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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충절의 상징,

- 정몽주의 집터
숭양서원(崧陽書院) -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무릇 왕궁과 수도로부터 고을에 이르기까지 서원이 없는 곳이 없었으니, 서원에서 취할 이점이 무엇이길래 중국에서 저토록 숭상한단 말입니까? 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을 강명하고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이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서책을 싸 짊어지고 넓고 한적한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조용히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덕을 쌓고 인(仁)을 익혀 이것으로 낙을 삼을 생각으로 기꺼이 서원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 국학이나 향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 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學令)에 구애되고 한편으로 과거(科擧) 등의 일에 유혹되어 생각이 바뀌고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할 때 그 공효(功效)를 어찌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선비의 학문이 서원에서 역량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인재를 얻는 데도 틀림없이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퇴계선생문집』 권9, 서(書)1 심 방백에게 올리다(上沈方伯))

“서원(書院)을 설치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百世) 후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公議)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이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더러 네다섯 군데에 달하니, 또한 매우 무의(無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허락하지 말아서 변함없는 법으로 삼도록 하라.”(『고종실록』 권8, 고종 8년 3월 12일 임인)

14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

고려하면 불교와 사찰, 조선하면 유교와 서원으로 사상과 이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설적으로 고려 말기 불교의 폐단이 조선 말기 서원의 폐단으로 그대로 답습했고, 이를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반복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은 고려가 아닌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조선이 진행했지만, 조선 후기 서원의 폐단은 조선이 스스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곳 출신인 유학자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 터를 잡고 서원 이름을 ‘백운동‘이라고 한 것은 중국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는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간청하여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이름 짓고 현판(懸板)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의 첫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은 국가에서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이 지원된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은 지역의 일반 서원으로 지역 유림과 문중에서 운영하였다. 지금으로 보자면, 국가에서 지원하는 국립 고등교육학교와 사립 고등교육학교로 구분될 것 같다.

그 뒤, 이 시기에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들이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면서 서원이 여기저기 잇달아 들어서게 된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講堂)이 있는 강학(講學)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리는 사당(祠堂)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재실(齋室) 등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遊息)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원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서원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오늘날의 ‘범국민 서명운동’과 같은 1만 명 넘는 유생(儒生)들이 뜻을 모아서 국왕에게 상소(萬人疏, 조선 역사 기록에 남은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을 시작으로 19세기 말까지 총 7차례 있었다)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명종 때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때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렀다.

그런데 18세기 들어서자 서원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비난과 원성 속에 갖가지 잘못이 불거지고, 사림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서원은 쇠퇴하게 된다. 특히 당파간의 극한적인 대립으로 나타난 서원의 폭발적 남설(濫設)은 필연적으로 정치, 사회적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숙종과 영조대 이후 서원은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런 가운데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까지 내려지면서 1,000여 개의 서원 가운데 47곳만 남게 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완강이 반발하며 시위하는 서원 유생들을 쫓아 버리도록 하고, 감히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라고까지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됨에 있어서랴”라며, 강한 개혁의지를 내보였다. 지금은 복설되거나 새로 창건한 서원이 680여 개에 이른다고 하니, 이때 수많은 서원들이 훼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은 2019년 7월 유네스코 43차 총회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건립)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의 유형을 대표하는 9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연속 유산으로, 한국의 성리학과 연관된 문화적 전통에 대한 탁월한 증거로써 인정되었다. 영주의 소수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달성의 도동서원, 안동 하회의 병산서원, 정읍의 무성서원, 논산의 돈암서원 등 9개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의 중부와 남부 여러 지역에 걸쳐 위치한다.

서원은 중국에서 도입되어 한국의 모든 측면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한 교육기관으로서 탁월한 증거가 되는 유산이다. 서원의 향촌 지식인들은 학습에 정진할 수 있는 교육체계와 유형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학습과 배향, 상호교류는 서원의 핵심적인 기능이었으며 이는 건물의 배치에 잘 드러나 있다. 서원은 그 지역 지식인들인 사림이 이끌었으며, 사림의 이해관계에 따라 향촌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번성했다.

서원의 위치에 가장 크게 고려되는 요소는 선현(先賢)과의 연관성이다. 두 번째 요소는 경관으로, 자연 감상과 심신 단련을 위해 산과 물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서원에서 누마루 양식의 개방적인 건물은 그러한 경관과의 연결을 더욱 원활하게 한다. 학자들은 성리학 고전과 문학작품을 공부했으며, 우주를 이해하고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고인이 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을 배향하고 강한 학문적 계보를 형성했다. 나아가 서원에 근거한 다양한 사회정치적 활동을 통해 성리학의 원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렇듯, 한국의 서원은 선현의 제향(祭享) 공간이자 학문의 교육 공간이며, 향촌(鄕村)의 공론(公論)을 형성하고 지역의 공의(共議)를 실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한국의 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탁월한 증거로 그 교육과 사회적 관습은 많은 부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서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형되고 그 결과 그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특출한 증거이다”라고 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9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0번째에 포함될 만한 세계문화유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모신 개성의 숭양서원이다.

