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궁궐 중 근대 이후 수난을 겪지 않은 곳은 없지만, 창경궁이 겪었던 시련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창경궁보다는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 속의 이름이 되었으나, 창경원 시절은 지금까지도 창경궁의 경관이나 창경궁에 대한 인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창경궁은 역사의 주인공이라기보다 왕실 가족들의 거처로서 오랜 역사를 지내온 궁궐이다. 조선시대의 창경궁은 별개의 궁궐이면서도 창덕궁과 같은 영역으로 인식되어 동궐(東闕)로 불렸으며, 넓게는 남쪽의 종묘까지 단절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는 1820년대 제작된『동궐도(東闕圖)』에 창경궁이 함께 그려져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접한 창덕궁이 조선 후기의 법궁(法宮)이었던 데 반해,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공간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 사진 1: 동궐도
조선시대의 창경궁
				창경궁은 원래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이후 머물기 위해 건립한 수강궁(壽康宮)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수강궁은 상왕이나 대비, 선왕의 후궁 등 왕실의 어른들이 머무르는 궁궐이 되었다.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있던 단종이 한때 머무르기도 했고, 말년에 병세가 깊어진 세조가 예종에게 양위하고 세상을 떠난 곳도 수강궁이다. 
                창경궁이 본격적인 궁궐로 거듭난 것은 성종 때였다. 예종의 요절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은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모셔야 했는데, 이들을 위해 수강궁을 창경궁이라는 새로운 궁궐로 단장한 것이다. 성종 16년(1485) 완성된 이후 창경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자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연회나 행사 등에도 이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창경궁도 소실되었다. 다행히 조선 조정은 전란 종결 이후 궁궐의 중건에 나섰고, 창경궁은 창덕궁에 이어 광해군 8년(1616)에 완성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창경궁은 국왕의 일시적 거처나 왕실의 상례를 위한 혼전(魂殿) 등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창경궁에도 주인공이었던 시절들이 존재했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이 소실되자, 인조 초부터 창경궁은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경궁의 많은 건물이 불타자 인조는 창경궁을 떠났다가, 인조 11년(1633)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조 25년(1647) 창덕궁이 중건될 때까지 창경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원래 법궁 용도로 기획되지 않았던 창경궁이 정치적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인조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역시 창경궁과 인연이 깊은 임금이었다. 재위 후반기에 창경궁에 주로 거주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慈慶殿)이라는 큰 건물을 세웠다. 정조가 승하한 곳도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이다. 이는 창경궁 동쪽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이 있었기 때문이다. 
                탕평 군주 영조와 정조는 백성들과의 만남 장소로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을 종종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영조 26년(1750) 균역법 시행을 앞두고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한양의 백성들과 군사들 50여 명을 만나 군역 개편 방안에 대해 의견을 묻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정조 19년(1795)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창덕궁 홍화문에 나아가 한양의 빈민들에게 쌀을 나눠주는 행사를 열었고, 이 장면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홍화문사미도(弘化門賜米圖)?로 남아 있다.
            
 
            ▲ 사진 2: 홍화문사미도 (출처: 우리역사넷)
근대 이후 창경궁의 시련과 창경원
				창경궁은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내전 등의 건물이 전소되는 큰 피해를 겪었으나, 순조 34년(1834) 대부분 재건되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변화는 창경궁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1907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 하자, 일제는 순종의 유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어원(御苑)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명정전 등 일부 건물들을 제외하고 약 1,000여 칸에 이르는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등을 조성해 나갔다.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일단 완공되자 일제는 이를 일반에 개방하였고, 1911년에는 아예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 창경원은 철저하게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일제는 창경궁 후원의 춘당지(春塘池)와 내농포(內農圃)를 하나의 큰 연못으로 만들어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전각을 해체할 때 나온 댓돌과 초석을 연못 주변에 둘렀다. 춘당지 주변을 비롯한 창경원 곳곳에는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유원지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였다. 명정전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은 남아 있었지만, 앞뜰에 깔린 박석과 품계석을 없애고 모란꽃을 심어 원래의 위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창경원 안에는 일본식 건물로 세워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과 대한제국 황실 도서를 관리하는 창덕궁도서관도 설치되었다. 
