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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져라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인 류근

사랑에 가슴 아파본 이라면 한번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를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랫말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던 기억은 없다. 그저 얼핏 작사가가 ‘류근’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요즘 그 이름이 심심치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 <역사저널, 그날>의 재치 있는 입담꾼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한때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페이스북의 프린스’, 얼마 전부터 류근 시인에게 붙은 별명이다. 시대의 코드와 그의 세계관이 통했던 덕분일까? 그가 온라인에 쏟아 내는 글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등단 이후 무려 18년 가까이 전혀 작품을 내지 않다가 지난 2010년 첫 시집 <상처적 체질>을 출간하고 이어 2013년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로 연이은 히트를 기록한 기이한 이력의 시인. 젊은 시절 수개월 인도를 방랑하고 돌아와 돌연 산골로 스며들어 고추농사를 짓기도 했고,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벤처기업을 창업해 대박을 경험하기도 했다. 시인이라는 그의 이력 뒤에 언뜻 연관 없어 보이는 이 삶의 궤적은 과연 무엇일까? 봄날의 햇볕이 조금은 덥게 느껴지는 어느 오후,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만나 카페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청바지에 셔츠를 걸친 수수한 차림,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그는 요즘 한창 봄앓이 중이라며 조금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Q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시며 대중적인 인지도가 더 올라가신 듯합니다. 이젠 알아보시는 분들도 꽤 될 듯한데, 예전에 비해 달라진 점은 무엇입니까?

출연한지는 이제 1년 반 정도 됐어요. 그런데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네요. 이를테면 시인으로써의 정체성 같은 것이 가벼워졌다고 할까요. 나름 어떤 신비주의 같은 이미지가 있어야 되는 건데, 방송을 하며 헐값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에요(웃음). 글 쓰는 사람에겐 방송이 그리 좋은 것 같진 않아요. 더구나 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봐주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죠. 그냥, 편치 않아요.

Q 그럼에도 방송을 이어가고 계신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아들이 둘인데, 처음 출연 제의가 왔을 때가 큰아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제가 거절하는 소리를 듣더니 와서 “아빠 방송 나가시면 안 돼요?” 하더군요. 아빠가 시인이라는데 겉보기에는 동네에서 백수처럼 논지가 꽤 되니 아들 녀석도 조금 창피했나봐요(웃음). 그래서 그 말 듣고는 ‘그럼 한번 해볼까’가 된 거죠. 근데 제가 핸디캡이 있어요. 발음이나 억양이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그럼에도 무턱대고 하게 됐는데 저 같은 사람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하네요(웃음).

Q 요즘 페이스북에서도 활동이 활발하신데, 나름 트렌드를 포착하신 것인지?

페이스북은 그야말로 우연찮게 하게 된 거예요. 후배 작가가 저보고 ‘반드시 해야 한다’며 계정을 만들어주더군요. 처음에는 뭐 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저 우리끼리 논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하다 보니 빠져들게 돼 버렸네요. 내가 설정한 환경에 내가 빠져 들어가고 헤어날 수가 없게 돼 버렸어요. 그저 논다고 시작한 것이 일이 커져버린 거죠(웃음).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져도 역사의 양상은 늘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Q <역사저널, 그날>은 매회 패널 분들께 숙제가 주어지는 듯한데요.

최근에 정약용 선생을 주제로 2부작이 긴급편성 됐어요. 저와 함께 나오는 패널들은 아시겠지만, 거의 전공자들이시잖아요. 반면 제 경우는 매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좀 부담이 있는 편이죠. 그래서 컨디션을 조절해가면서 공부를 하는 편인데, 요즘 봄앓이(?)하느라고 컨디션 조절이 안 돼 걱정이에요.

Q 시인인 선생님을 패널로 채택한 것도 나름 제작진의 노림수가 있을 듯한데요. 선생님만의 프로그램 준비법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제게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제작진도 처음에는 좀 어쩔 줄 몰랐던 것 같은데, 하다 보니 이젠 어떤 룰 같은 것이 생긴 듯해요. 제 경우는 문인, 시인이라고 해도 역사학자는 아니니 전문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고 질문을 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간혹 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는데, 작정하고 얘기를 한 것들은 다 편집하더군요(웃음).