세계문화유산 9개에 포함되지 않은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 개성의 숭양서원

개성특급시 선죽동에 있는 숭양서원(국보 문화유물 제128호)으로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의 바위 위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중경지(中京誌)』를 편찬하고 개성 유수를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것이 우선 눈에 띈다. 김육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주장한 인물로 잘 알려 있다.

▲ 숭양서원 앞 개성유수 송덕비,
맨 위는 서형순,
그 아래 오른쪽은 김육의 것이다.

▲ 정몽주 옛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
 
 

숭양서원 밖 외삼문 오른쪽 능선에는 1530년(중종 25) 8월에 세워진 정몽주의 옛집임을 알려주는 구기비(舊基碑, 유허비)만 비각은 없어진 채로 붉은 글씨로만 남아있다. 먼발치에 있어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판독 가능한 부분은 앞면에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鄭夢周之閭)”, 뒷면에 “가정 경인 8월 일(嘉靖 庚寅 八月 日)”이다. 즉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집, 가정 경인년 8월 일”이다.

외삼문 입구에는 말을 타고 다닐 때 오르내리는데 편하도록 설치한 마상대(馬上臺)와 마하대가 있는데, 사면에 개와 사자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숭양서원에 들어서는 순간 선조가 내려준 사액현판이나, 각 건물에 있어야 할 편액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까지 영조어필게액기(英祖御筆揭額記)를 비롯하여 어제시·중수기·상량문 게판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

숭양서원(崧陽書院)은 1573년(선조 6)에 개성유수 남응운(南應運)이 유림들과 협의하여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아울러 서경덕(徐敬德)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정몽주가 살던 집에 그의 시호를 따 처음 사(祠)의 형태로 ‘문충당(文忠堂)’을 세운 것에서 비롯하였다. 2년 뒤인 1575년 ‘숭양(崧陽)’의 사액이 내려지면서 공식적인 서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1668년(현종 9) 이후 김육·김상헌(金尙憲)·조익(趙翼)·우현보(禹玄寶)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영조와 정조 때에도 조견(趙狷)과 민진후(閔鎭厚)를 추가 배향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823년(순조 23)에 유수 김교근(金敎根)과 김이재(金履載)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고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0년에는 우상훈(禹相勳)이 보수하였다.

숭양서원은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숙종·영조·고종이 개성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특히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는[遣官致祭] 은전을 받았고, 영조는 친필로 어필사액(御筆賜額)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당시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일 만큼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 일제 강점기 엽서의 숭양서원 전경
 

▲ 『조선고적도보』 숭양서원 전경
 

▲ 일제 강점기 엽서의 숭양서원 사당
(문충당) 전경

경내의 건물은 자남산(子男山) 동남쪽 기슭의 경사지에 좌우대칭으로 크게 2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막은 서원의 외삼문(外三門)에 들어서면 강당(領域)과 동재(東齋)·서재(西齋)로 이루어진 강학(講學) 영역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서재·신문(神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었다.

동재와 서재 사이에는 3개의 계단으로 높은 축대 위에 오르면 강당(講堂)이 있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전면에 퇴칸을 둔 팔작(八作) 지붕 건물로 화강암 장대석을 3단으로 쌓은 다음에 다시 1단의 장대석을 쌓은 이중 기단 위에 놓여 있다. 6개의 초석(礎石)에 약간의 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고, 공포(栱包) 없이 기둥 위에 도리를 받은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가 없고 장식이 간단하나 단청은 전면에 금단청(金丹靑)을 도채(塗彩)하는 등 비교적 화려하다. 건물 안의 가운데에는 마루를 깔았다. 양 켠 옆 칸 중 앞쪽 한 칸은 마룻방과 이어진 툇간으로 하였고, 그 뒤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당시 유생들의 합숙으로 쓰인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그리고 서재 뒤쪽에는 고직사(庫直舍) 등이 보조영역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 숭양서원 강당

또 강당을 왼쪽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內三門)과 사당(祠堂)인 문충당(文忠堂)으로 구성된 제향(祭享) 영역이 있다. 숭양서원의 중심건물인 사당은 높은 밑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3단 높이의 단층기단 위에 놓여있다. 원형의 초석(礎石) 위에 흘림이 강한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 상부에는 공포를 생략하고 소박한 연화문(蓮花紋)을 새긴 초엽으로 대들보와 중보를 받들었다. 내부 가구는 1고주 5량가이며, 단청은 은근함을 강조하는 모로단청(毛老丹靑)으로 되어 있다.

