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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Exhalation)”

-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사유의 여행 -

(소프트웨어학부 윤종영 교수)

테드 창(Ted Chiang)은 현대 과학소설 문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 중 한명입니다. 그는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SF라는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거의 모든 작품이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테드 창의 글쓰기는 과학 소설의 외형을 빌리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정교하게 묻는 작업입니다. 최신 과학 개념과 철학적 사유가 촘촘하게 엮여 있으면서도, 등장인물의 감정과 윤리적 선택을 중심에 두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오래 남습니다.

2019년에 출간된 단편집 『숨』(Exhalation)은 그의 두 번째 작품집으로, 총 9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집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성찰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시간여행, 인공지능, 평행우주, 외계문명 등 SF의 고전적 소재들을 다루지만,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 자유의지, 운명과 선택, 소통과 이해의 문제입니다.

각 단편들의 내용 요약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The Merchant and the Alchemist's Gate)

고대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신비로운 문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들은 "문"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오가지만, 흥미롭게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는 설정입니다. 이는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장치를 통해 운명론과 자유의지라는 고전적 철학 문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작품의 핵심은 "시간 여행이 허락되는 세계에서조차 인간은 현재의 윤리적 태도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숨 (Exhalation)

표제작인 이 작품은 기계 문명의 한 개체가 자신의 뇌를 해부하면서 의식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의 존재들은 공기압의 차이로 움직이며, 화자는 자신들의 문명이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에 따라 결국 소멸할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이 작품은 열역학 법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존재가 보여주는 숭고한 자기 성찰을 그려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What's Expected of Us)

미래를 1초 미리 보여주는 장치인 ‘예측기’가 발명된 사회를 그린 작품입니다. 예측기를 누르면 1초 후의 자신의 행동을 미리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예측된 행동을 바꾸려 해도 결국 예측된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작품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논쟁의 핵심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

이 중편소설은 디지털 애완동물 ‘디지언트’가 상용화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디지언트들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학습하고 성장하며 감정을 느끼고 의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합니다. 이야기는 이들을 키우는 인간 트레이너들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디지언트의 권리, 소유권,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의 윤리적, 사회적 함의를 심도 깊게 탐구합니다. 의식을 가진 존재에게는 어떤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가? 디지언트를 단순한 ‘소프트웨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생명’으로 인정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마주할 법적, 도덕적 딜레마를 생생하게 제시합니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보모 (Dacey's Patent Automatic Nanny)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기계 보모가 발명되어 아기를 키우는 데 사용되는 가상의 역사를 그린 작품입니다. 기계 보모는 완벽하게 아이를 돌보지만, 인간 부모와의 정서적 교감이나 비합리적인 사랑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테드 창은 이 단편을 통해 기술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인 ‘사랑’과 ‘양육’에 개입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조명합니다. 완벽한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계가 제공할 수 없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불완전함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The Truth of Fact, the Truth of Feeling)

두 개의 서사가 교차하는 작품입니다. 하나는 기억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검색할 수 있는 ‘리멤버’라는 기술이 보편화된 근미래, 다른 하나는 문자 기술이 어떤 공동체에 처음 자리 잡던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작품은 기억의 재구성과 기록의 권력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모든 사실을 되돌려 볼 수 있다”는 능력은 관계의 갈등을 풀어줄까요, 아니면 더 깊은 상처를 남길까요? 글쓰기와 기록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바꾸는지, 그리고 “정확함”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거대한 침묵 (The Great Silence)

인간의 말을 따라 할 수 있는 앵무새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짧은 작품입니다. 앵무새는 인간들이 외계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해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행위를 관찰하며, 정작 지구 내의 다른 지적 생명체인 자신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주 저편의 ‘고등’ 지능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의 다른 생명체들의 지능과 소통 방식에는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요?

옴팔로스 (Omphalos)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지질학적 증거들이 '창조'의 흔적을 명확히 보여주며, 심지어 지구의 배꼽을 의미하는 '옴팔로스'라는 창조의 흔적까지 발견됩니다. 그러나 더 먼 우주에서 다른 형태의 창조의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창조가 '유일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증거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자아 중심주의적 사고를 탐구합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Anxiety Is the Dizziness of Freedom)

‘프리즘’이라는 장치가 발명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프리즘은 양자 분기를 통해 생성된 평행 우주의 ‘다른 나’와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다른 평행 우주의 자신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되면서, 윤리적 딜레마와 존재론적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21세기 현실과의 연결

『숨』의 작품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 가상현실의 확산, 유전자 편집 기술의 발전 등으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테드 창의 사유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현재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AI 기술과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 학습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테드 창의 『숨』은 조용한 책입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빈약함이 아니라 깊이에서 옵니다. 화려한 반전이나 자극적 기교를 기대했다면 의외일 수 있습니다. 대신 이 책은 묵직한 질문을 오래 품게 하고,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개념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도록 이끕니다. 찬찬히 숨을 고르면서 테드 창의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국민대학교 소프트웨어학부 윤종영 교수
스탠포드대학교 석사를 졸업하고 2016년 국민대학교 소프트웨어융합대학 소프트웨어 전공 교수로 부임했다. 주요활동으로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기업에서 15년 넘게 IT아키텍트로 커리어를 쌓았으며, 국민대학교가 운영한 서울시 AI양재허브의 센터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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