Q 언젠가 “역사를 역사 따위로 생각하면 그 인생 또한 인생 따위가 돼 버린다”라고 하신 말씀이 세간의 화제가 됐습니다. 방송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깨닫는 점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제 생각에 저를 채택한 건 아마 평소에 역사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인 듯해요. 저는 역사를 참 좋아해요. 시인이지만 문학책보다 역사책을 더 많이 읽을걸요.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외로울 땐 역사책’이거든요. 역사책에서 위로를 많이 받는 편이죠. 역사는 시대를 반영하니까요. 제가 방송에서 무심히 한 말 중에 “어떤 권력도 백성보다 오래 살아남진 못한다”는 말도 있어요. 역사 속에 권력은 피비린내 나도록 쟁탈하는 장르지만, 사실 다 무상한 것이죠. 오래 못가거든요. 권력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보면 회의가 들지만,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져도 역사의 양상은 늘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비단 정치사만이 아니라 민중사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했고, 수탈당하는 사람은 계속 수탈당했어요. 백성들은 늘 어려웠어요. 좋았던 때가 없었죠.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좋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 답도 역사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궁리해봐야죠.

Q 방송 외에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도 커지는 듯합니다.

지금은 아주 재기발랄한 웹툰작가와 작업 중이에요. 공동 작업으로 곧 책이 나올 거예요. 그 외에 시집 원고도 준비하는 중이고 산문집은 언제고 나올 것 같고, 그러네요.

Q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흔히 시인의 문학적 자질은 어린 시절 환경도 일조한다 하는데, 선생님이 자라셨던 공간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저는 굳이 충북 충주에서 자랐다는 말을 해요. 그 이유가 있어요. 문인의 경우 모국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가 참 중요해요. 모국어의 환경이 그 사람의 특유의 정서를 형성하는 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는 그런 환경이 충주였던 거죠. 더 정확하게는 충주의 중원이라는 곳이에요. 전 남한강 사람이죠. 그 일대, 그 사람들, 거기 있던 우리 풍경들…, 강물의 이미지와 먼 산의 이미지…,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제 내면에서 일종의 정서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Q 선생님의 작품이나 페이스북의 글 외에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큰 키와 호남형의 외모이신데 꽤 남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을 듯합니다.

중학교 2학년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갔어요. 이태원 근처에 있는 오산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경기도 ‘오산’과 혼동하지 마세요(웃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거든요. 오산고등학교가 배출한 3대 시인이 있잖아요. 소월, 백석, 그리고 저 류근이죠(웃음). 사실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 소년이었고, 시인을 꿈꿨죠. 그러던 차에 고교에 입학하고는 문예부에 들어갔고요. 당시에 오산고를 비롯한 다섯 개 학교가 연합해 문학토론을 하는 서클을 매주 진행했는데, 사실 문학을 빙자한 술 모임이었죠(웃음). 한 마디로 일종의 문제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선생님들께서 많이 봐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런 낭만 같은 것이 있던 시대였기도 하고요.

Q 스스로에게 문학적 자질이 있다고 느낀 것은 언제인지?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미 꽤 문재(文才)를 인정을 받았던 학생이었어요. 용산을 비롯해 그 주변 서울 일대에서 꽤 알려진 문학 소년이었죠(웃음). 백일장이나 공모전에서 장원, 당선을 종종 했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인정을 하더군요. 이렇게 말하면 선배들한테 혼날지도 모르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니까(웃음).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할 불행의 총량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Q 외모나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과거가 있을 듯한데, 실제로는 어떠셨나요?

그렇진 않아요. 처절한 개인사까지 털어 놓기는 좀 그렇지만, 늘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느꼈던 같아요. 자라면서 ‘행복하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죠. ‘어떻게 이걸 벗어나지?’, ‘어쩌면 이건 내 인생이 아닐 수도 있어’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아요. 늘 벗어날 궁리,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죠.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가난에서 벗어났는데 그럼에도 생각과 다르더군요. 그 전에는 가난만 벗어나면 불행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제는 가난이 아니었다는 거죠.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할 불행의 총량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부자건 가난뱅이건 감당해야할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게 저마다의 숙제죠.

Q 선생님의 20대 대학생 시절, 우리나라의 시대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배워나가셨는지 궁금합니다.

