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피부가 하얀 벚꽃과 유난히 잘 어울린다. 봄기운이 가득한 어느 오후, 한갓진 카페에서 만난 조정민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팔등신 미녀라는 타이틀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닌 듯, 170cm의 키에 힐을 신으니 웬만한 남자 키를 능가한다. 장윤정, 홍진영 등의 계보를 이어 오랜만에 등장한 젊은 여성 트로트 신인가수, 하긴 올해로 벌써 활동 3년차니 이제는 완숙미가 더 돋보인다. 지난해 말 그녀는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성인가요부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고, 올해 초 세 번째 앨범 ‘슈퍼맨’을 발표하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화려한 지금이 있기까지, 쓰라린 시행착오와 아픈 시간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모두 소중한 경험이자, 자신을 만들어 온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최근의 근황과 함께, 유쾌했던 대학시절 캠퍼스의 추억, 한 사람의 가수로서 무대에 서기 위해 버텨야 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끝 없이 샘 솟는 열정
방송과 라디오, 각 지방 무대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지만 지친 기색은 없다. 의외로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비결은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다. 지방 공연이 있을 때면 그 지역 맛집을 찾거나 명소를 둘러보며 바쁜 와중에 여유를 찾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솔직한 태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그녀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팬들이 적지 않다.
신곡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최근 기사를 보니 해외, 특히 남미 팬들이 상당하던데요?
요즘은 노래를 함께 따라 불러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다른 아이돌 가수 팬인데 응원을 해 주는 경우도 있고요. 남미 팬들은 아마 까무잡잡한 제 피부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웃음). 제가 ‘불후의 명곡’에 출연할 때 남미 스타일로 콘셉트를 잡기도 했어요. 그 방송을 보고 남미 분들이 저를 알게 됐다고 하는데, 최근에 남미 지역의 한인축제에서 영상 통화를 통해 팬들께 인사를 드린 바 있죠.
이제 트로트 가수 3년차인데요.
데뷔 당시와 비교해 봤을 때 어떤 것들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요?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많은데, 제 노래는 대부분 잘 모르시더라고요. 가수로서 아쉬웠던 점이었죠. 그래서 더욱 제 노래를 알리려 어디든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서곤 했어요. 그 덕분인지, 최근들어 노래를 알아주시는 분들이 점점 느는 듯해요. 요즘은 가요프로그램이 거의 아이돌 중심인 상황에서 저만의 차별점을 내세우려 노력하는 중이죠. 제 장점이라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절대음감을 가졌다는 것이죠. ‘가요무대’나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은 제 노래가 아닌 다른 분들의 노래를 불러야 하잖아요. 그럴 때 그 노래의 특징을 빨리 파악하고 저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시간이 비교적 짧은 편이에요. 그런 프로그램에서 제가 끼를 펼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고요.
유명세를 경험하며 그녀는 더욱 사람이 소중해졌다고 고백한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무명의 시기를 벗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준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누구나 알만한 깜짝 인연도 있다. 과거 R&B 가수를 준비할 때, 노래 선생님이 되어 줬던 '알리'는 그녀를 유독 기특하게 여기는 선배다.
삶의 중심이 된 피아노
흑진주, 미스 파라과이, 마닐라, 빠삐코… 모두 어릴 적 그녀의 별명이다. 까무잡잡한 피부 톤에 이국적인 외모 덕분이다. 한때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그녀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웅변학원에 보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그렇듯 소심하던 그녀도 유독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무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적인 끼는 그때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피아노를 접한 것이 언제였나요?
어떤 점이 좋았는지 당시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6살 때 처음 접했어요. 가족들이 모두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제게 남다른 끼가 있는걸 아신 어머니께서 저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죠. 하지만 어릴 때부터 틀에 박힌 것은 싫어했어요. 클래식보다는 교회 반주를 좋아했고, 제가 작곡 한 것을 연주하곤 했죠. 피아노를 좋아했던 이유는 창작한 것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피아노는 제 다양한 관심사의 표현이었던 거죠.
어릴 때 시작한 피아노는 지금까지 그녀의 벗이자 소통의 도구가 되고 있다. 물론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대 시절에는 가수의 꿈이 피아노에 대한 애정을 앞질렀던 적도 있다. 조급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제시한 조건은 ‘피아노를 전공하면 가수가 되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국민대학교 음악학부를 선택하였고, 그녀에게 국민대학교의 첫인상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추억 같은 것이 있다면?
처음 학교를 봤을 때 하나의 멋진 조형물 같았어요. 그 신비로운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죠. 지금이 한창 학교 풍경이 멋질 때잖아요. 특히 성곡동산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꽃도 많이 피었겠죠? 학교 다닐 때 종종 성곡동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탕수육을 시켜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한편으로 다른 관심사나 좋아하는 것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학교를 다니며 했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예대 축제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불렀을 때가 제게는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처음 가수 제의를 받았거든요. 당시에 성악 전공인 정호진이란 친구와 ‘사랑해요 우리’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그 친구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었고 저는 그 옆에서 서서 노래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 다음으로 저 혼자 ‘I believe I can fry’를 불렀어요. 그 무대를 본 기획사 사장님께서 제게 가수 제의를 하셨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트로트 가수라는 게 문제였어요. 지금은 트로트의 참 매력을 알지만 그때만 해도 나이가 어렸고, R&B 가수에 대한 꿈이 커서 그만 거절을 해 버리고 말았죠.
