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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추구했고, 영원을 빚어낸 천재 조각가의 산실
권진규 아틀리에

예술대학 최태만 학장 · 방제성(미술학부 17학번) · 구민재(미술학부 20학번) 학생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1972년 조선일보에 실린 권진규의 시 <예술적 산보-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의 한 구절이다. 그는 사물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추구했고, 썩지 않는 테라코타와 방습·방부·방충에 강한 건칠을 통해, 영원성을 구현했다. 영원성,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했던 권진규의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보라색 대문을 열어 권진규 아틀리에를 보라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차곡차곡 겹쳐져 있는 동선동 언덕길을 숨이 찰 만큼 오르다 보면 권진규 아틀리에를 만날 수 있다. 방제성·구민재 학생이 보라색 대문 앞에서 가쁜 숨을 삼키며 최태만 교수의 뒤를 따른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권진규 아틀리에는 하얀 벽에 서까래와 시멘트 기와 지붕을 얹은 단순한 구조다. 권진규 조각가의 살림집이자, 작업실로 쓰였던 이 공간은 2006년에 권진규 조각가의 유족들이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하면서 조각가의 정신을 잇는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이자, 신진 작가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다.

▲ 보라색 대문이 관람객을 맞이하는 권진규 아틀리에. 벽에는 권진규 조각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프린트한 현수막과 이정표가 있다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이 이날 권진규 아틀리에를 찾은 이유는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권진규 작가의 일생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최태만 교수가 권진규 조각가의 작업실로 들어가기 전, 두 학생에게 권진규 작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한다.

▲ 권진규 조각가의 작업 공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작업실(왼쪽)과 신진 작가의 작업 공간으로 쓰이는 살림채(오른쪽)

“권진규 조각가는 1922년에 함경도에서 부유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각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할 때 거론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과 성북회화연구소입니다. 권진규 조각가는 유학 간 친형을 병간호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었고, 그곳에서 처음 미술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죠.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성북동에서 머물면서 성북회화연구소의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하고, 이곳에서 만난 지인과 함께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조각의 세계로 입문한 배경으로 사람들은 짐작합니다. 조각에 눈을 뜬 권진규 조각가는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한 서양화가 이쾌대에게 조각가 시미즈 타카시가 교수로 있는 무사시노미술학교로 유학을 권유받습니다. 시미즈 타카시는 근대 조각의 거장인 앙트완 부르델을 사사했고, 앙트완 부르델은 근대 조각의 시조인 로댕에게 조각을 배웠습니다. 권진규 조각가는 1949년에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합니다.”

▲ 부조 <십장생> 앞에서 권진규 조각가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최태만 교수(왼쪽)와 경청하고 있는 구민재(가운데) · 방제성(오른쪽) 학생

권진규 조각가는 무사시노미술대학을 졸업한 해인 1953년에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린 <이과전>에 석조 <기사>를 출품하여 특대(특선)를 수여했다. 같은 학교에서 만난 미술학도 도모를 아내로 맞이해 결혼생활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만 1959년에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를 일본에 두고 귀국해 동선동에 어머니와 함께 정착한다. 귀국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간 곳이 바로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이 찾은 권진규 아틀리에다.

조각가가 직접 지은 작업실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이 권진규 조각가의 작업실로 들어선다. 두 학생이 작업실을 보고 첫인상에 대해 말한다. 방제성 학생이 “1900년대 중반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구민재 학생이 “권진규 조각가가 작업실 곳곳에 메모를 남겨 놓아서 그런지 저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요.”라고 말한다. 최태만 교수가 두 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술학부 전공자답게 관찰력이 좋고, 감성이 풍부하다고 칭찬한다.

▲ 권진규 조각가는 작업실뿐만 아니라 작업실에 있는 가구도 손수 만들었다. 입구에는 작은 계단으로 연결되는 2층을 설계해 선반을 두어 작품을 수장했다.

권진규 조각가는 작업실과 작업실 옆에 있는 방을 손수 지었다. 커다란 조각과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작업실의 층고를 높게 설계했고, 작은 계단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 2층으로 공간을 나눴다. 2층에는 선반을 두어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사용했다.
수장고 맞은편에는 책상과 선반 등이 놓여 있다. 책상에는 헤라, 물감 등이 있고, 벽과 선반에는 포스터가 있다. 벽돌로 쌓은 기물도 있다. 구민재 학생이 바닥에 벽돌로 설치된 기물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건 뭘까? 우물처럼 생긴 것 같은데···.” 이번에는 방제성 학생이 “그 옆에 있는 건 가마치곤 좀 작은 것 같아. 교수님 저것들의 용도는 뭘까요?”라고 묻는다.

▲ 작업실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토기를 두어 단순한 형태에서 조각적인 영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 작업실 책상에 놓여 있는 물감(왼쪽)과 조각에 쓰였던 도구들(오른쪽)

“권진규 조각가의 작품 대부분이 테라코타였어요. 테라코타는 흙, 물, 불, 공기 이른바 그리스 자연철학의 4원소가 재료인데요. 흙으로 형상을 빚어 800℃ 가마에 구어 건조하죠. 흙으로 형태를 빚을 때에는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권진규 조각가는 작업실을 만들면서 직접 우물을 팠어요. 또 성형을 완료한 다음에는 불에 구워 건조하는데 작업실에 있는 저 가마는 작품을 굽기에는 크기가 작죠. 저것은 실내를 데우기 위한 벽돌 난로이고, 지금은 없지만 작업실 밖에 있던 가마를 썼다고 합니다.”
조각가와 건축가는 거리가 멀지 않았는지 작업실을 직접 지었다는 권진규 조각가. 이곳에서 만든 작품이 궁금해진다.