사당은 주실과 협실이 약간 변형을 이루고 있는데, 우진각 형식에서 맛배 지붕으로 고쳐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마도 배향된 위패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자 정몽주의 영정과 위패를 주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 안에는 정몽주를 비롯하여 우현보, 서경덕, 김상헌, 김육, 조익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협실(夾室)에는 정몽주의 화상(畵像)과 표충비(表忠碑, 국보유적 제138호)에 새긴 영조(英祖)의 시(詩) 탁본과 정몽주의 문집을 두게 하였는데, 현재는 정몽주의 화상(畵像)만이 남아 있다.

▲ 숭양서원 사당 내의 정몽주 초상

▲ 숭양서원 내 사당(문충당)

이곳에 안치된 정몽주의 영정은 1575년(선조 8)의 가묘본(家廟本)을 토대로 몇 차례의 이모 과정을 거쳐 1768년(영조 44년) 한종유(韓宗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포은문집』 「화상편(畵像編)」에 의하면, 1390(공양왕 2),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봉되어 공신당에 봉안될 때의 공신도상(功臣圖像)이 처음이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가묘의 영당에 초상 1본을 이모(移摸)하여 영천의 임고서원(林皐書院)에 봉안했으며, 1575년(선조 8)에도 가묘본을 이모하여 숭양서원에 봉안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되어 임고서원본만 남게 되자, 1619년(광해군 11)에 박경신(朴慶新)이 화사(畵師) 권응(權應)에게 임고서원본 하나를 이모케하고, 이듬해 봉사손(奉祀孫) 정준(鄭儁)이 가묘에 봉안했다.

임진왜란 이전의 본인 임고서원본 역시 훼손되자, 1629년(인조 7) 화사 김육(金堉)에게 이모케 하여 신본(보물 제1110호)을 봉안하고, 구본은 궤(櫃)에 넣어 보관하다가 1654년(효종 5), 후손 정간(鄭侃)이 충렬서원으로 옮겼다. 1677년(숙종 3) 화사 한시각(韓時覺)으로 하여금 다시 가묘본 3본을 이모케 하여 가묘의 영당·충렬서원·숭양서원에 각기 봉안했다. 한시각이 전사(傳寫)한 이모본도 얼마 안가서 멸실되자 다시 이모를 착수하였는데, 충렬서원에서는 1751년(영조 27) 화사 장경주(張景周)가, 숭양서원에서는 1768년(영조 44) 화사 한종유로 하여금 전사케 하여 각기 봉안했다. 현재 숭양서원에 남아 있는 것도 이모본일 가능성이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영정은 숭양서원본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사당 앞뜰 좌우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있는데, 정면에서 우측의 것은 1811년(순조 11)에 세운 포은선생서원비(圃隱先生書院碑)로 묘정비이며, 왼쪽의 것은 1872년에 세워진 숭양서원기실비(崧陽書院記實碑, 북한 보존급 제1625호)이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개성의 유생들이 숭양서원을 그대로 두도록 정부에 요청하여 승인을 받고 서원을 다시 수리한 후 그 내력을 적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숭양서원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개성에 남아있는 옛 건물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며, 사립교육기관으로서 당시의 지방교육과 서원의 배치형식,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조선중기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식과 구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국보유적 제128호로, 현재 숭양서원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개성 역사유적 지구는 개성성벽 5개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7릉군, 명릉군, 공민왕릉을 포함하고 있다.

필자는 숭양서원을 3차례에 답사할 기회를 얻어 이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가보지 못한 이들은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을 가보길 권한다. 비록 개성의 것은 보지 못하더라도 선죽교 등을 그 비슷하게 꾸며 놓았기 때문이다.

▲ 일제 강점기 엽서의 숭양서원 전경

▲ 숭양서원 전경

한 때 조선후기 당쟁과 함께 비리의 온상으로 지탄받았던 한국의 서원이 다시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국왕과 정부는 서원의 움직임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의심하는 입장이었으며, 그 결과 의도적으로 서원의 설립을 서울에서 떨어진 지방으로 제한하는 정책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국의 서원들은 교육의 내용과 방향에 있어서 자율권을 가질 수 있었고, 서원이 제향자의 연고지에 세워지는 현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서원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와 관리에서 벗어남으로써 지역의 지배계층들 사이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네트워크가 가능하도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결국, 고종 때의 전국적인 서원훼철은 흥선대원군의 개인적 판단이나 취향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정부와 서원을 중심으로 잠재적 저항세력이 될 수 있는 지방 유림세력 간의 대립적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 17, 18세기부터 지속되어 왔던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 서원훼철로 인하여 지방의 지적, 정치적 에너지가 서울에 종속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지방의 지식인 세력은 한국사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원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서원이 지닌 문화의 순기능을 오늘날에 적용시켜 보고자 한 때문일 것이다. 단절된 서원의 옛스러움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서원의 무한한 변화를 기대해 본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국민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하고 2013년 국민대학교 글로벌인문지역대학 한국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2007년 개성 궁성 만월대 발굴에 참여했으며, 한국중세 사학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농업문화유산 자문위원, 경기도문화유산위원 등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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