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과목 필기용 노트를 한 권 사서 손 글씨 필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글씨체가 예쁘지 않아도 되고 마인드맵을 그려도 좋으니 한 학기 동안 공부하는 내용을 손으로 직접 필기하세요.”
이미 AI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수업을 하면서 손으로 노트에 필기를 하라니… 이번 학기 첫 수업 공지를 듣는 학생들은, 그러나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손 필기 노트를 과제로 제출하게 한 지 세 학기째다. 학생들은 이미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들었을 테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인간의 지적 노동 방식에 전례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몇 줄의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보고서 개요가 짜이고, 복잡한 코드가 생성되며, 방대한 학술 논문이 단 몇 초 만에 일목요연하게 요약된다. 이렇게 AI가 많은 지적 노동을 대신해 주는 세상이 학생들에겐 기회일까, 시련일까.
일단 시련의 측면을 보자.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사실 더 큰 시련은 따로 있다.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적 성장 기회’를 빼앗아 간다는 점이다. 인간은 문제를 고민하고 스스로 논리를 세워나가는 과정, 어려운 개념을 애써 이해하면서 사고의 틀을 갖춰가는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 지적 성장을 경험한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AI가 만들어낸 매끈한 결과물에 안주한다면 ‘사고력’을 아웃소싱함으로써 ‘지적 성장 기회’를 넘겨주게 된다.
AI를 활용하는 능력은 결코 개인의 역량 그 자체를 키워주지 못한다. 오히려 개인의 역량이 축적되어 있을 때 AI를 활용해 백 배 증가시키는 ‘증폭기’ 역할을 한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의 채용 및 인재 육성(HR) 전략을 들여다보면 AI 툴 활용능력은 핵심역량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IBM, 맥킨지(McKinsey), PwC 등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산업의 맥락과 업무의 본질을 아는 경력자에게 AI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사업적 가치를 더 많이 창출한다고 믿는다. 많은 권위 있는 학술연구에서도 복잡한 비즈니스 의사결정에서 도메인 지식 없이 AI를 맹목적으로 신뢰한 집단은 오류율이 19%포인트나 급증하는 ‘자동화 안주(Falling asleep at the wheel)’ 현상이 나타남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기회는 있는가.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AI와의 협업을 주도하는 사람의 ‘인지적 역량’에 달려 있다. AI를 자신의 지적 파트너로 삼아 자유자재로 지휘하는 인재가 된다면 오히려 기회는 커진다. 복잡한 현실 문제를 AI가 소화할 수 있는 핵심 단위로 분해하는 ‘사고력’, 수많은 생성안 중 조직과 사회의 맥락에 부합하는 최적안을 골라내는 ‘판단력’, AI의 결과물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전제와 편향을 의심하는 ‘비판적 통찰력’,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명료한 텍스트로 풀어내는 ‘언어적 표현력’이다.
특히 AI와의 소통은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기에, 생각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AI로부터 결코 양질의 결과물을 이끌어낼 수 없다. AI를 지배하는 지적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공부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책을 숙독하면서 의문을 품고 행간을 읽어내는 시간, 손으로 직접 쓰고 정리하며 사고체계를 잡아가는 필기법 등은 개념의 내재화와 장기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방법임을 많은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자기 생각을 논리적인 글로 작성하고 타인과 치열하게 토론하며 반론을 검증하는 과정이 더해질 때 사고의 근육은 비로소 완성된다.

AI 기술의 진보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단순 작업의 자동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를 정의하는 통찰과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판단이다. AI를 다룰 수 있다고 AI시대에 적응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기를. 책을 펼치고, 손으로 적으며, 자신의 전공 분야를 파고들어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 아날로그적 고투의 시간만이 여러분을 AI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대체 불가능한 주역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