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약, 먹기만 하면 알아서 낫는 걸까?”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약을 복용합니다.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고, 위가 아프면 위장약을 챙기죠. 그리고는 마치 ‘자동으로’ 약이 아픈 부위를 찾아가서 치료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이 우리 몸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해도, 정해진 위치에 정확히 도달해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산은 약을 분해해버리고, 면역세포는 약을 외부 침입자로 오해해 공격하며, 혈류는 약물을 온몸으로 확산시켜 버립니다. 결국, 약의 많은 부분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라지거나, 엉뚱한 부위에 작용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약에 ‘길’을 알려주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배달 수단’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약물전달체(Drug Delivery System)’라는 기술입니다. 약물전달체는 약이 체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지도와 운송 수단을 제공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약을 배달해드립니다!”
– 몸속 배달 플랫폼 등장 –
요즘 우리는 음식을 앱으로 주문하면 30분 안에 집 앞까지 배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약물전달체는 바로 이 음식 배달 시스템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약물은 마치 조리된 음식이고, 병든 세포는 그것을 기다리는 고객이며, 약물전달체는 이를 전달해 주는 배달 기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 몸속은 도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배달 기사, 즉 전달체는 일반적인 포장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위해 약물전달체를 나노미터(nm) 수준에서 정교하게 제작합니다. 이는 머리카락 굵기의 약 500분의 1 수준으로, 인체 조직 내에서 보다 정밀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크기입니다. 이처럼 작게 설계된 전달체는 혈관 내피의 틈이나 누출된 모세혈관을 통해 조직 내부로 침투할 수 있으며, 특히 종양 조직처럼 혈관이 불규칙하고 투과성이 높은 부위에서는 일반 약물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EPR 효과(Enhanced Permeability and Retention effect)라 불리며, 암 치료용 나노 약물전달 시스템의 핵심 원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방암 치료에 사용되는 ‘독소루비신(doxorubicin)’이라는 항암제는 리포좀이라는 나노 캡슐에 담아 암 조직에 집중 전달되도록 만든 Doxil®이라는 제품으로 상용화되어 있으며, 치료 효과를 높이고 부작용을 줄이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똑똑한 배달, 똑똑한 약
약물전달체는 단순히 약을 어디로 보내느냐를 넘어, 언제 어떻게 작동할지도 함께 설계됩니다. 마치 음식 배달이 고객의 집 앞에 도착할 뿐 아니라, 요청한 시간에 맞춰 따뜻한 상태로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죠. 최근 개발된 전달체들은 주변 환경을 감지해, 특정한 조건에서만 약을 방출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암세포가 있는 부위는 보통 정상 조직보다 산도가 낮습니다. 이를 활용해 pH 감응형 전달체는 산성 환경에서만 약을 방출하도록 설계되어 암세포 주변에서만 작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전달체는 특정 효소가 많을 때 반응해 약을 내놓거나, 체온이 올라간 부위에서만 약을 방출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약은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작동하게 됩니다.
실제 사례로는 대장염 치료제인 ‘부데소니드’가 있습니다. 이 약물은 일반적으로는 위에서 흡수되지만, 약물전달 시스템을 적용해 장까지 살아남도록 코팅되어 있으며, 장 내 pH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약이 방출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 덕분에 약물은 필요한 부위에서만 작동하고, 다른 부위에는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아 환자의 불편을 크게 줄였습니다.
약물전달 기술은 더 이상 연구실에서만 머무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다양한 치료제에 적용되어 실제 환자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코로나19 mRNA 백신입니다. 이 백신은 유전 정보를 담은 mRNA를 우리 몸속 세포에 전달해야 하는데, mRNA는 매우 불안정해서 그냥은 체내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mRNA를 지질 나노입자(Lipid Nanoparticles, LNP)라는 전달체로 감싸 안정적으로 세포까지 데려가는 데 성공했고, 이 덕분에 전 세계 수억 명이 효과적인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Abraxane®이라는 항암제가 있습니다. 이 약은 파클리탁셀(paclitaxel)이라는 약물을 나노 크기의 알부민 단백질과 결합시켜 만든 것으로, 기존 약물보다 체내 용해도가 높고, 부작용은 줄어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현재 유방암, 췌장암, 비소세포폐암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나노 전달체 기술이 임상에서 실제 효과를 발휘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이외에도 DuraSite®라는 점안약 전달 기술은 고분자 매트릭스를 활용해 약물이 눈 표면에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며, 결막염 및 녹내장 치료 등에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약물전달체는 특정한 약물의 약점을 보완하고, 효능을 극대화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약물전달체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먹거나 주사하면 전신에 퍼지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특정 세포만 겨냥해 정확한 위치에 약을 전달하고, 필요한 시간에 작동하도록 조절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만이 아니라 유전자, 단백질, 심지어 세포까지도 배달할 수 있는 전달 시스템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 질환 치료를 위한 전달체는 혈액–뇌 장벽이라는 난관을 넘어 뇌세포에 직접 접근하는 기술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같은 난치성 질환의 치료 가능성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정확히 작동하는 약물전달체는 단순한 ‘약의 포장 기술’을 넘어서, 미래 의학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정밀 의료’와 ‘맞춤형 치료’는, 사실 이 조그만 나노 배달기사들 덕분에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