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춰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날까? 잘 모르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답일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예술가였다. 크레파스로 종이를 가득 채우고, 콧노래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곤 했다. 하지만 자라나면서 우리는 그림은 “잘 그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디자인 같은 창작 행위는 전문 직업인의 영역이라 여기고, 무대 밖에서 함부로 몸을 움직이는 건 왠지 부끄러운 일처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우리의 감각은 점차 마비되고,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은 억눌리며, 결국 우리의 자아는 정해진 틀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감각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저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문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여 왔다. 학교에서는 감정이나 느낌보다는 논리와 이성이 더 중요하다고 배웠다. “말이 되는 것”만이 진실이라 여겨졌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채 지나치곤 했다. 그렇게 느끼고 보는 것, 몸으로 경험하는 것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을 진정 좌우하는 것들은 오히려 이성으로 완벽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나 직감일 때가 많지 않은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에 어떤 선택을 피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옳았음을 깨달은 적, 이유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 끌리거나 거리를 두게 된 적이 있다. 이렇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인 판단들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결정짓곤 한다.
우리의 감각 기관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지혜를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눈을 생각해 보자. 눈은 단순히 빛을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아니다. 우리는 눈으로 상대의 표정과 분위기를 읽어내고, 멀고 가까움을 가늠하며, ‘나’와 ‘타인’의 거리를 느끼곤 한다. 슬픈 눈망울을 보면 마음이 저릿해지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은 말하지 않아도 반짝이는 법이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관점을 멋지게 표현했다. 그는 “세계는 내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나의 몸을 통해 살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머리만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는 존재라는 뜻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으며, 몸 전체로 기억한다. 이렇게 오감으로 받아들인 모든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인간의 몸을 “살아 있는 몸” (le corps propre)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몸은 단순한 물질적 신체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존재의 중심인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관에 걸린 거창한 작품이나 무대 위의 공연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기는 ‘보는’ 방식이고, 만들기는 ‘바꾸는’ 방식이며, 춤추기는 ‘느끼는’ 방식이다. 예술은 결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일부 사람들만의 언어가 아니다.
당신은 화가가 될 필요도, 디자이너가 될 필요도, 무용수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자신을 다시 느끼고, 삶을 새롭게 설계하며, 잃어버렸던 몸의 움직임을 일상의 일부로 되찾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