글쎄 그때는 웬만하면 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이라 굳이 열심히 한다고 하지 않더라도 그쪽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학과 친구였고 여학생이었는데, 그 죽음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방법 보며 ‘운동을 위한 비인간화’를 느끼게 됐죠. 그러면서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난 역시 그냥 문학을 해야겠구나’라며 좌절할 뿐이었죠. 자괴감도 심했고요. 실망과 절망, 회의를 느끼며 많이 방황했죠. 오죽했으면 군대 입영통지서를 받고 ‘아,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너무도 황폐하고 피폐한 대학생활을 보내다보니까 뭐든 돌파구를 간절히 원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군대였던 거죠. 하지만 막상 군대를 가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한 50배는 힘들더군요(웃음).

Q 제대를 한 이후에는 어땠나요?

군대갔다왔더니 집안이 더 망해 있더군요(웃음). 군대 가기 전에 신었던 양말 한 켤레 안남아 있을 정도로 완전히, 오갈 데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럼에도 근근이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녔죠. 제게 그 기간은 그야말로 ‘필름이 끊긴 세월’ 같아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었어요. 지인,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며 사는 빈대 같은 삶이었던 거죠.

Q 학비를 벌기위해 노랫말 쓰는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고 김광석 씨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알고 있고요.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궁금하네요.

다행히 군대 제대 얼마 뒤에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어요. 당시 우리학교 문창과는 신춘문예 당선이면 2년 정도 학비가 면제 되요. 그런데 제가 워낙 학점관리를 못해 한 학기를 더 다녀야하는 상황이었고,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을 찾던 중에 후배가 가사를 한번 써보라고 하더군요. 등록금 정도는 나올 거라는 말에 하룻밤 사이 29개 정도 작사를 해서 줬어요. 사실 노래 가사라는 것이 운을 맞춰야 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건데, 그때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런지 잘 써지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그 가사를 넘기고 나서도 감감 무소식이더군요. 알고 보니 음반사가 망했던 거예요.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한 2년 쯤 후에 김광석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작곡을 다 했다며 녹음실로 오라더군요. 재미있는 건 지금은 명곡이지만,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제 느낌은 실망이었다는 거예요. 제가 생각한 느낌과 전혀 다른 음이더라고요. 포크락이라는데, 도통 마음에 안 들더군요. 그런데 당시에 50만원을 주더군요. 그때도 어려울 때니 감지덕지한 거죠. 그렇게 노래가 나온 후 한 세 번쯤 들어보니 그때부터 노래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더군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김광석 씨가 작곡한 몇 안 되는 곡 중 하나에요. 나중에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노래가 김광석의 음악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고 하더군요.

Q 그렇다면 대학학비는 결국 자력으로 해결하셔야 했을 텐데,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많이 하신 편인가요?

이것저것 참 많이 했어요. 주로 출판사에서 기획업무, 교열, 교정을 많이 봤어요. 심지어는 일본 만화책 대사를 윤문하는 일도 했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했어요(웃음). 그 외에 라디오 방송 작가도 하고, 끊임없이 뭐든 글과 관련된 일을 했죠. 사실 군대 제대하고 막노동도 며칠 했는데, 그건 도저히 못하겠더군요(웃음).

Q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 작가의 길을 가는 대신 다른 길을 택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때는 취직하기가 참 쉬웠어요. 요즘 학생들보면 참 안됐어요. IMF 사태 터지기 전까지는 그냥 선배들한테 좀 부탁을 해놓으면 갈 수 있는 회사가 제법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지금 학생들 보다는 훨씬 수월했던 편이죠. 한편으로 재학 중 신춘문예로 등단한 경력이 있으니 남들 보다 잘 됐던 면도 있고요.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꽤 완벽주의자로 인정받으면서 직장생활을 했어요. 원래 글 쓰는 사람들이 완벽한 글을 쓰고자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완벽주의자가 많아요(웃음). 집중도 잘해서 남들 하루 걸릴 일도 몇 시간이면 해치웠고요. 뜻밖에 성실했다는 거예요. 물론 근태를 따지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만요(웃음).

Q 갑작스레 인도로 떠나신 것도 이유가 있으신가요?

한 4년 직장 생활할 때쯤, IMF 사태가 터지기 얼마 전인데, 전 그때 모 그룹 홍보실에서 일했어요. 이미 회사가 부도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매일 아니라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죠. 이러다가는 나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이 생긴다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또 문학을 배웠다는 놈이 거짓말이나 일삼는 건 아니지 않나하는 고민도 컸고요. 그러다가 별안간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때가 IMF사태 4개월 전이었죠. 당시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그만둔 것인데, 이후에는 정말 취직이 안 되더군요. 백수로 지내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차라리 인도에 가서 죽자는 생각으로 떠났어요. 그나마 남은 저축을 가지고 인도로 떠났죠. 그곳에서 한 5개월 있었어요. 나중에는 눈썹이 노랗게 될 정도로 극빈의 생활을 했어죠(웃음). 인도에서는 주로 리쉬케쉬(Rishkesh)에 머물렀어요. 명상의 도시로 유명하죠. 그 옛날 비틀즈의 링고스타가 명상에 빠졌다고 하는 그 도시에요. 그 외에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죠.

