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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가지고 원칙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라 친환경 정원도시의 미래
열어가는 조충훈 순천시장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77학번

지난 2013년 4월부터 10월까지 순천은 사상 유래 없는 인파로 북적였다.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순천시 풍덕동, 오천동, 순천만 일원 1,112,000㎡의 부지에 23개국, 83개 정원이 꾸며졌고 하루 평균 23,934명 총 44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결국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은 행사가 됐다. 하지만 박람회 개회 전까지 성공을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그때까지 지자체 단일 행사로 그 정도 규모의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인 이가 바로 조충훈 순천시장이다. 지난 2002년 처음 민선 3기 순천시장에 당선된 후 각 지자체가 지역개발을 위해 대기업 공장과 발전소 유치에 공을 들였던 시절, 그가 주목한 것은 자연과 환경이었다. 시작은 순천시를 가로지르는 동천을 살리는 작업이었다. 반신반의하던 시민들도 변화하는 순천의 모습에 지지를 보냈고, 그렇게 조충훈 시장은 지난해 민선 6기 시장으로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적지 않았다. 젊은 날의 방황을 멈추고 중심을 잡은 것은 국민대학교 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부터였다. 한때 기자를 꿈꿨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향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이야기. 그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삶의 교훈을 들어봤다.

Q 2002년 민선 3기 순천시장을 시작으로 2012년, 그리고 지난해 6.4지방선거에서 다시 순천시장에 당선되셨습니다. 순천시민들에게 지속적인 지지를 받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네요(웃음). 저는 지속적으로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대다수의 시민들이 원하는 바를 꾸준히 확인하고 그것을 시장으로서 실현 시키려 했어요. 모두가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을 쫓을 때 순천 시민들이 추구하는 시대정신은 자연과 생태, 삶의 질 향상이라는데 확신을 가졌죠. 전 그런 시대정신에 맞춰 정책을 펼친 것뿐입니다.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은 그 노력의 진정성을 공감해 주신 시민들이라 생각해요.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은 노력의 진정성을 공감해 주신 시민들이라 생각해요.

Q 이제 취임 1주년이 넘은 상황입니다. 그간의 고심하셨던 부분과 함께 이번 임기 중 구상하시는 순천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순천은 지난 2013년에 국제정원박람회라는 정말 색다른 이벤트를 했던 곳입니다. 시민들이 모두 힘을 합해 성공한 국제행사라 할 수 있죠. 그 다음 제가 고민한 것은 이후에 우리 순천이 나아갈 길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성공한 행사라 해도 사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후 활용과 지속 가능성이거든요.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성공 여부를 떠나 실망을 주게 되죠. 지난 1년은 그 지속 가능성이 제 가장 큰 숙제였고 그걸 풀기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얼마 전 정부에서 순천만정원을 ‘국가정원 제1호’로 지정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 역할은 이것을 계기로 순천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생태와 정원의 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Q 시장님의 고향 역시 순천이십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신다면?

지금과 비교하면 제 어린 시절 순천은 꽤나 척박한 지역이었어요.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힘겨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척박함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오늘날 ‘순천=정원도시’가 되는 전화위복의 요소가 됐다고도 생각해요. 어린 시절에는 그야말로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며 뛰어노는 철부지였죠. 다만,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란 편이에요. 친구들이 고무신을 신을 때 운동화를 신고 다녔으니까요.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난 탓에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아버님은 꽤나 엄격한 분이셨습니다. 몽당연필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는 것을 보면 호되게 혼을 내셨죠.

Q 중, 고교 시절을 지나면서 점차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목표들이 생기셨을 듯한데, 고교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유학을 갔어요. 그 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서울에서 쭉 생활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서울과 순천은 참 멀었어요. 당시 순천에서 서울까지 가장 빠른 기차가 ‘풍년호’라고 있었어요. 빠른 기차라는 것이 6시간 걸렸죠.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는데, 방학 때 집에 왔다가 서울 올라갈 때면 전 종종 호주머니에 잔뜩 무언가를 담아가곤 했어요. 예를 들면 ‘국산품을 애용 합시다’ 같은 표어를 적은 종이인데, 그걸 기차 창문을 열고 뿌렸죠. 어린 마음에 나라사랑이랄까? 지금 생각해보면 좀 남달랐던 구석도 있었던 것 같네요(웃음). 당시에는 그 정도지 솔직히 어떤 구체적인 꿈이나 미래를 정립하기는 미흡했던 시기였어요. 단지 부모님 기대가 상당히 높았어요. 당시에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고교시절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때는 종종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시위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데, 좀 치기어리고 왕성했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Q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할 당시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20대 젊은 새내기로서의 포부는 무엇이었나요?

