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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들이
가장 사랑한 궁궐, 창덕궁

(한국역사학과 이재경 교수)

조선시대 궁궐이라고 하면 보통 경복궁을 떠올린다. 그러나 조선 국왕들이 가장 오래 머무른 궁궐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은 왕이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을 때 사용하기 위한 이궁(離宮)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을 대신하는 법궁(法宮)으로서 기능하였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성은 자연환경과의 조화이다. 넓은 평지를 닦아 창건한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응봉(鷹峯)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아래 나지막한 평지를 활용하여 건설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남북 축선에 따라 체계적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대신,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가는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동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창덕궁은 굴곡이 많은 지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창덕궁은 배후의 산자락을 장점으로 살려 넓은 후원을 조성하였다.

딱 짜여져 여유가 없고 인공적인 면모가 있는 경복궁에 비해, 창덕궁은 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현대의 관람객에게도 그러할진대, 궁궐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야 했던 국왕들은 이를 더욱 절실히 체감했을 것이다.

▲ 도판: 동궐도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창덕궁의 창건에는 태종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였다. 태종 4년(1404) 태종은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면서, 동시에 이궁의 창건을 명령하였다. 자신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의 무대였던 경복궁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궁궐 공사는 이듬해인 태종 5년(1405) 완공되었고, 궁궐의 이름은 창덕궁(昌德宮)으로 결정되었다. 조선왕조의 두 번째 궁궐 창덕궁의 시작이었다.

태종은 창덕궁을 계속 정비하여 경복궁에 버금가는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삼았다. 뒤를 이어 세조는 후원을 비롯한 창덕궁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성종은 창덕궁 동쪽에 창경궁을 정비하였다. 이후 조선 전기 국왕들은 경복궁을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법궁으로, 창덕궁을 왕실이 생활하는 이궁으로 삼아 두 궁궐을 오가는 양궐체제(兩闕體制)를 운영하였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다른 궁궐들과 함께 소실되는 재난을 맞았다. 다행히도 조선 조정이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우선 중건하기로 함으로써, 창덕궁은 전란으로부터 빠르게 복구되었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경복궁에 비해 창덕궁의 공사 규모가 작았고, 조선 초부터 경복궁이 풍수상 불길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광해군 초 창덕궁의 복구가 마무리된 이후, 조선은 동궐(東闕), 즉 창덕궁 및 인접한 창경궁을 법궁으로 삼고, 서궐(西闕), 즉 경희궁을 이궁으로 삼는 새로운 양궐체제를 운영하였다. 그중에서도 창덕궁의 위상은 압도적이었다. 연구자들이 효종 이후 철종까지 국왕들이 각 궁궐에 머문 횟수 및 연도를 헤아려본 결과, 창덕궁에 머문 기간이 다른 궁궐들을 합친 기간의 두 배를 넘었다. 조선 후기 창덕궁은 명실상부한 정치적 중심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머무는 궁궐이었던 만큼, 국왕들의 창덕궁에 대한 애정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역대 국왕들은 창덕궁의 전각을 수리하거나 증수하고, 화재 등으로 소실된 전각을 복구하며, 후원 영역을 재정비하고 정자를 세우는 등 창덕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창덕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며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궁궐이 되어갔다.

▲ 도판: 동궐도.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국가유산포털

창덕궁의 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근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창덕궁은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개항 이래 불어닥친 국내외 정세의 파도는 창덕궁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쳐, 창덕궁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의 현장이 되는 시련을 겪었다.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고종이 경복궁, 이어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가면서, 창덕궁은 오랜 기간 빈 궁궐로 남기도 하였다. 창덕궁이 다시 정치적 중심이 된 것은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폐위되고,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였다. 그러나 쇠하는 국운 속에 결국 창덕궁은 1910년 강제 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의 무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덕궁은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갔다. 1917년 화재로 희정당(熙政堂) 및 대조전(大造殿) 등이 소실되자, 일제는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을 헐어다 두 건물을 재건하였다. 이때 서양식 가구와 창문, 욕실 등이 설치되고, 내전 영역의 건물 배치가 적지 않게 변경되었다. 1926년 순종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훼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제는 창덕궁을 공원으로 삼고 인정전 등을 전시관으로 개조하였으며,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였다. 그나마 순종이 생존한 동안 피해가 덜했던 덕택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경복궁이나 동물원이 들어선 창경궁에 비해 창덕궁은 비교적 외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창덕궁은 조금씩 궁궐로서의 면모를 되찾아 갔다. 1991~2004년에 걸쳐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997년에는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평가받아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근대의 파도와 일제의 훼손이라는 시련을 넘어, 창덕궁은 조선 초부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문화유산으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창덕궁은 서쪽과 남쪽이 낮고 동쪽과 북쪽이 높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창덕궁 답사는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간 뒤 조금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금천교(禁川橋)가 나온다. 금천교는 태종 11년(1411)에 만들어진 돌다리로, 조선시대 궁궐에 남아 있는 돌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금천교 왼쪽, 그러니까 북쪽 방향에는 규장각을 비롯하여 궁궐 내에 설치된 각 관청의 집무실인 궐내각사(闕內各司)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의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 철거되었던 것을 2000~2004년에 복원한 것이다.

