매바위와 청량당과 관련된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성의 서남쪽의 축성 책임을 담당한 이회(李晦)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모함을 받게 돼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자살했는데 그 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와 그의 처첩(妻妾)의 넋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이 사당이 ‘청량당’이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줄여 이문을 남기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본받아야 할 점이다.
▲ [사진 11] 서흔남 묘비. 2기 묘비가 나란히 서 있다. 1667년(현종 8)에 세워진 이 비는(좌) 원래 남한산성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다.
후손들이 파묘하면서 방치되었던 비석을 199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광주시 제공).
또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인조 임금을 구한 서흔남이란 노비의 이야기 전해온다. 『인조실록』 등에도 그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지만, 피란하는 인조를 등에 업고 눈길을 짚신을 거꾸로 신으며 발자국을 내려오는 방향으로 나도록 꾀를 내었는데, 남한산성을 오른 뒤 인조가 그를 기특히 여겨 곤룡포를 내려준 내용이다. 서흔남은 이후 청나라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기자, 거지 행세를 해 적진을 통과하여 근왕병(勤王兵)에게 왕의 뜻을 전하고, 적군의 동태를 보고 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당시 상황으로는 국왕이 국가였던 시기에 위기에 처한 인조를 위한 그의 행동은 ‘충의(忠義)’에 합당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사분오열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 [사진 12·13] 2011년 경기도박물관의 특별전 도록과 2023년 국립진주박물관의 병자호란 특별전 도록.
이를 보고 가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질수 있다(홍영의 제공).
이회와 서흔남의 일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주위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갈라진 이념과 사상 대립 속에서 끝까지 싸움을 하자는 주전론과 화친을 해야 한다는 주화론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국왕의 ‘삼배(三拜)·구고두(九叩頭)’의 굴욕과 치욕을 씻어내겠다는 북벌을 주장한 그들의 선택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남한산성길을 걸으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정치가 어지러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가를 곱씹어 보았으면 한다. 누구를 위한 길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