그때는 요즘보다 더 대학의 서열이 심했어요. 예비고사라는 것도 있었고요. 처음 대학시험을 칠 때는 당연히 일류대학에 갈 거라 생각하고 기세가 등등했죠. 그런데 1차에 낙방하고 말았어요. 후기대 지원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재수를 선택했죠. 그런데 역시 건방졌어요. 재수에서도 1차에 떨어지고 마지못해 후기대 시험을 치려했는데, 시험 전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2차에서도 떨어져버렸죠. 결국 삼수를 선택했고, 우여곡절 끝에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어요. 당시 국민대학교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죠. 민족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만든 대학이라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다른 일류대학에 비해 빛을 보지는 못할 때였어요. 학교도 막 정릉 캠퍼스로 이전했을 당시라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정을 붙이지 못했죠. 그러다가 학보사 기자가 됐는데, 그게 큰 변화의 계기가 됐어요.

Q 학보사 편집장도 지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에피소드가 많을 듯 한데요.

삼수를 해서 선배들 보다 나이도 많고, 학교에도 정을 못 붙이며 2~3개월 다니다가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즈음 우연히 학보사 기자 모집 공고를 봤어요. 시험을 봤고, 다행히도 합격을 했죠. 학교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하며 취재를 하고 집중을 하다 보니 그때부터 학교생활이 정말 좋아지더군요. 열심히 하면서 편집국장도 됐고요. 하지만 당시 대학 학보사 편집국장의 역할은 만만치 않았어요. 학생들의 시위가 빈번하던 시대였으니까요. 어떤 학기에는 수강신청만 해 놓고 교수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종강을 했던 때도 있었죠. 그때 학보사 편집국장을 하다 보니 일반 학생들보다 더 비판적인 시각이 커졌어요. 결국에는 제가 쓴 칼럼이 문제가 됐어요. 당시 유기춘 문교부 장관을 ‘둔마(鈍馬) 장관’이라며 비판하는 칼럼이었어요. 헌데 당시는 국민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도약하던 꽤 민감한 시기였어요. 그런 시기에 장관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으니 문제가 심각해졌죠. 결국 긴급조치위반이 돼 버렸어요. 다행히 학교에서도 정부와 잘 조율해 결국 저는 학보사를 관두고 군대를 가는 조건으로 구속되지 않았죠. 그렇게 20대를 보냈어요.

학교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하며 취재를 하고 집중을 하다 보니 그때부터 학교생활이 정말 좋아지더군요.

Q 청년 시절 전남 지역 출신 최초 한국청년회의소 중앙회장, 세계청년 UN총회 부의장 등을 맡으며 활발하게 보내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스물여섯 살 무렵에 한국청년회의소에 가입 했어요. 20대부터 40대 청년들이 활동하는 단체였죠. 거기서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시작했어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게 신한국당 위원장 자리를 맡기더군요. 고민을 많이 했죠. 당에서 제안에 앞서 내 세운 조건이 ‘5·18 특별법’을 만들겠다는 거였어요. 시대적 사명감이 생겼죠.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탈당을 했어요. 그 후에는 김대중 정부에 힘을 보태게 됐고, 2002년 민선 3기 순천시장에 출마해 당선됐죠. 제 정치적 행적을 보면 중앙정치에 가까웠지만, 지금처럼 지역중심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역시 한국청년회의소 활동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원도심 재생이나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한국청년회의소 활동 당시부터였죠.