금천교를 건너서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던 진선문(進善門)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仁政殿)으로 향하게 된다. 지금의 인정전은 순조 3년(1803)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순종이 창덕궁에 이어 하면서 인정전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용마루에 장식된다든가, 샹들리에 등 서양식 인테리어가 들어간다든가, 푸른색이었던 창살을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다시 칠하는 변화가 나타났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인정전 동쪽으로 들어가면 국왕이 정사를 볼 때 사용하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이 있다. 선정전은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지으려 했던 인경궁(仁慶宮)의 편전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중건한 것이다. 창덕궁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각 중 하나이며, 광해군대 양식 그대로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 있다는 점에서도 특색있는 건물이다. 선정전의 남쪽에는 원래 국왕의 비서실인 승정원, 대신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빈청(賓廳), 대간의 회의실인 대청(臺廳) 등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이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빈청 건물만 황실의 가마를 전시하는 어차고(御車庫)로 기능이 바뀌었다가 카페테리아 ‘동궐마루’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에서 동쪽으로 더 들어가면 19세기 편전으로 활용된 희정당이 나오고, 그 북편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다. 두 건물은 1917년 불에 탄 것을 1920년 재건한 것으로, 앞서 지적하였듯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다 복원하면서 서양식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내부에는 서양식 인테리어가 갖추어져 있으며, 희정당 정문은 순종 내외가 탄 승용차가 입구 앞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다. 일제에 의한 창덕궁 원형의 훼손과 근대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그냥 지나가기 쉽지만, 대조전 동쪽에 붙어 있는 흥복헌(興福軒)이라는 부속 건물은 1910년 강제 병합 직전 마지막 어전회의 장소이자, 1926년 순종이 사망한 역사적 현장이다.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창덕궁 동쪽 끝자락에는 헌종 13년(1847) 세워진 낙선재(樂善齋) 영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낙선재는 원래 헌종과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으로서 다른 궁궐 건물들과 달리 단청을 칠하지 않아 단아한 모습이 특색이며, 20가지가 넘는 창살문양을 비롯해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또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들이 별세할 때까지 거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창덕궁의 가장 큰 매력은 후원이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아름답고 한국적인 정원을 조성하였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규모는 30만 제곱미터 이상으로, 창덕궁 전체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후원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건물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를 더한다. 창덕궁 후원은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대한제국 이후 쓰이기 시작한 호칭이다. 후원은 역대 국왕들의 휴식 장소이기도 했지만, 활쏘기나 과거시험을 비롯한 행사, 선택된 신하들과의 교류, 왕실의 잔치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공간이었다.

창덕궁 후원은 크게 부용지(芙蓉池)・주합루(宙合樓) 일원, 애련지(愛蓮池)・연경당(演慶堂) 일원, 관람지(觀纜池) 일원, 옥류천(玉流川) 일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면 관계상 간단히 주요 건물과 특징만 소개한다. 후원 초입의 부용지・주합루 일원은 휴식공간이자 학문과 교육의 공간이다. 연못을 중심으로 남쪽에 연꽃 모양의 지붕으로 유명한 부용정, 북쪽에 정조 즉위년(1776)에 2층 누각으로 건립된 주합루, 동쪽에 왕이 참관하여 과거시험을 행했던 영화당(暎花堂)이 배치되어 있다. 주합루라는 이름은 친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주합루의 1층이 바로 그 유명한 규장각(奎章閣)이다. 영화당 동쪽의 춘당대(春塘臺) 마당은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현장이었다.

애련지・연경당 일원은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연경당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 27년(1827) 순조의 40세 생일을 맞이하여 창건한 건물로, 사대부 살림집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 구조를 갖추고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색이다. 연경당의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으로, 벽돌로 측면 벽을 쌓고 지붕에 동판을 덧대어 해를 가리게 만들어져 있어 이채롭다.

관람지 일원은 인조 22년(1644)에 세워진 존덕정(尊德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정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가장 뒤늦게 정비된 구역으로 추정된다. 창덕궁 후원의 북쪽 끝, 가장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옥류천 일원은 인조 14년(1636) 바위를 깎아내고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든 것을 시초로, 계곡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여러 작은 정자들이 각기 다른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복궁의 화려함에 가려지기 십상이지만,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조선 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궁궐이다. 조선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지면의 제약으로 창덕궁의 매력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부디 조선 국왕들이 가장 사랑한 궁궐 창덕궁과 그 후원의 매력을 직접 체험해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이재경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하고 2024년 국민대학교 글로벌인문지역대학 한국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아모레퍼시픽재단 장원인문학자로 선발되었다. 조선시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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