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등을 구입할 때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는 디자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디자인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세련된 것과 진부한 것의 기준 역시 시시각각 변화해왔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디자이너들은 시대를 앞서는 디자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10년이 지나도 기품이 있는 디자인, 세월이 지나도 변함 없이 세련된 빛깔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인 셈이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구닥다리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디자인 요소는 무엇일까? 이견이 있겠지만, 그 요소 중 하나를 말하자면 색채가 아닐까? 금방 싫증 나는 색이 있는가 하면, 오래 두고 보면 볼수록 세월의 결까지 더해 깊어지는 색도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색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는 이들이 바로 컬러 디자이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한 선택

컬러 디자이너 이문석은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컬러팀과 선행디자인팀에서 12년간 컬러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지금은 대학에서 컬러 디자인을 연구하며 그에 관한 책을 집필해 나가고 있다. 그녀가 10여년을 넘게 다닌 좋은 직장을 그만 둔 이유는 디자이너로서 실무를 진행하며 풀 수 없었던 궁금증 때문이었다.

‘좋은 디자인, 싫증나지 않는 컬러는 뭘까?’

업무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샘솟는 이 질문의 답을 끝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에서 찾을 수 없었다. 긴 고민 끝에 결정은 빨랐다.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배움의 길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이었다.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한 대학원들의 커리큘럼이 대부분 실기인데 반해 국민대학교 만은 이론적인 과정이 잘 짜여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6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디자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문화를 연구하며 궁금증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제까지 상관없다 여겼던 세계를 공부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시각언어로만 이야기하고 손으로만 표현했던 디자이너의 방식을 탈피해 문자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도구로 연구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어려움이 깊을수록 배움도 컸다는 것이다. 한동안 외계어 같이 느껴졌던 문장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며 그녀의 세계는 점차 확장되어 갔다.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서부터는 그 배움의 결과를 전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컬러 디자인 분야는 여전히 그녀의 학부 시절 상황과 다름없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최근 <자동차, 시대의 풍경이 되다>를 출간하셨습니다.
과거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셨던 경험이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듯한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대여섯 살 무렵, 회사에 입사했고 컬러팀에 배치됐죠. 바로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컬러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대학 때 색채 수업 하나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외국 자동차가 어떤 색을 쓰는지를 살펴보고 모방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제 스스로 컬러 디자인의 방법, 과정을 찾아가고 체계를 만들어 갔죠. 하지만 여전히 ‘어떤 컬러가 좋은 것이고 사람들에게 오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걸까?’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어요. 그저 트렌드라는 말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나 싶기도 했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고민을 풀지 않고 못 견디는 상태가 됐어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로서 후배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그런 욕심이 이론 공부로 이어졌고, 이 책을 내게 한 거죠. 제 관심의 범위는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제품의 스타일과 색채예요. 이제 자동차를 봤으니, 일상을 이루는 소소한 제품들의 스타일과 색채를 더 살펴볼 생각이에요.

컬러 디자인이라는 영역이 지금도 부족한 분야인가요?

컬러 디자인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나라 디자인은 큰 그림을 그리는 마스터플랜이 없어요. 기업이든 국가든 디자인에 대한 전략, 정책을 짤 때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일을 해결할 뿐이죠. 제가 디자이너로 일할 때도 왜 그런 것이지 알지 못한 채 일했어요.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는 디자인 분야 공부만으로 부족했죠. 디자인은 어떤 면에서는 그야말로 기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작업을 해 오면서도 그것을 추동 하는 힘에 대해서는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 문화이론, 사회이론, 철학, 역사학, 경제사를 봤어요. 공업사도 보고요. 결국 인문학과 연결되더군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여러 학문을 통합해 연구하고 디자인의 배경과 원리, 이치를 우리 삶에서 찾는 작업이죠. 그게 이뤄져야만 컬러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대 학생들을 접할 때 느껴지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즘 학생들을 볼 때면 참 힘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알아요. 많이 어렵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젊은 시기에 일제시대를 겪은 분들, 전쟁을 겪은 분들,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분들도 있어요. 어느 세대나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에요. 어떤 세대는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고, 어떤 세대는 나이 들어 겪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은 기술문명이 바뀌는 시점이라는 거예요. 그 옛날 산업혁명처럼 기술문명의 변화는 더 큰 변혁을 예고하고 있죠. 큰 변혁이 일어나면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많을 테고, 혼란스러울 거예요. 산업혁명 때도 다르지 않았어요. 역사를 공부한 장점이 이런 거예요. 인간의 삶은 다르지 않았어요. 단지 물질적인 환경과 조건이 바뀌면서 달라 보이는 것뿐이죠. 하지만 지금은 기회이기도 해요. 기존의 가치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새로운 것을 선점할 수 있죠.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컬러에 반하다

본격적으로 컬러 디자이너로 일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제부터 인가요?

디자이너가 된 것은 자연스러웠어요. 고교시절 미술반 활동을 하며 선배들에게 그림을 배웠고, 미대를 가게 됐죠. 이대 생활미술과를 다녔는데, 우리 과에서는 그때만 해도 산업디자인과 염색 공예를 같이 가르쳤어요. 그때부터였는지도 몰라요(웃음). 제품 디자인보다는 염색이 더 재미있었거든요.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화려한 색을 만드는 것은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회사를 취직하고도 자연스럽게 컬러팀에 배속됐고,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찾아가며 체계를 만들었고, 그렇게 컬러 디자이너가 됐죠.