Q 2002년 순천시장으로 처음 당선 됐을 당시, 어떤 다짐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장선거에 나서면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그 당시에는 지방자치제 하에서 지역개발이 중요한 화두였어요. 전국 각 지자체는 앞 다퉈 공장이나 기관 유치를 시도했죠. 하지만 순천의 지향점은 그게 아닌 듯했어요. 바로 옆의 여수는 이미 화학공단이 있고 광양은 제철이 들어와 있고, 창원과 구미 역시 이미 공단이 몰려 있었거든요. 그 당시 순천이 공단을 유치한다 해도 앞서 가는 다른 도시를 따라잡을 수 없겠다 싶더군요. 아무리 잘해도 다른 지역보다 못한 도시가 될 바에는 목표 설정을 다른 방향으로 하자는 결심을 했죠. 그때 눈에 띄는 것이 순천을 가로지르는 동천이었어요. 당시 동천은 3급수 정도로 오염 돼 있었고 주변 정리도 안 돼있었던 상태였어요. ‘동천을 살리자’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 생태와 자연이에요. 그 관심이 강의 하구인 순천만까지 이어진 거고요. 그러다보니 동천은 1급수의 깨끗한 강으로, 순천만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했습니다. 강이 깨끗해지니 순천만이 돋보이고, 2006년에는 람사르 협약(습지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에 등록되는 성과도 올렸죠. 불법 시설물, 무허가 식당을 정리하고 공을 들이다보니 1년에 10만명이던 관광객이 100만명, 200만명으로 늘어나더군요. 예전에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지로 공업단지나 고적을 봤어요. 하지만 이제 자연이에요. 공해, 지구 온난화 문제가 대두되며 자연이 시대정신이 된 거죠.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아이디어도 그렇게 나온 것이고요. 어느 누구도 처음 시작할 때는 알아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성공을 거뒀죠.

동천은 1급수의 깨끗한 강으로, 순천만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했습니다.

Q 정치인으로서 또 부모로서 자녀분들에게 모범적인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 듯 한데요.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무엇인가요?

첫째 딸, 아들, 막내 딸 모두 커가면서 가장 강조한 것은 원칙이에요.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저희 아버님이신데, 사랑을 듬뿍 주셨지만 굉장히 엄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기를 때 엄한 아버지 대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죠. 하지만 매사에 원칙을 강조하다보니 역시 엄한 아버지로 굳어지더군요(웃음). 그럼에도 원칙을 지키며 최선을 다 하는 것, 이는 지금도 제 아이들, 그리고 제 자신에게 가장 최고의 덕목입니다.

Q 젊은 시절 시장님의 가장 큰 시련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삶의 교훈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앞서 이야기한 대학 입학 과정에서 연거푸 낙방했을 당시죠. 그리고 아버님을 위해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적잖이 힘들었고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버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어요. 원칙을 지키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게 제가 깨달은 교훈이에요. 정치를 하면서도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진정성만으로 되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아직도 남아있는 지역감정도 그렇고, 사회적인 부조리도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시대야 말로 진정성이 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거에요.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은 진정성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보가 한정적이었던 예전에는 머리 좋고 꾀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속일 수 없죠. 진정성이 없으면 인정받을 수 없어요. 진정성을 바탕으로, 다양성과 창조성을 무기로 한다면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이뤄냈던 것보다 더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

Q 자신의 신념, 목표를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20대 학생들, 미래를 책임질 청년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의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요즘 학생들을 볼 때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취업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취업을 위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학생활에는 열정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 시절이 아니면 경험해 보지 못할 일들에 도전하고 또,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는 워크숍이나 모임에서 젊은 친구들을 보면 자신만만하고 재능과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는 생각을 늘 해요. 그러나 조금 아쉬운 것은 원칙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 예의와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에요. 인간사회에서 예의는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덕목이라 생각해요.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이왕이면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판사나 검사, 의사가 성공의 지표였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예술가, 스포츠 스타들이 더 대접받고 있잖아요. 사람에게는 각각의 재능이 있고 그 장점을 진정성을 가지고 키워나갈 때 진정한 성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내세요!

조충훈
2014 제8대 전라남도 순천시 시장
2012 제7대 전라남도 순천시 시장
2012 제40대 한국청년회의소 중앙회장
2002 제4대 전라남도 순천시 시장
2002 전라남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상임대표
2002 전라남도 시장군수협의회 회장
2002 한국보이스카웃 순천지부위원장
1991 세계청년UN총회 부의장
1991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 한국수석대표
1991 한국청년정책 연구소 초대이사장
1985 전라남도 순천시 국제대학생자원봉사연합회 회장
1985 순천상공회의소 상공위원
1985 민주당 총재특보
1985 전국평생학습도시협의회 회장
1985 전국시장 군수 구청장협의회 수석부회장
1985 전국시장 군수 구청장협의회 사무총장
1985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 연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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