땅, 불, 바람, 물 그리고 조각가의 정신

이번에는 두 학생이 권진규 작가의 대표작인 흉상과 두상, 말 등이 프린트된 포스터를 유심히 바라본다. 최태만 교수가 두 학생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1965년에 신문회관에서 열렸던 첫 개인전 <권진규 조각전>, 1968년에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렸던 <권진규 조각전>, 1971년에 명동화랑에서 열렸던 <TERRA COTTA:乾漆 권진규 조각작품전> 등 포스터가 있네요. 두 학생 모두 미술학부 학생들이니 권진규 조각가에 대해 잘 알고 있죠? 올해가 권진규 조각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는데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기념 전시회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에 다들 다녀오셨죠?”

▲ 권진규 조각가의 전시 포스터와 작업실에서의 모습을 담은 사진.
권진규 조각가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최태만 교수의 질문에 구민재 학생이 지금까지 가본 미술전시 중에 가장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며 왕성한 작품 활동이 놀라웠다고 말한다. 방제성 학생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흙을 붙여 완성한 권진규 조각가의 테라코타가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회화 작업과 유사하다며 끊임없이 몰두하고 작품에 혼을 쏟아 부었을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한다.

▲ <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49X32X27cm, 호암미술관,
사진제공: 권진규기념사업회, 이정훈

▲ <손>, 1963(사후제작), 청동, 51x28.5x17cm, 서울미술관,
사진제공: 권진규기념사업회, 이정훈

▲ <말>, 1965년경, 점토에 채색, 29x45x15cm,
사진제공: 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권진규 조각가의 테라코타에는 손의 압력, 지문 등 작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친 느낌이 있습니다. 후에는 건칠 기법으로는 이보다 더 거친 느낌의 작품들도 작업했습니다. 건칠은 형태 위에 헝겊과 옻칠을 하고 여러 겹 싸는 방법과 거푸집 안쪽에 헝겊과 옻칠을 계속해서 붙이는 방법이 있죠. 우리나라 전통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인데요. 현대 조각으로 넘어오면서 그 어느 조각가도 주목하지 않던 우리나라 전통 기법인 건칠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현대화했습니다.”

▲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작업에 열중했던 권진규 조각가. 조선일보 인터뷰 중에서

권진규 조각가는 테라코타와 건칠 기법을 바탕으로 주변의 인물을 모델로 삼아 흉상과 두상을 제작했고, 불상, 예수 등 종교적인 소재와 말, 닭 등 동물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했다. 이중 권진규 조각가의 대표작은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지원의 얼굴>.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어깨는 가파르게 내려앉도록 표현해 표정에 시선이 머무르게 했다. 평론가들은 고도로 절제된 긴장감을 자아내는 얼굴상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성, 영원을 통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끄집어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격찬은 권진규 조각가 사후에 내려진 감상이다. 권진규 조각가는 1968년에 니혼바시 화랑에서 개최한 전시회에서는 스승인 시미즈 타카시의 축사를 받고,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비평이 실리기도 하며, 작품 두 점이 동경국립근대미술관에서 소장되는 등 일본 미술 평단에서는 극찬을 받았지만, 이후 국내에서 동상 제작 등 바라던 바들이 뜻대로 되지 않고,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고독한 조각가였다.

▲ 작업실 입구에 놓여 있는 권진규 조각가의 전시 포스터.
왼쪽 포스터가 권진규 조각가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던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회고전> 포스터이다

“<TERRA COTTA:乾漆 권진규 조각작품전>에서 받은 기대 이하의 반응, 권진규 조각가를 괴롭혔던 지병, 경제적인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작품 활동은 권진규 조각가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작업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죠.”
권진규 조각가는 1988년에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회고전>에서 드로잉을 포함한 160점 작품이 전시되며 미술계에서 재평가를 받았다. 2009년에는 무사시노미술대학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역대 졸업생 중 최고의 작가로 뽑히며 <권진규 한국근대조각의 선구자> 전시회가 개최됐다.

▲ 작업실 옆에 있는 권진규 조각가의 방.
작업이 끝나면 괴테의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최태만 교수와 두 학생이 작업실에서 나와 권진규 작가가 생전에 생활했다는 방을 바라본다. 아침, 오전, 오후, 밤 시간대를 나누어 작품 제작을 매일 근면하게 했고, 작업이 끝난 후에는 동선동 언덕길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 봤다는 그. 예술이 곧 종교였던 한 남자가 기도하듯 한 땀 한 땀 흙을 붙여 세계관을 완성했을 그 고독의 시간을 헤아려보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러나 조금의 위로가 되는 것은 권진규 아틀리에가 권진규 조각가를 존경하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운영되며. 권진규 조각가처럼 예술의 길을 걷는 신진 작가들에게 안락한 작업 공간을 내주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100년의 시간이 흘러도 권진규 조각가의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 정신은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권진규 조각가가 만든 작품처럼 영원의 궤적을 돌지 않을까.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로26마길 2-15
문의 02-3675-3401(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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