                창경원은 경성의 명소가 되었다. 이미 1917년부터 봄철 휴일의 관람자가 1만 명을 넘어섰으며, 1920년대 이후 벚꽃놀이가 본격화되면서 창경원 관람은 경성의 풍속도로 자리 잡았다. 1929년 잡지 『개벽』에서는 창경원의 규모가 광대하고, 설비가 완전하며, 봄에는 밤 벚꽃이 특히 볼만하여 관람자가 매일 수만 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었다. 창경원은 경성 시민들의 최대 놀이공원이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에 의해 조선 왕조의 궁궐 창경궁은 근대식, 일본식 공원 창경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유럽의 궁전들이 공원이 된 것처럼 조선 왕실과 특권층만이 전유했던 궁궐을 일반 대중이 이용하고 관람하는 근대적 문화시설로 재탄생시킴으로써, 일제는 자신들의 지배를 근대화로 포장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적 요소와 질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였고, 이러한 무자비함은 식민지 근대가 갖는 폭력성의 상징이었다.
            
 
            ▲ 사진 3: 일제 강점기 창경원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창경궁은 본모습을 찾지 못했다. 폐원했던 창경원은 1946년 1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고적 보호를 명분으로 창경원을 일시 폐쇄하기도 했으나, 정작 창경원을 완전히 공원으로 인식하게 된 시민들이 반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창경원은 1954년 다시 개원하였으며, 1958년에는 벚꽃놀이를 재개하였다. 1960~1970년대 벚꽃축제 시즌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운집하기도 하였다. 창경원에 설치된 놀이기구도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1980년대 초까지 창경원은 아이와 가족, 젊은 연인들이 두루 즐기는 서울의 대표적 놀이공원으로 유지되었다.
 
            ▲ 사진 4: 해방 이후 창경원
1970년대부터 서울과 수도권에 어린이대공원,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 남서울 대공원(서울랜드) 등이 들어선 이후에야 창경궁은 비로소 제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창경원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여론에 힘입어 정부는 1981년 창경궁 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동물 이전, 놀이기구 철거, 벚나무 제거 등을 진행하였으며, 1983년에는 공개 관람을 폐지하고 창경원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는 발굴 조사를 거쳐 일부 건물들을 중건했고, 1991년에는 옛 이왕가박물관의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였다. 2002년에는 영춘헌과 집복헌을 복원하였으며, 2022년에는 일제에 의해 건설된 율곡로 위에 궁궐 담장 길을 복원하면서 종묘와 창경궁이 연결되었다. 이처럼 창경궁은 공원으로서의 모습을 벗고 조선시대 동궐의 일원으로서의 외관을 되찾아 가는 중이다.
창경궁 답사: 외전, 내전, 후원, 궐내각사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과는 달리,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은 양 측면의 십자각이 튀어나온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홍화문 앞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면 이미 궁궐로 살짝 들어선 느낌을 준다. 이런 구조로 인해 영조와 정조가 백성들과 만나는 장으로 홍화문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홍화문은 앞면이 5칸으로 된 광화문이나 돈화문과 달리 3칸으로 되어 있어, 창경궁의 보조적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홍화문을 지나면 돌다리 옥천교(玉川橋)가 나온다. 옥천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금천교와 마찬가지로 궁궐로 들어가는 경계 역할을 하는 다리로서, 성종 때 세워진 모습 그대로 500년이 넘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왔다. 다른 궁궐들의 금천교와 달리 옥천교 밑을 지나는 물길은 지금도 살아 있다. 다리 위에서는 사방 난간에 조각된 작은 돌짐승을 볼 수 있고, 옆면에서 보면 다리 양쪽 아치 사이에 귀신을 쫓기 위해 새겨진 도깨비도 보인다. 