무엇이든 끊임없이 성실하게 하고 있으면 기회는 온다고 생각해요

Q 강원도 횡성에서 고추농사를 짓기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찌 보면 기행의 연속 같습니다.

인도에서 돈이 거의 떨어져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인도사람들의 표정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죠. 대부분의 인도사람들이 형편없이 가난한데, 오히려 저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그때 ‘가난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 글 쓰고 굶지 않고 살면 그만이다 생각했죠. 마침 형님네가 마련해 놓은 횡성의 조그만 시골집과 땅이 있었는데, 비어있는 상태라 거기서 고추, 배추 키우며 살면 될 거라 생각했어요(웃음). 결국은 동네 영감님 술친구로 지내다가 한해 만에 포기하고 상경했어요. 마침 전 직장 동료에게서 연락이 오기도 했고요.

Q 그 연락이 인생 반전의 계기로 작용한 벤처기업 성공인가요?

(웃음), 당시 그 분은 전 직장의 다른 팀에 있었는데 그 동료도 IMF때 구조조정 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했고 들어보니 아주 그럴 듯 한 거예요. 사람들한테 좋은 일이기도 하겠다 싶어서 정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어요. 둘이 차에서 회의하고 궁리하고 하면서 사업을 벌인 거죠. 그게 바로 휴대폰 벨소리 다운로드 사업이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초였죠. 물론 처음에는 잘 안됐어요. 그 동료는 화학도고 나는 문학도였는데, 그걸 둘이서 하겠다고 했으니 거의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고요. 아이디어는 기발한데 솔루션이 없었던 거죠. 제안을 듣는 회사에서는 “만들어서 가져와봐라, 우리 쪽 박사들도 연구했는데 안 된다고 이미 포기한 사업이다”라고 코웃음 치더군요. 그런데 세상 일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방법은 있게 마련이더라고요. 정말 우연찮게 방법을 찾아서 그게 대박을 터뜨린 거죠. 결국 그 회사는 코스닥에까지 상장되고 제법 규모가 커져 전 그 계열사인 케이블 방송국, GPS 개발사 대표를 맡기도 했고요.

Q 시에 대한 생각은 늘 하셨다고 하지만, 오래 동안 작품발표를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기업인으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목표가 있으셨나요?

딱 3년만 일하고 1억원만 벌어서 은퇴 후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더군요. 한번 일을 시작하니 계속 가능성이 생기고 조직이 커지고, 책임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요. 또 그 사이에 결혼을 하기도 했고요. 아이가 생겼고, 더더욱 발을 빼기 힘든 상황이 되더군요. 그래서 ‘아직은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나보다’ 생각했고, 그렇게 9년이 흘러가더군요.

Q 등단 이후 18년 만인 2010년 시집 <상처적 체질>을 발표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두고 ‘시단의 관행’을 깼다고 표현 돼 있는데 어떤 이유인가요?

보통 시집들이 나올 때는 다른 문예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서 내곤 해요. 신작시는 거의 없는 편이죠. 그런데 제 경우는 한 편도 발표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집을 낸 것이니까요. 70편 전편이 다 미 발표작이었던 거죠. 그걸 전작시집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거의 전무후무한 방식이었다고 봐야죠. 그저 문학과지성(이하 문지)에 투고를 한 것인데, 문지에서 저 같은 무명 시인의 시집을 내 준 경우는 없었거든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죠. 나중에 들어보니 제 시를 두고 서너 번 편집회의를 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문지에 창작시집을 내는 건 신춘문예보다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문지에서 시집을 내는 것은 제 오랜 꿈이기도 했어요. 연락을 들었을 때는 날아갈 듯 했죠.

Q 굉장히 돌아가신 편이네요 어떻게 보면 바로 시인의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요.

