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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베키오궁의 다윗

(미술학부 김희영 교수)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직전, 긴장된 시선과 손에 힘을 모으는 청년 다윗의 정적인 순간을 표현한 르네상스 대표 조각으로 5.17m 높이의 이상적인 인체와 사실적인 근육·정맥 묘사는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적 지식과 뛰어난 조각 역량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베키오궁 앞의 <다윗>은 피렌체의 독립성과 시민적 자부심을 상징하며, 원작은 현재 아카데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피렌체를 방문할 때 지나치지 않고 찾게 되는 작품 중 하나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다윗> (David, 1501-1504) 조각일 것이다.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의 베키오궁(Palazzo Vecchio)[도 1] 정문 왼편에 놓인 <다윗>은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미의 기준을 구현한 청년 시절 미켈란젤로의 수작이다[도 2].

사진 - 도 1

▲ [도 1]

사진 - 도 2

▲ [도 2]

미켈란젤로는 26세에 <다윗> 제작 의뢰를 받고 4년간의 작업으로 완성하였다. 오래전 카라라에서 채굴된 거대한 대리석으로 제작된 <다윗>은 청년 조각가의 천재성과 역량을 증명해 주었다. 처음 의도는 피렌체 대성당 지붕에 설치하고자 의뢰했으나, 미켈란젤로의 탁월한 결과물을 보고 시민들이 좀 더 가깝게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장소에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피렌체 공관이었던 베키오궁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상화된 남성의 신체를 구현한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아마도 가장 많이 복제되어 온 작품 중의 하나이며, 현대의 다양한 문화·관광 상품에서도 자주 차용되고 있을 정도로 꾸준하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많이 다루어진 성서 인물들의 한 사람인 다윗이 재현된 모습은 목동, 수금 연주자, 물매로 돌을 던져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소년, 시편(Psalms)을 집필하는 왕 등 다양하다. 특히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에는 골리앗과 싸워 이긴 영웅으로서의 다윗이 주로 다루어졌다. 피렌체에 있는 <다윗>은 다윗의 연령, 규모, 완결된 형태 등을 고려할 때 영웅 다윗 조각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골리앗과의 전투 서사 [사무엘상 17장]를 다룬 주요 작업 중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벤 후 평정한 자세로 서 있는 승리자 다윗이나[도3], 돌을 던지는 순간의 역동성을 포착한 바로크 시기의 작업 [도4]등이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기 직전 다윗의 긴장된 상태를 포착한 점이 흥미롭다[도5].

사진 - 도 3

▲ [도 3]

사진 - 도 4

▲ [도 4]

사진 - 도 5

▲ [도 5]

그러면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피렌체의 공공 조각으로 <다윗>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리고 그의 <다윗>이 왜 피렌체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구약 사무엘상 16장~17장에 기술된 다윗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목동 소년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사울 왕을 대체하여 이스라엘 왕이 될 것으로 지명되었다(16장).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의 거인 군사 골리앗을 제거한 사건은 다윗이 왕이 되어가는 험난한 과정의 출발점이었다(17장).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소년 다윗은 장성한 군인들의 갑옷이 맞지 않아 갑옷을 벗고 편한 복장으로 물매와 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때 골리앗은 어린 소년 다윗을 보고 비웃었다가 이마에 돌을 맞고 쓰러졌고, 다윗은 달려가 골리앗의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었다.

베로키오의 <다윗>은 성서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하는 작업으로 싸움에서 승리한 소년 다윗을 보여준다[도3]. 반면 미켈란젤로는 남성적인 힘과 패기가 충천한 청년 다윗으로 설정하였다. 싸움의 대상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서 있는 5.17미터 높이의 거대한 <다윗>은 그리스 신과 같은 신성함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을 신과 같이 이상화된 누드로 구현하여 성서의 인물을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 <다윗>은 미켈란젤로의 인체 해부학적인 지식과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도6]. 대부분의 인물 조각이 벽 앞이나 벽감 안에 서 있어 뒷면을 볼 수 없으나, 미켈란젤로는 신체의 뒷 면을 모두 구현하여 이상적인 신체를 전체적으로 완성하였다[도7].

사진 - 도 3

▲ [도 3]

사진 - 도 6

▲ [도 6]

사진 - 도 7

▲ [도 7]

한편, 다윗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에 잠겨있는 정적의 순간을 포착한 점이 독보적이다. 골리앗이라는 대적과의 싸움은 다윗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미켈란젤로의 탁월함은 이 정지된 순간에 다윗의 깊은 사색을 담은 것이다. 긴장된 시선으로 적을 응시하며 마음과 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순간이다[도 8]. 다윗의 시선과 돌을 쥐고 있는 오른손의 표현에서 긴장감이 응축된 순간을 엿볼 수 있다[도 9]. 그리고 근육과 정맥 등의 인체 세부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어서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주어 보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사진 - 도 8

▲ [도 8]

사진 - 도 9

▲ [도 9]

수 세기 동안 베키오궁 앞에 있던 <다윗>은 기후와 공해로 인한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873년에 아카데미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0년에 루이지 아리게티(Luigi Arrighetti)가 제작한 실제 크기의 대리석 복제본이 원래 자리에 대체되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주조된 또 다른 복제본이 1873년에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 놓여 피렌체 시와 아르노강을 내려다보고 있다[도10]. 그러나 실제 원작의 진가를 보려면 아카데미 미술관에 방문하여 미켈란젤로의 원작을 봐야 할 것이다. 높은 둥근 천장 아래 단독으로 놓인 거대한 <다윗>은 미술관의 다른 소장품들을 압도한다.

사진 - 도 10

▲ [도 10]

장엄하고 이상화된 모습의 청년 <다윗>은 이탈리아의 주변 경쟁 도시들에 대한 피렌체의 독립적인 위상을 가시화하려는 바램을 담고 있다. 청년 미켈란젤로는 적을 물리칠 다윗의 승리를 주변 경쟁 도시들에 대응할 피렌체의 부강한 미래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도1. The Palazzo Vecchio, built in 1299, Florence, Italy
도2. The main entrance of the Palazzo Vecchio, flanked by two statues:
a marble replica of Michelangelo’s David(1910) on the left, and Baccio Bandinelli’s Hercules and Cacus(1525-1534) on the right
도3. Andrea del Verrocchio, David, c.1475, bronze, 125 cm
도4. Gian Lorenzo Bernini, David, 1623-1624, marble, 170 cm
도5. Michelangelo Buonarroti, David, 1501-1504, marble, 517 cm
도6. Detail of Michelangelo Buonarroti, David, 1501-1504, marble, 517 cm
도7. Detail of Michelangelo Buonarroti, David, 1501-1504, marble, 517 cm
도8. Detail of Michelangelo Buonarroti, David, 1501-1504, marble, 517 cm
도9. Detail of Michelangelo Buonarroti, David, 1501-1504, marble, 517 cm
도10. A bronze replica of Michelangelo’s David, 1873, 517 cm, Piazzale Michelangelo, Florence, Italy

김희영 교수 프로필 사진 -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김희영 교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및 동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미국 시카고대학교 서양 미술사 석사를 거쳐 아이오아대학교 서양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며, 서양미술사학회장 및 한국미술이론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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