                옥천교를 건너서 명정문(明政門)을 지나면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明政殿)을 보게 된다. 전통 시대 국왕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다는 관념이 있었으므로,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는 구조이다. 규모 면에서도 근정전이나 인정전이 2층 높이인 데 반해, 명정전은 단층이다. 근정전과 인정전에서 궁궐의 정문으로 가려면 문 2개를 지나가야 하지만, 명정전에서는 명정문만 지나면 바로 정문인 홍화문이 나온다. 
                이처럼 명정전이 특이한 구조를 갖는 데는 창경궁의 지형적 위치 및 궁궐의 위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창경궁의 남쪽으로는 종묘가 이어져 있어서 그쪽으로는 정문을 낼 수가 없었고, 홍화문은 동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홍화문에서 명정전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졌고, 그 결과 홍화문과 명정전 사이에 있어야 할 문 하나를 생략하게 되었다. 또한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달리 애초에 임금이 오랫동안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궁궐이 아니었으므로, 명정전 역시 근정전이나 인정전보다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성종 스스로 “내가 생각하기를 임금은 반드시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는 것인데, 창경궁은 동향인지라 임금이 정치하는 곳이 아니라고 여긴다.”라고 말한 바 있듯이, 명정전의 구조는 창경궁의 위상을 상징한다.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 심각한 훼손을 당했지만, 핵심 건물들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모두 광해군 때 중건된 건물들이다. 그중에서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현재의 명정전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은 모두 화재를 겪고 19~20세기에 재건된 것이기 때문이다. 
                명정전 옆에는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문정전은 임금이 창경궁에 머무를 때 정사를 보는 공간이었으며, 왕실의 상례 때는 신주를 임시로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정전은 영조 38년(1772)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의 문정전은 일제 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문정전 뒤에 있는 숭문당(崇文堂)은 국왕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학문과 정사를 논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도 했던 곳이다. 순조 30년(1830)에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 재건되었다. 
                숭문당 옆의 빈양문(賓陽門)을 넘으면 창경궁의 내전 영역으로 들어선다. 창경궁은 원래 성종의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영건된 궁궐이므로 내전의 비중과 영역이 크다는 특성이 있다. 이 구역에는 내전 건물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의 파괴로 인해 지금은 서너 채의 건물만 듬성듬성 남아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순조 30년(1830)의 대화재나 그 이전의 화재로 탔다가 순조 33년(1833)에 재건된 것이다.
                내전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은 함인정(涵仁亭)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인양전(仁陽殿)이라는 큰 건물이 있어서 성종과 연산군 때에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뒤 재건되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인조 때에 함인정이 세워졌다. 함인정 중앙의 마루는 조금 높게 되어 있는데, 이는 국왕을 배려한 것이다.
                함인정에서 들어가다가 왼쪽에 나오는 경춘전(景春殿)은 원래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의 침전이다. 조선 후기에는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도 사용되어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사망했고,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 앞에 있는 환경전(歡慶殿)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곳이자, 왕실 주요 인물들의 관을 모신 빈전(殯殿)으로 여러 차례 사용된 공간이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이곳에 빈전이 설치되기도 했다.
                경춘전과 환경전을 지나면 내전의 중심 건물인 통명전(通明殿)이 등장한다.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으며, 다른 건물들과 달리 월대 위에 세워져 위엄을 자랑한다. 이곳은 인현왕후가 복위한 이후 사망 직전까지 거처했던 전각으로, 장희빈이 흉물을 묻어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고변 사건의 무대로서도 알려져 있다. 통명전 옆에 있는, 통명전보다 조금 작은 건물은 양화당(養和堂)이다. 양화당은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을 자주 접견한 장소이며,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장소이기도 하다.
                양화당 옆에는 ‘ㅁ’자가 두 개 붙은 모양의 아담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정조가 재위 후반 주로 거주했던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이다. 영춘헌과 집복헌 뒤편의 언덕에는 원래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어진 자경전이 있었다. 자경전 건물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때 이건 되었으나 화재로 타버려 소실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가박물관 건물이 세워졌다가 철거되었다. 자경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병원이 생겨 경모궁은 터만 남아 있지만, 자경전 자리는 창경궁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남산까지 보이는 전망 좋은 명당이다.