대학시절 미래를 위해 준비했던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전 88학번이에요. 1988년은 우리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며 활기가 넘쳤던 시대죠. 자유화와 민주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시절 대학은 특히나 축제와 같았죠. 다양한 경험을 했고, 정말 재미있던 시간이었어요. 대학시절에는 사진부 활동도 잠깐 했고, 기타를 배우기도 했어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죠. 꾸준히 하진 못했어도, 이런저런 것들을 즐기던 시간이었죠. 지금 학생들과는 많이 달랐다고 할 수 있어요. 요즘 일부 동아리는 취직을 위한 준비, 돈을 벌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이 돼 버렸어요. 과거에 비해 돈이 풍부한 시대에 그런 동아리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죠.

당시만 해도 여자가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그녀는 컬러팀과 선행디자인팀을 거치며 커리어를 쌓았다.
체계가 없었다고 했지만, 컬러 디자이너로서 실무적 경험은 그녀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선행디자인팀과 컬러팀에서 12년간 근무를 하시며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행디자인팀은 말 그대로 차의 디자인을 기획하고 컨셉트카를 제작하는 일을 해요. 미래 자동차의 디자인 방향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부서인 거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디자인의 행정적인 부분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고, 제대로 된 전략이나 미래 방향을 경정하는 마스터플랜을 만드는 역할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 컬러팀은 말 그대로 스타일이 결정되면 컬러의 패턴, 광택, 소재를 결정해요. 차체는 플라스틱과 철제라는 원소재가 있는데, 거기에 색을 가공해 입히는 거죠. 단순히 색이 아니라 톤과 광택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해요. 어떤 부분은 반짝이고, 또 어떤 부분은 광택이 없어야 디자인이 사는 경우가 있거든요. 또 어디는 부드러운 느낌의 프라스틱, 어느 부분은 거친 느낌의 소재를 써야 할 때도 있고요. 그런 요소들이 얼마나 차의 분위기를 좌우하는지 몰라요. 한마디로 컬러가 시각적인 품질을 결정하는 거죠.

현업에서 실무를 하며 가장 큰 성과로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1992년 입사해서 그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생산된 모든 차의 외장 컬러를 만들었죠. 신입 때부터 저는 유채색을 적용했어요. 그때까지는 보통 회색 차량이 대부분이었는데, 갑자기 화려한 색이 나오니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화려한 색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촌스러워진다는 단점이 있어요. 하지만 전 그 색이 좋았을 뿐이지 당시에는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지나고 나서 공부를 하며 알게 된 것은 제 작업이 우리나라 포스트모던의 시작점과 같았다는 거예요. 199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다양성이 폭발하던 시대였어요. 제 작업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티뷰론, EF소나타를 들 수 있겠네요. 티뷰론은 당시 나온 스포츠 카로 파격적인 붉은 색이 화제가 됐죠. EF소나타 역시 펄의 질감이 느껴지는 화이트를 처음 적용했고요.

이문석 컬러 디자이너가 집필한 <자동차, 시대의 풍경이 되다>

컬러 디자이너가 되려면?

앞서 언급했듯 디자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분야다. 하지만 컬러 디자인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막연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옷을 입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스타일이라는 디자인의 형태가 정해지면 컬러가 들어간 패턴과 소재를 입혀 그 형태를 완성시키는 일이 컬러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컬러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이들 조차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기초적인 이론을 소개하는 책 외에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조바심이 느껴졌다.

요즘 색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형용사나 단어에 맞는,
‘발랄한 색상’ ‘우아한 색채’ 등의 컬러조합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컬러가 가진 분위기를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배워야 할까요?

어떤 색으로 배색하느냐에 따라 우아한 인상을 줄 수도 발랄한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색채는 특히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죠. 형태 역시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아하거나 경박한 인상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형태 보다는 색채가 이런 인상을 결정하는 기능이 크죠. 이런 면에서 색채는 조형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요소라 할 수 있어요. 또 그런 인상은 사람마다 자신의 미적 경험과 감성에서 각기 다를 수 있어요. 한마디로 답은 없어요. 여러 가지 자료를 객관화하면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가급적 주관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수밖에 없죠. 답은 없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일반적인 디자인 공부를 통해서도 컬러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혹 추천해 주실 만한 책이 있나요?

지금도 컬러디자인은 전공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과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아쉽게도 디자인 분야는 워낙 이론이 척박하고, 더구나 컬러 디자인을 전공으로 하는 과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 그게 제가 책을 쓰려는 이유에요. 색채에 대해 배우고 싶은 학생들에게 와 닿는 책, 인문학적 관점에서 색채 디자인을 하는 방법과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을 쓰고 싶죠. 어쨌든 여전히 그리기처럼 기술에 초점을 둔 디자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고, 학생들도 거기에 매몰돼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러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수업에 들어가서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에요. 컬러 디자인은 설비와 기계적인 도구가 필요해요. 굳이 방법을 찾자면 소재를 다루는 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이죠. 기술적인 것을 습득하면서도 미에 대한 전반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해요. 꾸준히 박물관, 미술관을 가서 좋은 작품을 보고, 어떤 시각적인 형식으로 표현해 냈는지를 고민해 봐야죠. 생각과 시각화의 관계를 고민해서 상징화의 기술을 알아가며, 그렇게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사실 저도 고민이죠. 컬러 디자인 분야는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르치는 방법의 개발도 필요하거든요.

컬러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디자이너이자 선생의 입장에서 그녀는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녀 역시도 20대는 늘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조금 달랐던 것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려운 상황을 유리하게 바꿔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꿈은 이뤄진다”는 말과 함께 잔잔한 위로를 전했다.

저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특히 꿈 이야기를 많이 하죠. 꿈을 못 찾겠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꿈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허황되기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는 것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 한다고 하면 꿈이라고 할 수 없죠. 광활한 바다처럼 꿈을 크게 정하세요. 그것을 하나의 목표점으로 두고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만들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