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가 인공지능의 원료라면, 반도체는 그 원료를 가공하고 처리하는 핵심 부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노트북, 자율주행차, 그리고 최신 인공지능 모델에 이르기까지, 반도체는 이미 모든 첨단 기술의 기반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반도체가 관련 학계와 산업계 종사자들에게만 중요한 소재가 아니라 전 세계 경제와 국제정치의 흐름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습니다. 크리스 밀러가 쓴 『칩 워(Chip War)』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반도체가 왜 이렇게 중요한지 역사적·기술적·정치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다루면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위해 비교적 쉽게 풀어낸 책입니다.
이 책은 ‘반도체가 어떻게 탄생했고, 왜 오늘날 이토록 국가 간 경쟁의 핵심에 놓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크리스 밀러는 반도체 산업이 지난 수십 년간 걸어온 길을 연구하며, 기술 발전 과정에서 각국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제정세가 어떤 상호작용을 해 왔는지 매우 입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미국이 냉전 시기 우주개발과 군사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반도체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어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크게 약진해 한때 시장을 선도했던 경험, 그리고 한국과 대만 같은 국가들이 파운드리와 메모리 분야를 장악해온 배경을 역사적 사례와 함께 흥미롭게 들려줍니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반도체 산업이 ‘설계-제조-장비-소재-테스트-패키징’ 등 여러 단계로 세분화되어 있고, 각 단계마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는 설계 전문(fabless) 기업들이 개발한 칩을 위탁받아 제작해 주는 파운드리 영역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ASML은 극자외선(EUV) 장비를 사실상 독점 공급해,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장비를 전 세계에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엔비디아(NVIDIA)와 퀄컴(Qualcomm) 같은 기업들은 칩 설계를 전문으로 하면서도, 인공지능 관련 연산에 특화된 그래픽 처리장치(GPU)나 모바일 프로세서를 만들어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깁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글로벌 공급망 덕분에, 반도체는 단순히 한 국가나 한 기업의 힘만으로는 쉽게 지배할 수 없는 ‘연결망 산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반도체 전쟁: 국가 간 기술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갖는 핵심 기술력이나 장비·공정의 우위는 반도체 시장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칩 워』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며, 국가 간 정치·외교·무역 정책이 반도체를 둘러싸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최근 격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반도체 기술과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관련 장비·기술 수출을 제한하거나, 주요 동맹국들과 협력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인프라를 자체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반도체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해진 국제정세를 역사적 맥락부터 짚어가며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현재 뉴스에 등장하는 반도체 관련 이슈가 어디서 비롯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칩 워』가 흥미롭고 유익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반도체가 공학적 지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전자공학, 물리학, 재료공학 같은 전공 분야에서 배우는 기술적 원리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이 실제 산업 현장이나 국제정치·경제와 만날 때 어떤 파급효과가 일어나는지를 함께 살펴볼 때 더욱 큰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Application Processor)가 설계 단계에서부터 최종 조립되기까지 세계 여러 기업과 국가들이 협력·경쟁하는 과정을 떠올려 보면,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변혁의 시대에 기술과 사회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체감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또한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공급망(supply chain)’에 대한 설명입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전 세계가 공산품과 부품 공급의 불안정성을 몸소 겪었고, 반도체 역시 수급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에서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인해 생산 라인이 멈추고, 전자제품 출시가 지연되는 현상은 자그마한 반도체 부품의 부족이 전 세계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칩 워』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특정 공정이나 장비가 독점·과점될 경우 국제 분쟁이나 무역 갈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반도체가 단순히 기술 경쟁이 아니라 안보와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인공지능 시대, 반도체가 열어갈 미래
『칩 워』는 반도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현대 사회와 기술, 그리고 국가 간 갈등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종합 교양서’ 역할을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반도체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같은 기술 발전사부터 “왜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를 두고 충돌하는지”라는 국제정치 이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흐름을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에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에게 어떤 기회와 위기가 다가올지 생각해 보는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 책을 통해 기술 혁신의 근간이 되는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생히 접해 보시길 바랍니다. 반도체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움직이고, 국가 안보와 국제정치를 재편하며, 인공지능 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 축이 되는지, 각종 사례와 일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 사회에서 이 기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진로를 택하고, 어떤 역량을 키워야 하는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폭넓은 관점을 얻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이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전 세계적인 ‘반도체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는 지금, 크리스 밀러의 『칩 워』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데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