‘바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에요.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만 쓰지 않아요. 거의 다 직장생활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시는 돈이 안 되니까요. 잘나가는 시인들은 거의 대학교수 같은 걸 하잖아요. 그럼 대학교수는 곧장 가는 거라 할 수 있나요? 그렇진 않거든요. 시인과 대학교수는 별개의 문제에요. 물론 그럼에도 제가 좀 늦긴 했죠. 1년에 4편의 시를 쓰면서 이게 뭔가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전 속으로 늘 ‘나는 시인인데’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어요. 시인이지만 현실이 안받쳐주니 늘 다른 인생을 살았던 거죠. 그럼에도 시를 놓은 적은 없어요. 시인이 시를 안 쓰면 안 되는 거니까.

Q 그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20대 대학생들에게 ‘조언’해 주신다면?

요즘 20대들은 정말 우리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먹고살기 위해, 취직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더군요. 사회가 요구하는 게 많아요. 저처럼 영어 한마디 못해도 우리 시절에는 취직이 됐거든요. 메이저급 광고회사도 문제없었어요. 하지만 요즘 상황은 전혀 아니더군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세상 일이 너무 애만 쓴다고 되진 않더라고요. 무엇이든 끊임없이 성실하게 하고 있으면 기회는 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꼭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 필요는 없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거기에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돈 안 된다는 시를 써왔지만, 결국 시가 절 구원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은 사업을 할 때도 꽤 도움이 됐어요. 옛날 사람들은 시인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어요. 그러니 ‘설마 시인이 거짓말 하겠어’라며 신뢰를 하더군요. 사실 시인이 원래 거짓말하는 존재인데(웃음). 일반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거짓말을 하는 존재죠.

인생에는 꿈이 있어야 해요. 그게 취직이 될 수 없는 거고, 내 집 마련이 될 순 없는 거예요. 학생들이 자신만의 다른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행복하면 되는 것이 꿈이거든요.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사회는 썩은 사회에요. 반드시 멸망하게 돼 있죠. 제가 돈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언급하는 예인데, 조선시대에 최고의 갑부라는 임상옥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홍삼장사를 해 성공한,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죠. 그 사람이 얼마나 부자였냐 하면 평양 보통문, 아마 남대문 보다 컸다고 해요. 자신이 가진 은자를 쌓으면 그 보통문 보다 크다고 얘기할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 그 돈 다 어디 갔습니까? 반면 우리가 조선시대 때 아주 불행했다고 말하는 연암 박지원 같은 분, 또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 선생 같은 분은 돈은 남지 않았어도 방대한 저서와 문학, 예술을 남겼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에 남길 것은 그런 하찮은 물질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지금 20대들은 정말 자신들만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가치는 옳지 않은 것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새로운 가치는 어른들이 만들어 줄 수 없어요. 스스로 만들어야 해요.

Q 문학과 글쓰기는 꼭 시인이나 소설가, 문학인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작가의 꿈을 꾸는 문청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시인 류근으로써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제 주변에도 시인, 소설가가 되고 싶어 정말 부단히 노력하는 친구들이 꽤 많거든요. 명심할 것은 이게 대단한 명예나 권력, 돈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지금은 문인들이 잘나가는 시대가 아니에요. 이름 있는 소설가도 2만부 팔기 힘들고, 시인들은 더 어렵죠. 옛날에는 시인이라면 존중받았지만, 요즘은 시인이 거의 5만명 이상이에요. 아무나 시인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을 하려면 정말 정직한 자기만의 글쓰기가 필요해요.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를 고민하라는 거죠. 저도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개중에는 그냥 오갈 데 없어 오는 사람들도 꽤 많아요. 정직하지 않은 거죠. 내가 반드시 써야할 이야기 없는데, 해야 할 얘기가 없는데 문학을 왜 합니까? 정말 내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왜 내가 이 시대에 문인으로 살아야 하는가하는 통렬한 자기 통찰이 선행되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절박해서, 정말 할 얘기가 있기 때문에, 내가 문학 아니면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다고 했을 때 문학은 자기를 구원하는 작업이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나가서 남을 구원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 가치관, 세계관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페이스북하면서 느낀 건데, 큰 상처로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정작 위로받지 못해 불행한 경우를 많이 봐요. 글쓰기 재주가 제게 있다고 하니 전 그저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들을 썼으면 좋겠어요. 너무 진지하고 교과서적인가요? 아무튼 남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나누고 더불어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류근

<데뷔>
1992년 문화일보 등단

<방송>
KBS <역사저널 그날>

<저서>
<싸나희 순정> 2015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2013
<상처적 체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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