운명처럼 이어진 트로트 가수의 길
삶은 참 알 수 없다. 예대 축제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트로트 가수 제의를 거절 한 이후 그녀는 인생에 큰 시련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도 어린 남동생들과 어머니를 챙겨야 했다. 어떻게든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고, 그 때 떠오른 것이 트로트 가수 제의를 했던 기획사였다. 축제에서 그녀에게 건넸던 사장님의 제안은 진심이었다. 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고 2009년 첫 앨범이 나왔다. 6개월 정도 시장 무대를 전전하며 노래를 했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준비가 부족했고, 결과 역시 좋지 않았다. 평생 피아노만 쳐온 그녀였기에 무리가 있었다. R&B에 대한 미련도 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가수 제의를 했던 기획사 대표는 그 꿈을 지원해줬다. R&B 가수 트레이닝이 가능한 기획사와 협업을 시도했고, 그때 처음 알리를 만나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R&B 앨범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지만, 그녀는 “되돌아 봤을 때 너무나 귀한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했다. 이후로는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꽤 오랫동안 정체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2011년부터 약 3년 간 공백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모든 걸 접고 아이들을 상대로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해 갔죠. 그 시간도 나쁘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랑을 많이 배웠거든요. 사랑은 주면 돌아오는 거라는 걸 깨달았죠. 아이들이 성장하고 실력이 좋아지는 걸 보면서 뿌듯하고 인간적인 애정이 느껴지더라고요.
Mnet 오디션 프로그램인 ‘트로트엑스’ 출연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나쁘진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루지 못한 가수의 꿈에 대한 아쉬움과 공허함도 있었죠. 그래서 동생을 시켜 제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동영상으로 찍게 했고, 그걸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걸 ‘트로트엑스’ 막내 작가가 보고서는 연락을 준거죠. 운이 좋았던 것이 제가 올린 곡이 성시경 선배님의 ‘두 사람’ 인데, 작가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출연을 하게 된 거죠.
‘트로트 엑스’ 출연 당시 그녀에게 붙은 별명은 ‘광진구 고소영’이었다.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실력을 선보이며 경쟁에서 이겨나갔고, 이국적인 외모도 화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다시 가수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결과 끝에 얻어낸 성과인 셈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
이제까지 그녀가 걸어온 과정을 보면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현재는 상승세에 있는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과정을 거치며 그녀는 자신이 노래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중의 인기를 받는 연예인으로, 가수로 나서는 화려한 모습 뒤에는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을 듯한데, 직업적인 측면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어떻게 버티느냐에 따라 다르고, 생각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누군가는 트로트 가수는 선후배 사이가 엄격하다거나, 대기실에서 준비하는 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그것도 기쁘게 받아들이죠. 제 직업이라 생각하니까요.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에요. 그 외의 것은 생각할 필요 없죠.
대학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픔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네요.
그 과정에서 배운 자신만의 위기 대처법이 있을까요?
일단 와인 한잔을 해요(웃음).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차근차근 되돌아보는 거죠.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내 안에서 찾는 거예요. 그리고 좋은 날은 분명히 온다는 생각을 하죠. 20대를 보내는 후배들 중에서도 힘든 상황에 빠진 친구가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힘들다고 좌절하고만 있으면 안 돼요. 사람은 생각대로 살게 되거든요. 나쁜 생각을 하면 자꾸 움츠러들고 그늘 속으로 가게 돼요. 꿈과 목표가 있다면 꾸준히 노력하고 기회를 찾아야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분명 좋은 날이 와요.
가수 혹은 연예계 데뷔를 꿈꾸는 끼 많은 후배들도 많습니다.
정민 씨 역시 방법을 몰라 막막하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요.
후배들에게 준비하면 좋을 것들에 대해 말해 준다면?
자기가 제일 잘하는 부분이 있어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보석 같은 자기만의 장점이 있을 거예요. 그게 뭔지를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해요. 깨달았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표출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완성이 됐든 되지 않았든, 우선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보석이 되거든요. 저처럼 유튜브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죠.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고 싶어요. 사람은 다 다르잖아요. 각자에게 주어진 보석 같은 재능도 저마다 다르고요. 우선은 그것이 무엇인지 찾고, 찾았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표출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라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100%를 보여줄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경험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롤모델을 찾아라
내 경우는 심수봉, 인순이 선생님을 롤모델로 삼았다. 심수봉 선생님은 청중을 집중시키는 힘을 가지고 계시고, 인순이 선생님은 댄스, 발라드, 트로트 등 모든 장르를 소화하신다. 나 역시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서 그분들의 노래와 인생, 노력의 과정을 살펴보고 나와 비교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본받을 부분이 보이고 따라 하게 된다.
즐거운 마음을 가져라
긍정적인 마음, 미래 지향적인 태도는 가수 생활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 역시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