                자경전 자리를 지나 북동쪽을 향해 내려가면 창경궁의 후원 영역이다. 여기서는 일제 강점기 창경원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후원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성종의 태실(胎室)이 나온다. 태실은 왕실 자손들의 안녕을 위해 탯줄과 태반을 항아리에 넣은 뒤 전국 명산에 묻고 비석과 석물을 갖춘 것을 말한다. 1928년 일제는 전국의 태실을 일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태실들을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겼는데,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성종의 태실은 창경궁 후원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후원으로 내려가면 춘당지라는 큰 연못이 나온다. 춘당지는 남쪽의 큰 연못과 북쪽의 작은 연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데, 원래 북쪽의 작은 연못만 춘당지였고 남쪽의 큰 연못은 임금이 친히 농사의 모범을 보이던 내농포 자리였다. 일제 강점기에 내농포를 연못으로 만들어 춘당지와 연결하였고, 이곳은 벚꽃놀이를 하거나 보트, 스케이트를 타는 유원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케이블카까지 설치되어 인파가 절정에 달하기도 했다. 지금의 춘당지는 1986년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서 전통 정원 양식과 유사하게 다시 조성한 것이지만, 춘당지 한쪽에는 성종 원년(1470) 중국에서 조성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조경용으로 이전해 온 팔각칠층석탑이 서 있어 과거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춘당지에서 더 들어가면 1909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大溫室)이 있고, 그 옆의 언덕 중간에는 관덕정(觀德亭)이 있다. 관덕정은 활을 쏘기 위한 정자였으며, 관덕정 아래에는 활을 쏘거나 말을 달리기 위한 넓은 공간이 있어 무과 시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관덕정에서 언덕으로 더 올라가면 국왕이나 세자가 성균관으로 행차할 때 사용했던 집춘문(集春門)이 나오고, 다시 돌아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정조가 경모궁에 제사를 지내러 가기 위해 건립한 월근문(月覲門)을 볼 수 있다.
                창경궁을 나가기 전에 월근문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와 정문인 홍화문과 관원들이 드나들던 선인문(宣仁門)을 지나서 안쪽의 빈터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원래 궁궐 안에 배치된 일반 관청들이 있었던 궐내각사(闕內各司) 구역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건물들이 철거되고 동물원이 설치되었고, 나중에는 놀이동산 일부도 자리 잡았던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 빈터이고, 중앙에 조선시대 천문 관측 시설이었던 관천대(觀天臺)가 홀로 남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그나마 일제 강점기에 옮겨졌던 것을 1983년에 제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 사진 5: 동궐 창경궁의 시간, 영춘헌 휴게공간 사진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를 맞아 창경원으로 개조되면서 치명적인 훼손을 당했으나, 궁궐의 핵심 건물 일부는 다행히 현재까지 살아남아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복원 사업을 통해 창경원의 시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창경궁 곳곳에서 그 시절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궁궐의 유산과 근현대 수난의 역사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안타까우면서도 소중한 장소이다. 
                예약이 필요하고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 창덕궁 후원과는 달리, 창경궁 후원은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고 별도의 입장료가 없다. 춘당지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단풍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한 창경궁은 밤의 궁궐을 느끼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창경궁에서는 국가유산청 주최, 국가유산진흥원 주관으로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매년 열리는 ?창경궁 야연?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올린 연회를 재해석한 행사이며, 2024년 궁중문화축전 특별프로그램으로 첫선을 보인 ?창경궁 물빛연화?는 올해부터 상설 프로그램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올해 9월 30일부터 11월 16일까지는 집복헌과 영춘헌에서 창경궁 건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600년의 역사를 조망하는 ?동궐, 창경궁의 시간?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올 가을 창경궁 나들이는 궁궐과 그 역사를 보다 깊이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