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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K VOL.11 2012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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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아웃 컬쳐






밀레의 <만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익숙한 그림이다. 70년대 농가 마루에 조상님 사진과 같은 급으로 걸려있던 복제화부터, 책받침, 공책 표지, 달력 등등을 점령하던 이 그림은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이들에게 막연한 낭만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특히나 농가 부부의 고요하고도 차분한 기도 자세는 <만종>이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 같은 주연을 쏙 빼놓고도 충분히 종교화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밀레는 이 그림을 한 미국인 화가의 주문을 받고 그렸다. 약 2년간의 수고 끝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건만, 어찌된 셈인지 주문자는 그 그림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밀레는 그림을 가까운 지인에게 팔았고, 손해는 안 보고 팔겠다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값이 올라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밀레 역시 살아생전 보다는 죽은 뒤에 제대로 빛을 본 화가라 할 수 있다. 죽기 전 단 한 점의 그림만, 그것도 헐값에 팔아야 했던 고흐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좋았기는 하지만, 그는 프랑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더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그림은 주로 프랑스 내에서보다, 미국인 화상(畫商, 그림을 파는 장사. 또는 그런 장수)들에게 더 잘 팔려나갔다. 당시 돈 많은 미국 수집가들은 유럽, 그것도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은 ‘사두면 돈 된다’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꿰뚫는 혜안이 있었으니까.
1875년, <만종>이 완성된 지 15년. 그리고 그가 사망한 뒤 6년. 밀레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다. 뒤늦게 밀레의 진가를 알아차린 프랑스 예술부 장관 앙토냉 프루스트는 미국 미술 연맹과 <만종> 구입을 두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만종은 55만 3,000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 프랑스의 품에 안기는가 했지만, “그걸 그 돈씩이나 주고 사야겠냐?”는 의회 측의 반대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자고로, 남의 품에 들어간 옛 애인은 더 멋있어 보이는 법. 그제서야 <만종>을 둘러싼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이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우왕좌왕, 의회 측이 떠난 배를 운운하며 고심하는 동안, 알프레드 쇼샤르라는 한 개인 미술수집가가 80만 프랑이라는 거액으로 그림을 다시 사들여, 루브르에 기증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을 맺었다. 미국은 1년 만에 거의 30만 프랑 가까이 남겨 먹었으니 밑진 장사가 아니라 생각했겠지만, 지금 수준으로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손해.



밀레의 그림이 관료사회에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당시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의 심사 위원들이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영웅을 주제로 하는 ‘역사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풍경화나 정물화 등은 그 위상이 높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밀레를 위시한 당시의 풍경화가들 다수가 살롱전에서 빈번히 낙선의 수모를 당하곤 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밀레가 그저 자연의 풍경만 옮겨온 것이 아니라, 대지와 가장 가까이서 노동하는 농부들의 삶을 자신의 풍경화 속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밀레의 그림은 종종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그의 <괭이를 든 사람>을 두고, 좌파 진영의 비평가들은 ‘거친 대지에 우뚝 선 가난한 노동자’ 운운하며 밀레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치켜 올렸다. 그에 비해 우파 평론가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마치 살인마처럼 보인다고 폄하하면서, 밀레를 사회적인 살인 교사자, 또는 농촌범죄선동자로 몰아세웠다. 즉 그들은 자칫 밀레의 그림이 사회선동적 그림으로 읽혀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실제의 밀레는 그럼 좌파였을까, 우파였을까?
1871년 2달 동안 정권을 장악한 파리 코뮌은 ‘혁명 공화국의 원칙에 동조하는 파리 예술가’들의 모임으로 ‘파리예술가 연맹’을 결성하고, 밀레에게 위원직을 요청했더랬다. 하지만 정작 그는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심스럽지 않은가? 대체 내게 무슨 감투를?”이라고 개탄하며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가난한 농부에 꽂혀 러브 콜을 보내던 파리 좌파에 대한 밀레의 입장은 ‘관심없수!’였던 모양.

종종 그는 자신을 한없이 미화시키고, 과장시키는, 화상이자 그의 첫 전기 작가인 상시에에 의해, “도시에 만연한 퇴폐적 개인주의와는 정반대로 확고한 가치관을 중심으로 응집된 농촌 사회의 기수격”으로 묘사되었지만, ‘도시의 퇴폐적 개인주의’는 벗어났을 지 모르지만, 대신 ‘전원형 개인주의’를 고수한 냉담한 지식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밀레가 농가의 자식으로, 누구보다 그들 삶의 애환을 잘 이해했다고 전기 작가는 떠들어대지만 실상 그는 부농의 자식으로 어린 시절, 재미 삼아 농사일을 거들었을 뿐, 악착같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밭을 일구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바르비종이라는 시골마을로 내려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정작 자신의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을 농부들과는 어떤 교류도 나누지 않았다. 즉 농부들은 그림의 대상이었을 뿐, 정작 친교의 대상은 파리를 주름잡던 문화, 예술계의 인사들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의 <이삭 줍는 여인들> 속 여인들은, 고된 노동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보수로 악명 높은 그 일을, 허리 다쳐가며 일하면서도 마치 종교화의 성녀들처럼 우아하고 담대하게 그려져 있다. <만종>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이롭게 아름다운 전원풍경과, 단단하고 야무진 신체를 가진 촌부들의 고상한 자태 때문에 노동의 처절함이나 삶의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밀레의 정치적 입장이 어떠했건, 그가 서민들, 특히나 가난한 농부들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 끌어들인 것은 고무적이다. 이렇게 소외된 자들을 그토록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것도 주인공으로 당당히 내세운 그림은 밀레 이전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근대 회화 작품으로 분류되어 현재는 루브르에서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진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들>이 벌어들이는 그 막대한 수입을 생각해보라. 그 수입의 일부가 현재 파리의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복지기금에 다소간 쓰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자의건 타의건 그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 재미있는 것은, <만종>의 바구니에 원래 밀레가 죽은 아이를 그려 넣었다가 지웠다는 사실.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는 아이가 많았던 시절, 엄마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바구니에서 고요하게 숨을 거둔 그 아이가 만약 지워지지 않고 화폭에 남았다면,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가난한 자들의 처절한 일상’을 읽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동안 내내 침묵했던 그 신에게, 원망 대신 고요한 기도를 택한 순종과 믿음과 인내의 깊은 신앙심을 읽었을까.

보는 자의 정치적, 종교적 취향에 따라 분명 그림은 달리 읽혀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